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인여성의 유쾌한 반란 '히든 피겨스'가 주는 감동

최초입력 2017.03.17 15:01:00
최종수정 2017.03.17 19:49:58

2008년 NASA와 인터뷰하는 캐서린 존슨. /사진=NASA
▲ 2008년 NASA와 인터뷰하는 캐서린 존슨. /사진=NASA
[시네마&-130] '히든 피겨스'라는 제목에 쓰인 단어 '피겨스(figures)'에는 중의적인 뜻이 있다. 하나는 '숫자', 또 하나는 '사람'. 영화는 제목 그대로 역사 속에 '숨겨진 숫자'를 다룬 '숨겨진 인물'을 보여준다.

◆숨겨진 수학천재, 세 흑인 여성 이야기

 영화는 실존 인물 캐서린 존슨(타라지 P 헨슨), 도로시 본(옥타비아 스펜서), 메리 잭슨(저넬 모네이)에 관한 이야기다. 도대체 누구냐고? 모르는 게 당연하다. 미국의 우주 개발 역사에서 이들은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지만 흑인 여성이라는 이유로 소외돼 거의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영화는 1961년 세 흑인 여성이 미국항공우주국(NASA)으로 출근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소련과의 우주 개발 경쟁이 본격적으로 펼쳐지던 시절 NASA에서 이들이 담당한 일은 '계산'이다. 당시 전자식 컴퓨터가 아직 만들어지지 않아 계산은 모두 수작업으로 이뤄졌고, 전국에서 수학 능력이 탁월한 흑인 여성들이 '컴퓨터'라는 직책으로 NASA에 채용된 것이다.

NASA 재직 당시의 도로시 본. /사진=NASA
▲ NASA 재직 당시의 도로시 본. /사진=NASA
NASA 재직 당시의 메리 잭슨. /사진=NASA
▲ NASA 재직 당시의 메리 잭슨. /사진=NASA
NASA 재직 당시의 캐서린 존슨. /사진=NASA
▲ NASA 재직 당시의 캐서린 존슨. /사진=NASA
 이들은 NASA 랭리연구소의 'West Area Computing'이라는 건물에 모여 근무했기에 백인들은 이들을 'West Computers'라고 불렀다. 그러니까 지금 우리가 매일 사용하는 '컴퓨터'라는 단어의 시작이 바로 이들이었던 셈이다. 당시 이 단어에는 '계산만 할 줄 아는 사람'이라는 비하의 뉘앙스가 담겨 있었다.

 NASA 홈페이지는 캐서린 존슨의 90세 생일을 앞둔 2008년 그녀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인터뷰한 적 있는데 당시 기사의 제목은 '컴퓨터가 치마를 입던 시절의 컴퓨터'였다. 기사에 따르면 존슨은 1953년부터 1986년까지 30년 이상 NASA에서 일했다. 그녀의 가장 큰 업적은 아폴로 11호를 달로 보낸 스페이스 셔틀 프로그램의 궤도를 수학적으로 계산한 것으로 그녀는 이 프로젝트에 참여하기 전까지 NASA의 거의 모든 우주 비행사 프로젝트에 참여해 중요한 계산을 해냈다.

 흑인이자 여성으로 마이너리티 중 마이너리티였던 그녀는 법적, 제도적으로 여전히 인종 차별이 행해지고 있던 1960년대에 어떻게 이런 업적을 남길 수 있었을까? '히든 피겨스'는 존슨을 비롯한 세 명의 흑인 여성이 세상의 차별에 저항하는 과정을 따뜻하고 유쾌한 드라마로 펼쳐보인다.

영화 "히든 피겨스"
▲ 영화 "히든 피겨스"
◆마이너리티의 유쾌한 반란

 여성 차별과 흑인 차별 중 뭐가 먼저 철폐됐을까? 참정권이 먼저 주어진 쪽은 흑인이다. 남북전쟁 이후 1870년에 흑인은 참정권을 얻었다. 반면 미국 여성이 참정권을 쟁취한 것은 1920년이다(세계 최초는 1893년 뉴질랜드다). 여성은 흑인보다 더 차별받았다(힐러리 클린턴은 실패하고 버락 오바마가 먼저 대통령이 된 이유 역시 어쩌면 이런 차별의 역사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흑인과 여성에게 참정권이 주어졌다고 해도 실제로 사회 제도상 차별이 사라진 것은 한참 후의 일이다. 1960년이면 여성도 흑인도 자유로웠을 것 같지만 여전히 사회적 장벽이 높았다. 지금은 상상하기 힘들지만 당시 미국엔 공중 화장실이 백인 남성용, 백인 여성용, 유색인 남성용, 유색인 여성용 등 4개로 분리돼 있었다. 영화 속에서 존슨은 유색인 여성용 화장실을 이용하기 위해 가까운 백인 여성용 화장실을 놔두고 800m를 달려간다. 이뿐만 아니라 거리의 식수대, 커피 포트 등도 백인용(White)과 유색인용(Colored)이 철저히 구분됐고, 버스를 타면 앞자리는 백인, 뒷자리는 흑인 전용이었다. 도서관도 분리돼 있어 흑인이 볼 수 있는 책은 제한적이었다. 노예제도는 폐지됐지만 여전히 백인과 흑인은 각자의 미국을 따로 살아가는 존재들이었던 것이다.

