문재인 살아온 길
빙초산에서 재수 도전까지
'대입도 사시도 대선도 재수'

"그가 어떤 사람인지 보려면 그 사람이 살아온 길을 봐야 한다."
이는 대통령선거 당선자에게도 적용될 수 있는 말이다. 특히 공약과 더불어 당선자의 살아온 길을 살펴본다면 그가 갖고 있는 가치, 철학, 이상 등을 파악할 수 있다.
레이더P는 19대 대선에 당선된 문재인 대통령의 그동안 발언, 저서, 칼럼, 인터뷰 등을 종합해 그가 살아온 여정을 '가상 자기소개서' 형태로 꾸며봤다.

He is...
▲1953년 경남 거제 출생 ▲경남중(68졸)-경남고(71졸)-경희대 법학 학사(72년입 80년졸) ▲1980 제22회 사법시험 합격 ▲2003 청와대 민정수석비서관 ▲2004.05 청와대 시민사회수석비서관▲2005.01 청와대 민정수석비서관 ▲2007.03 청와대 비서실장 ▲2007.08 제2차 남북정상회담 추진위원회위원장 ▲2010.08 사람사는세상 노무현재단 이사장 ▲2012 제19대 국회의원 (부산 사상구) ▲2012 민주통합당(더민주 전신) 대선후보 ▲2015.02 새정치민주연합(더 민주 전신) 당대표 ▲2015.12 더불어민주당 인재영입위원장 ▲ 2017.05 19대 대통령

10대 시절

<빙초산의 추억>
초등학교 때 저는 눈에 띄지 않는 아이였습니다. 내성적이어서 선생님의 관심을 받아본 적도 없습니다. 중학교 입시가 있던 6학년이 되면서 담임 선생님은 성적이 좋다고 칭찬을 하며 과외 수업을 받을 것을 권유했습니다.
하지만 가정 형편이 어려워 그런 생각은 진작 접고 그저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입학시험 과목은 음악, 미술, 체육을 포함해 전 과목이었습니다. 특히 팔 힘이 약해 체육과목 중 턱걸이가 전혀 되지 않았는데 친구들은 식초를 많이 먹으면 뼈가 유연해져 잘 할 수 있다고 얘기했습니다.
어머니가 안 계실 때 부엌에서 식초 한 모금을 마셨는데 양조식초가 아닌 다름 아닌 빙초산이었던 겁니다. 입은 물론 식도까지 부풀어 올라 며칠 동안 음식도 제대로 먹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노력 끝에 부산 최고 일류 학교로 꼽히던 경남중학교에 합격할 수 있었습니다. 빙초산 얘기는 입시를 준비하는 후배들에게도 회자됐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책과 신문>
경남중학교에는 잘 사는 아이들이 많이 다녔습니다. 용돈 씀씀이가 달라 함께 어울리기가 어려웠습니다. 이후 학교 도서관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졌습니다. 닥치는 대로 읽어나갔습니다. 책을 읽을 때가 가장 행복했습니다. 아버지는 장사를 떠나시면 한 달 만에 돌아오시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동화책, 위인전 등을 사오셨습니다. 시간 날 때마다 학교 도서관에 가거나 책을 대출받아 읽는 것은 고등학교를 마칠 때 까지 계속됐습니다.
사상계 같은 의식을 깨우치는 잡지도 비교적 일찍 접할 수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당시 야당지의 독자였고 저도 그 신문을 오랫동안 봤습니다. 사회의식을 일찍부터 키워 갈 수 있었던 것은 책에 굶주렸던 것과 아버지가 보는 신문을 읽기 시작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대학 입시 때 학교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은 대가를 치렀지만 독서를 통해 내면을 성장시키고 사회의식을 갖게 된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문제아 문재인…재수생>
고3에 올라가서는 술·담배를 하기도 했습니다. 서클 활동을 했고 방학 때 무전여행이나 캠핑을 가기도 했습니다. 고3 여름방학이 끝날 무렵 친구들과 축구시합을 한 다음 학교 뒷산에서 술 마시고 담배 피우며 고성방가를 하다가 선생님에게 걸려서 유기정학을 받기도 했다. 그 일로 문제아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습니다.
중요 시국상황을 맞으면 고등학생 시위대열에 동참하기도 했습니다. 제가 고등학교 2학년 때 전교생이 3선 개헌 반대 데모를 하고 교문 밖 진출을 시도하기도 했습니다. 그 일로 학교는 오랫동안 휴교를 하기도 했습니다. 교련 수업에 반발해 백지 답안지를 내는 등 다양한 경험을 하며 사회·정치의식을 키워갔습니다. 이런 이유로 당시 사회에서는 고등학생들을 요즘처럼 어리게만 보지 않고 꽤 어른 대접을 해줬습니다.
대학은 재수를 했죠. 가정 형편상 4년 장학금을 받고 경희대 법대에 수석으로 입학했습니다.

