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은 100만원…세계 홀린 유쾌한 도전

최초입력 2018.01.01 00:08:44
최종수정 2018.01.01 09:56:40

잘나가던 대기업 3인 "온라인 언어장벽 허물자" 번역 서비스 `플리토` 창업
샌드위치 1개 셋이 먹으며 런던 뒷골목서 `주경야독`…투자유치만 140억 넘어
아이디어·꿈으로 뭉친 3총사의 질주…스타트업 대회 휩쓰니 구글·페북서 손짓

◆ 2018 신년기획 1000억 벤처 1000개 만들자 ◆

서른 초반의 나이에 '세계 1위 언어 데이터 회사'를 꿈꾸며 플리토를 창업한 3인방. 잦은 해외 출장으로 서로 얼굴 볼 일이 드물지만 인터뷰를 위해 서울 강남 사무실에 모였다. 왼쪽부터 강동한 CTO, 김진구 COO, 이정수 대표. [한주형 기자]
2012년 9월 어느 날 늦은 오후. 30대 초반의 앳된 청년 세 명이 영국 히스로국제공항에 모습을 드러냈다. 트렁크를 한 개씩 끌고 지하철역으로 가는 모습은 여느 관광객과 같았지만 그들의 얼굴에는 설렘과 미래에 대한 걱정이 교차했다. 그도 그럴 것이 세 명이 가진 돈은 달랑 100만원. 한 푼이라도 아끼려고 항공료가 가장 저렴한 비행기를 타고 막 공항에 도착한 참이었다. 도착 첫날 그들은 돈 때문에 저녁을 굶었다.
"불법 노동자가 몰려 있는 런던 외진 지역에 셋방을 구해놨는데 첫날부터 집을 찾지 못하겠더라고요. 한참 헤매다가 밤 12시가 돼서야 도착했죠. 거울을 봤는데 웬 생쥐 세 마리가 서 있더군요."SK텔레콤 사내벤처 팀에서 함께 일하던 동료 이정수(36), 강동한(37), 김진구(38) 씨. '온라인 세계에서 모든 언어의 경계를 무너뜨리겠다'는 아이디어로 과감히 사표를 던지고 퇴직금과 비상금 탈탈 털어 창업한 '플리토'는 이렇게 출발했다.

플리토는 전 세계 173개국에 18개 언어로 사진과 음성, 동영상 번역서비스를 제공하는 스타트업이다. 아랍어를 비롯해 4개 국어를 하는 등 언어에 특출한 능력을 가진 대표 이정수 씨와 컴퓨터를 전공한 엔지니어 두 명이 뭉쳤다.

그들은 이 아이디어로 글로벌 액셀러레이터인 '테크스타스(옛 스프링보드)'의 스타트업 육성 프로그램에 지원해 뽑혔다. 아시아 기업 최초였다. 이날은 바로 지원받기로 한 테크스타스 본사를 찾아 런던에 도착한 날이다.

테크스타스는 전 세계에서 기술력 있는 신생기업을 발굴해 13주 동안 사무실과 네트워킹 기회 등을 제공해주면서 초기 정착을 돕는다. 플리토는 영국, 이탈리아, 프랑스, 캐나다 등 세계 곳곳에서 선발된 10개 팀 중 하나로 뽑혔고 모든 팀이 한 사무실에서 창업을 준비했다.

돈 한 푼 없이 시작한 영국 생활은 막막함 그 자체였다. 아침은 굶기 일쑤였고 점심·저녁은 샌드위치로 때웠다. 나중엔 돈이 없어 큰 사이즈의 샌드위치를 한 개 사서 셋이 나눠 먹었다. 그래도 미래를 생각하면 옆을 돌아볼 틈이 없었다.

세 명의 한국 청년들은 가장 먼저 출근하고 가장 늦게 퇴근했다. 한 달이 지나 사업 아이템으로 시험 삼아 런던 창업경진대회 '드로이드콘'에 출전했다가 덜컥 대상을 받았다. '세계가 우리를 알아주는구나' 하고 갑자기 자신감이 붙었다. 누가 먼저 개발할까봐 쉴 틈이 없었다. 런던에 온 지 석 달이 채 안 돼 서버와 웹, 앱 프로그램 개발을 끝내버렸다. "개발 직후 바로 구글, 페이스북에서 오라는 요청을 받았죠. 구글 런던지사에서 브리핑하고 미국 페이스북 본사로 날아가서 아시아 기업 최초로 사업모델을 설명했습니다."

본격적인 사업을 위해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 건 2012년 12월. 강남에 5평(약 16.5㎡) 남짓한 규모의 사무실을 구했다.