 '히든 피겨스'는 능력만을 중시할 것 같은 과학기술계에서도 흑인과 여성에 대한 차별이 만연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세 명의 수학 천재 '컴퓨터'들은 편견에 저항해 자신의 길을 개척한다. 이들의 투쟁 방식은 무작정 목소리만 드높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능력을 보여주며 차분하게 백인 남성들을 설득하는 것이다.

영화 "히든 피겨스"
▲ 영화 "히든 피겨스"
 영화에 등장하는 메리 잭슨의 에피소드를 살펴 보자. 그녀는 흑인에게 수강이 금지된 버지니아주의 고등학교 물리 수업을 듣게 해달라는 소송을 내면서 재판관을 이렇게 설득한다.

 "판사님이 오늘 맡은 사건 중 100년 후 이 나라를 바꿀 결정이 있습니다. 판사님이 결정하면 저는 최초의 흑인 여성 엔지니어가 될 수 있습니다. 판사님의 이름 역시 역사에 기록될 것입니다. 최초로 남을 이 기회를 놓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잭슨의 말투는 부드럽고 단호하다. 상대방을 치켜세우면서 자신이 원하는 바를 얻는 설득의 모범 사례다. 차별받는 자신이 일방적으로 불리한 상황에서도 그녀는 현명하게 자신이 줄 수 있는 것을 판사에게 내밀며 '윈윈' 제안을 한다. 한쪽이 일방적으로 승리하거나 패배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승리하는 이 방식은 모두를 유쾌하게 한다. 결국 그녀는 "흑인은 엔지니어가 될 수 없다"는 단단한 차별의 벽을 뚫고 최초의 흑인 여성 엔지니어가 된다. 마찬가지로 존슨은 나사 스페이스 태스크 그룹의 당당한 일원으로 거듭나고, 도로시 본은 흑인 여성 최초의 NASA 관리직에 오른다.

 그녀들의 투쟁으로부터 50여 년이 흘렀지만 여전히 우리 사회에는 보이지 않는 유리벽과 유리천장이 가득하다. 길이 막혀 더 이상 전진하지 못하면 좌절하는 것이 아니라 당당한 태도로 자신만의 길을 만들어 최초가 되기를 두려워하지 않았던 세 흑인 여성들의 이야기는 많은 사람들에게 울림을 주지 않을까 싶다.



영화 "히든 피겨스"
▲ 영화 "히든 피겨스"
◆인류 최초의 달 탐사선을 쏘아올리다

 영화의 주인공인 존슨이 NASA에서 한 일은 궤도 계산이다. 그녀는 알 해리슨(케빈 코스트너)이 이끄는 스페이스 태스크 그룹에 합류해 '머큐리 프로젝트', 즉 미국 최초의 유인 우주선 발사 프로젝트에서 궤도를 계산하는 일을 맡는다. 당시 소련은 1957년 최초의 인공위성 스푸트니크 1호에 이어 1961년 유리 가가린이 보스토크 1호를 타고 인류 최초의 우주비행사가 되면서 미국을 자극했다. 초조해진 존 F 케네디는 10년 내 인간을 달에 보내겠다고 대국민 선언을 해버린다.

 일단 저지르고 보는 스타일의 리더가 있으면 아래 사람들이 피곤해지는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인가 보다. 당장 NASA는 발등에 불이 떨어지고 해리슨은 직원들을 닥달한다. 어쩌면 과학계에서 인종차별이 약화되는데 미국과 소련 간의 치열한 경쟁 분위기가 한몫을 담당했는지도 모르겠다. 뛰어난 능력을 가진 인재가 눈앞에 있는데 더 이상 흑인 여성이라는 이유로 무시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NASA는 점점 성과를 내기 시작한다. 그해 5월 유인 우주선 프리덤 7호 발사에 성공하고 이듬해 존 글렌을 태운 프렌드십 7호가 지구 궤도를 돈다. 이때는 막 IBM의 전자 컴퓨터가 NASA에 도입된 시기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우스꽝스럽지만 당시 NASA 엔지니어들은 덩치만 큰 전자 컴퓨터보다 오히려 인간 컴퓨터를 더 신뢰했다고 한다. 유명 인사였던 글렌은 프렌드십 7호 발사를 앞두고 NASA에 한 가지 제안을 하는데 이는 존슨의 입지를 더욱 확고하게 해주었다.

 "그 소녀(존슨)에게 숫자들을 체크해 달라고 하세요. 그녀가 좋다고 해야 저는 준비될 겁니다."

 미국의 머큐리 프로젝트는 제미니, 아폴로로 진화했고 1969년 아폴로 11호의 달 착륙으로 이어진다. 존슨은 이 모든 과정을 함께한 산증인이다. 현재 99세인 그녀는 뒤늦게 업적을 인정받아 2015년 버락 오바마 당시 미국 대통령으로부터 자유 메달을 수상했다. 영화 '히든 피겨스'로 대중의 주목을 받은 뒤엔 최근 아카데미 시상식 무대에 올라 기립박수를 받기도 했다. 그녀는 자신의 업적에 관해 NASA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회고했다.

 "당시 우주에 관한 수학이 없었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만의 교과서를 썼습니다."

 매주 많은 영화들이 개봉하고 그 속에는 수많은 영웅이 등장하지만 '히든 피겨스'의 세 흑인 여성이야말로 아무도 몰랐던 역사 속 영웅을 소환했다는 점에서 뜻깊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이들의 용기와 진취적인 행동들이 한 걸음씩 전진해 이룬 결과물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한다. 영화는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게 기분 좋은 웃음과 차분한 휴먼 드라마로 이들의 숨겨졌던 삶을 복원해낸다. 23일 개봉.

[양유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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