20대 시절

<하숙생활>
유신선포, 3선 개헌 등. 서슬 퍼렇던 시대 저의 사회의식을 키운 것은 하숙생활이었습니다. 밤늦게까지 시국담론을 나누는 곳이 바로 하숙집이었습니다. 저는 고등학교 선배들과 함께 하숙을 했습니다. 여러 대학이 섞여 있어 다른 대학의 학내저항운동 소식도 들으면서 현실 비판적인 의식을 키울 수 있었죠.
사회과학 서클, 농촌운동 서클소식, 지하신문들, 학내시위 소식, 선언문도 접할 수 있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접했던 리영희 선생의 `베트남 전쟁` 논문과 `전환시대의 논리` 책 등도 저에게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영희 선생 논문은 베트남 전쟁의 부도덕성, 제국주의 전쟁, 미국 내 반전운동을 다뤘는데 하숙집에서도 주고받던 얘기였습니다.
하지만 그 논문과 책을 통해 진실을 회피하지 않고 직시해야 한다는 지식인의 자세 등을 다시 생각하게 됐습니다. 이후 유신반대 시위를 기획하는 등 본격적으로 학생운동에 뛰어들었습니다.

<아내 김정숙을 만나다>
그녀는 저와 같은 경희대 음대생이었고 저보다 2년 후배였습니다. 법대 축제에서 파트너로 처음 만났습니다. 이후 교내에서 한 번씩 만나면 인사하는 수준의 관계를 이어왔습니다. 지난 1975년 4월 시위 때 아내와의 인연이 이어졌습니다. 비상학생총회 후 교문 앞 까지 행진했다가 페퍼포그(일명 가스차)를 맞아 실신했는데 누가 물수건으로 얼굴을 닦아준 것을 느낀 것 입니다.
눈을 떠 보니 아내였습니다. 학생운동으로 구치소에 있을 때에도 아내가 뜻밖에 면회를 오기도 했습니다. 석방 이후 입대를 하게 됐는데 아내는 군대로도 면회를 왔습니다. 아내는 저와의 연애사를 면회의 역사라고 말하곤 합니다. 저 또한 경희대를 가게된 것은 오로지 아내를 만나기 위해서였던 것 같다고 말합니다.

<아! 아버지>
아버지가 저녁 식사를 하시다가 갑자기 심장마비로 돌아가셨습니다. 아버지는 피난 이후 평생 고향을 그리워했지만 고향땅을 밟아보지도 못하고 눈을 감아야 했던 불행한 분이었습니다. 제게 기대를 걸었던 아버지에게 잘되는 모습이나 희망을 보여드리지 못한 것이 죄송스러웠습니다.
아버지를 위해서라도 그냥 취업하는 정도로는 안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사법시험을 보기로 결심했습니다. 재수를 했습니다. 저는 대학 입학도 재수를 했고, 사법시험도 재수해서 붙었습니다.
변호사가 됐고 노무현 대통령과의 인연을 맺는 등 인생의 큰 변곡점이 됐던 일도 아버지가 아니었으면 시작될 수 없었던 일이었을 것입니다. 사법연수원을 차석으로 마치면서 법무부장관상을 받고 판사를 희망했으나, 시위 전력으로 판사로 임용되지 못했다. 검사를 할 수도 있었으나 적성에 맞지 않았습니다.