플리토(flitto)는 '~로 훨훨 날아가다'는 뜻을 지닌 영어 '플릿 투(flit to)'에서 따온 것이다.

진가는 해외에서 먼저 알아줬다. 석 달 뒤 미국 텍사스 오스틴에서 열린 국제 콘텐츠산업 콘퍼런스 '사우스 바이 사우스웨스트(SXSW)'에 초청받았다. 트위터나 핀터레스트 등이 유니콘(기업가치가 1조원을 넘는 비상장 스타트업)으로 발돋움한 바로 그 무대다.

이후 플리토는 이스라엘, 스위스, 대만, 중국 등에서 열린 스타트업 대회에서 모조리 대상을 휩쓸며 국내보다 해외에서 더 유명해졌다. "2014년 스위스 글로벌 스타트업 대회에서도 결승전에 올라갔죠. 1000명이 넘는 외국인 앞에서 영어로 프레젠테이션을 하고 내려오는데 긴장보다는 환희가 느껴지더군요." 플리토는 당당히 대상을 거머쥐었다.

창업 초기에는 트위터, 페이스북, 웨이보 등 SNS를 사용하는 유명인의 글을 팬들이 자발적으로 외국어로 번역해서 올리는 SNS 공간 제공업체로 출발했다. 팬들에 의해 세계 14개국 언어로 번역된 유명인의 글들을 플리토는 하나씩 차곡차곡 쌓아가면서 데이터베이스(DB)를 구축했다. 플리토는 집단지성을 통해 외국어 문장 데이터를 방대하게 쌓으면서 세계에서 유명한 번역 서비스업체로 성장했다.

글로벌 기업들이 앞다퉈 러브콜을 보낼 만큼 플리토는 유망 기업으로 성장했다. 김진구 최고운영책임자(COO)는 그 비결에 대해 "처음에는 단순 번역만 제공하다가 지금은 인공지능(AI)과 결합된 서비스로까지 진화한 결과"라고 귀띔했다.

강동한 최고기술책임자(CTO)는 "스타트업이 망가지는 이유 중 하나가 창업자들 간의 불화인데, 우리는 한 번도 싸운 적이 없으며 지금까지 세 명이 함께한다는 게 비결"이라고 말했다.

플리토에는 매일 30만건 이상의 번역 요청이 들어온다. 플리토 앱을 통해 웬만한 문장은 무료로 번역해서 볼 수 있다. 수많은 번역 문장을 DB로 축적한 데다 최근에는 AI 기술까지 결합해 비문도 정확히 번역된다. 예를 들어 플리토 앱에 한글로 '실화냐'라고 치면 영어로 'Is it real?'이라고 번역된다.

플리토의 가장 큰 수익원은 외국어 문장 데이터 판매다. 삼성전자 등 국내 대표 기업을 비롯해 마이크로소프트, 텐센트, 바이두 등 글로벌 기업들이 플리토를 통해 외국어 데이터를 구입했다. 네이버도 플리토가 쌓아온 외국어 데이터를 여러 번 구입했고 이를 토대로 AI 기반 번역 앱 '파파고'를 출시했다. 플리토 인수 제안을 해오는 글로벌 기업들도 많다. 아직 연간 매출이 100억원도 안 되지만 국내 벤처캐피털 등으로부터 투자받은 금액만 140억원에 달할 만큼 기업가치도 올라갔다.

국내에서도 서서히 유명세를 타고 있다. 서울 청계천 곳곳에 있는 안내표지판에 부착된 QR코드를 스캔하면 영어, 중국어, 일본어 등 10개 언어로 청계천에 관한 정보를 볼 수 있는데 플리토가 서울시와 협업한 것이다.

탄탄대로만 달려왔을 것 같은데 이 대표는 창업의 고통을 털어놨다. 창업 이후 하루도 편히 잠을 잔 적이 없을 정도로 심적 고통에 시달려 왔다는 것. 이 대표는 "창업 1년 차에는 열심히 하려고 마케팅 책을 봤고, 2년 차에는 직원관리 관련 책을 주로 보다가 3년 차부터는 거의 매일 성경과 불경을 보며 마음을 다스리고 있다"고 눙쳤다.

그의 1차적 꿈은 유니콘 기업으로 가는 것이다. 그는 "스타트업이 '데스밸리'를 넘어 유니콘 문턱 가까이에라도 가려면 적절한 기회가 올 때까지 버티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다음의 꿈은 좀 더 원대했다. "올해에는 플리토 로고가 전 세계적으로 쫙 퍼졌으면 좋겠습니다. 유럽, 중동에도 플리토가 쌓아온 언어 데이터를 판매하는 게 목표예요. 플리토를 세계 1위 언어 데이터 회사로 키울 겁니다."

[신수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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