30~40대 시절

<노무현을 만나다>
박정규 전 청와대 민정수석의 소개로 부산에서 활동하던 노무현 당시 변호사를 만났습니다. 그는 여느 판사·검사와는 풍기는 분위기가 전혀 달랐습니다. 아주 소탈했고 솔직했으며 친근했습니다.
저는 학창시절 데모하다 제적당하고 구속됐으며 그로인해 판사 임용이 안 된 얘기를 하니 노 변호사는 자신이 변론했던 부림사건 경험을 얘기하면서 진심으로 함께 분노해줬습니다. 제게 함께 깨끗한 변호사를 해보자고 얘기를 하기도 했습니다. 따뜻한 마음이 와 닿았고 바로 같이 일을 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 분은 늘 제게 높임말을 썼습니다. 노 변호사는 부림사건, 부산미문화원방화사건 등 각종 시국사건을 도맡았고 그와 함께 하면서 우리는 이 지역 노동인권 변론의 중심에 서게 됐습니다.

<부산에서 접한 재야>
부림사건, 부산 미문화원 점거농성사건, 부산상공회의소 점거농상 등 부지역산에서 벌어졌던 각종 시국사건을 거의 도맡으면서 지역 내 재야인사들과도 가깝게 됐습니다. 지난 1985년에는 부산민주시민협의회(부민협)가 설립됐습니다. 부산의 모든 재야를 망라하는 조직이었습니다. 이후 87년 6월 항쟁을 주도한 국민운동본부도 부민협이 주축이 됐습니다.
저와 노 변호사는 처음부터 발기인으로 참여했고 후에 상임위원도 맡았습니다. 부산에 내려오면서 `내가 꼭 인권변호사가 되겠다`고 목표를 세운적은 한번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부산에서 달리 사건을 맡아주는 변호사가 없었고 한번 사건을 맡으면서 봇물처럼 밀려들어왔습니다. 87년 1월 부산 출신 서울대생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이 터졌고 저와 노 변호사는 박종철군 국민추도회 준비위원으로 참여하고 거리에서 최루탄을 쏴대는 경찰과 대치하기도 했습니다. 제가 대표 변호사로 있던 곳도 법무법인 부산이었습니다.

<홀로 변호사>
지난 1988년 4월 함께해온 노 변호사는 13대 총선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됐습니다. 그는 서울로 올라갔고 저는 혼자 남게 됐습니다. 노 변호사와 함께 하던 일을 저는 혼자 감당해야 했습니다. 혼자서 감당하기 어려운 만큼 많은 시국사건과 노동사건이 있었습니다. 셀 수 없는 사건을 맡았지만 잊히지 않는 대표적은 사건이 동의대 사건입니다. 이 사건은 진상을 둘러싸고 아직도 논란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동의대 사건은 변호사를 하는 동안 맡은 형사사건 중 제일 규모가 큰 사건이었습니다. 공소사실이 방대한데다 피고인 수도 워낙 많아 검찰은 8건으로 나눠서 기소했습니다. 저 또한 민변 변호사들에게 부탁해 공동 변호인단을 꾸렸습니다. 정말 고생을 많이 하던 시절이었습니다. 검찰은 화재의 원인이 된 화염병을 던진 학생에게 사형을 구형했습니다. 변호사를 하는 동안 처음 받아보는 사형 구형이었습니다.

50대 시절

<청와대 민정수석>
2003년 1월 23일 민정수석으로 내정됐습니다. 당시 민정수석실 사정비서관은 우리와 잘 모르고 인간관계도 없는 사람으로 발탁하려고 했습니다. 그 자리는 대통령 특수 관계자, 고위공직자, 청와대 내부 감찰을 맡는 중책이었습니다. 아무 연고가 없는 사람이 맡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옷로비 사건에서 특검보를 했던 양인석 변호사를 겨우 설득했습니다.
하지만 인수위 안에서 강한 반발이 있었습니다. 왜 우리쪽 사람을 쓰지 않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사정에도 코드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어쩌면 현실적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당시에는 그래서는 안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결국 제 생각을 관철시켰고 우여곡절 끝에 인선을 마무리했습니다. 이외에도 강금실 법무장관·이용섭 초대 국세청장 추천 등 개혁적 인사 추천에 적극 앞장섰습니다.

<네팔트래킹과 금연>
건강이 나빠져 1년 만에 청와대를 나왔습니다. 청와대를 나와 앞으로 뭘 할지 계획이 서지 않았습니다. 2004년 2월 28일 네팔 히말라야로 떠났습니다. 오랫동안 꿈 꿨던 네팔과 티베트, 북인도를 여행하면서 앞으로 뭘 하며 살지도 생각해보려고 했습니다. 트레킹을 고행하듯이 했습니다. 하지만 히말라야의 경관, 산간의 아름다움, 밤하늘의 별, 맑은 공기는 보상으로 충분했습니다.
또 하나의 큰 소득이 있었는데 담배를 끊었다는 것입니다. 카트만두 호텔에서 아침 신문을 보다 노무현 대통령의 탄핵 소추안 발의 소식을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일단 돌아가서 상황을 본 다음 다시 여행을 하기로 했습니다. 저는 2016년 6월 옛날을 생각하며 또 한번 히말라야를 찾기도 했습니다.

<탄핵>
결국 탄핵 소추안이 국회에서 의결됐습니다. 노 대통령은 제게 탄핵대리인단 구성을 비롯해 법적 대응 전반을 맡아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이후 대리인단을 구성해서 실무 역할과 홍보를 맡으며 본격적으로 일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탄핵 재판 도중 17대 국회의원 총선도 있었습니다. 그 결과 열린우리당이 전체 299석 가운데 152석을 차지해 원내 과반수 정당이 됐습니다. 탄핵에 대한 민의의 무서운 심판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드디어 5월 14일 헌재에서 기각 결정을 내렸고 그간 고생한 대리인들과 함께 기쁨을 나눴습니다. 이후 다시 청와대로 들어가 시민사회수석으로 일했습니다.

<그의 죽음>
2009년 5월 23일 노 전 대통령의 서거 소식은 국민들을 충격에 빠뜨렸습니다. 장례를 모두 마친 후 지속적인 추모기념사업을 위해 저는 봉하재단 감사직과 노무현재단 상임이사직을 맡았습니다. 1주일에 이틀은 그쪽 일에 시간을 내야 했습니다.
1주기를 끝낸 후 지방선거에서 대통령의 가치를 이어가겠다는 분들이 좋은 결과를 보여줬습니다. 김두관, 안희정, 이광재 세 사람의 약진은 특히 감격적이었습니다. 이후 저는 천직으로 생각해온 변호사로 다시 돌아갔습니다. 술을 한잔 마시면 가끔 옛날을 추억합니다. 내 인생에서 노무현은 무엇인가. 잘 모르겠습니다. 분명한 것은 그는 내 삶을 굉장히 많이 규정했습니다. 그를 만나지 않았다면 내 삶은 전혀 달랐을 것입니다.

<대선에 나서다>
지난 2012년 4월 11일 저는 대한민국 제19대 총선에서 부산 사상구에서 출마해 국회의원에 당선됐습니다. 약 두달 후 저는 서대문 독립공원에서 "보통 사람이 중심 된 정의로운 나라를 만들겠다"며 대선 출마를 공식 선언했습니다.
당시 제가 내건 슬로건은 `사람이 먼저다`였고 캠프명은 `담쟁이 캠프`였습니다. 이후 8월 25일부터 9월 16일까지 열린 국민참여경선에서 손학규, 김두관, 정세균 당시 후보와 경쟁했고 전국 순회경선 13회 전승을 거두며 민주통합당의 제18대 대통령 선거 후보로 선출됐습니다.
하지만 2012년 12월 19일 선거에서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에 석패하며 고배를 마셔야 했습니다. 탈락 후보 사상 최다인1469만2632표(48.0%)를 득표했지만 약 100만 표 차이로 패배했습니다. 다음날 아내는 집 앞에 쌓인 눈을 저와 함께 치우며 펑펑 울었던 기억이 납니다.

60대 이후 시절

<다시 대선에 나서다>
저는 19대 대통령선거에 출마했습니다. 인수위 없는 조기 대선으로 준비되지 않으면 대통령직을 감당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측면에서 저는 그 어떤 대선주자들 가운데서도 가장 준비가 잘 된 후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를 위해 최순실 국정농단으로 인해 크게 절망한 국민들을 위해 반드시 정권교체를 이루겠다고 약속하기도 했습니다. 일자리·안보·성장동력·안전·지역분권 등에 대한 이슈를 선제적으로 제시하며 정책선거를 주도했다고 자부합니다.
이를 반영하듯 각종 여론조사 지지율에서도 줄곧 1위 자리를 지켰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당선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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