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릿팝은 죽었다 선언한 브릿팝의 아이콘 '블러

최초입력 2017.09.08 06:01:00
최종수정 2017.09.07 18:40:09

-브릿팝 굴레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브릿팝의 선두주자

-앨범 내놓을때마다 스타일 바꿔가며 음악적 성숙 드러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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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쿨 오브 락-22] 한국이 낳은 최고 수준의 록밴드 중 하나인 그룹 '넥스트'의 보컬 신해철은 한때 아이돌이었다. 대학가요제에서 '그대에게'란 곡으로 밴드 활동을 통해 데뷔하긴 했지만 그를 스타덤에 올린 곡은 솔로로 내놓은 발라드곡 '슬픈 표정하지 말아요'였다. 당시 그는 곱상한 외모와 전달력 있는 목소리를 앞세워 소녀 팬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얻었다. 다음 앨범인 '마이셀프(myself)'부터 본색을 드러내 테크노, 록 등과 결합한 여러 실험을 시작했지만 말이다.

영국에서 '국민가수' 취급을 받는 로비 윌리엄스(Robbie Williams)는 '테이크 댓(TAKE THAT)' 이라는 보이 그룹 출신이다. 윌리엄스는 당시 '사고뭉치' 콘셉트를 담당하며 적잖은 이슈몰이를 했다. 역설적이게도 보이 그룹답지 않은 껄렁한 태도와 도발적인 무대 매너가 그를 솔로 활동에서도 빛을 발하게 만들었다. 그룹 시나위에서 베이스를 쳤던 서태지는 댄스그룹인 '서태지와 아이들'로 청소년의 영웅으로 군림하다 결국 본인이 좋아하는 록의 영역으로 회귀해 지금까지 활동하고 있다. '하고 싶은 것 한 가지를 하기 위해서는 최소 열 가지 좋아하는 걸 포기해야 한다'는 말이 있는데 대중성을 좇아야 하는 음악계에서도 이런 이슈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는 모양이다.

지금부터 소개할 영국의 '블러(Blur)'라는 밴드 역시 큰 그림에서 앞서 소개한 음악인과 비슷한 행보를 보여준 뮤지션이다. 곱상한 외모와 소녀 팬을 자극하는 달달한 멜로디로 주목받았던 이들은 1997년 "브릿팝은 죽었다"는 도발적인 멘트와 함께 대대적인 변신을 시도했다. 브릿팝은 1990년대 세계적으로 주목받았던 영국 음악을 총칭해서 표현하는 일종의 수사였다. 영국의 비틀스가 전 세계를 휩쓴 이후 30여 년 만에 오아시스, 블러, 스웨이드 같은 밴드가 나타나 미국 시장에서 큰 인기를 끌었기 때문이다. 특히 블러는 그중 가장 주목받았던 브릿팝 밴드 중 하나였다. '브릿팝=블러'라는 도식적인 잣대를 들이대도 이견을 제시하는 사람이 많지 않은 분위기였다. 그런 블러가 "브릿팝은 죽었다"고 선언하다니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블러는 데이먼 알반(보컬), 알렉스 제임스(베이스), 그레이엄 콕슨(기타), 데이브 로운트리(드럼)로 구성된 4인조 밴드다. 이들의 시작은 알반과 콕슨이 10대 초반이었던 '꼬꼬마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불알 친구로 스스럼없이 지내던 사이였다.

알반은 상큼한 외모(20대 알반은 꽃미남으로 유명했다)를 내세워 연기자를 지망하던 학생이었다. 콕슨은 미대생이었다. 이들은 대학생으로 런던에서 재회한다. 알반은 본인이 연기에 재능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된 이후 밴드 활동으로 주 전공을 바꿨고, 우여곡절을 거쳐 제임스와 로운트리가 합류해 4인조 밴드가 된다. 블러가 완성체가 된 것은 198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밴드 이름은 시모어(Seymour)였는데, 1990년 밴드 이름은 지금의 블러로 확정된다.

1990년 첫 앨범 레저(Leisure)를 내놓는데, 당시 이들은 밴드라기 보다는 밴드 형태를 취한 아이돌로 취급받았다. 달달한 멜로디와 잘생긴 외모를 내세워 인기몰이를 했고, 쉬즈 소 하이(She's So High), 데얼스 노 아더 웨이(There's No Other Way) 등의 노래가 주목받기도 했다. 하지만 매니저에게 사기를 당하는 등 여러 우환도 겪었고, 완성된 밴드의 모습보다는 앞으로 가능성이 높은 역량을 보여주는 수준으로 만족해야 했던 시기였다.

두 번째 앨범부터 네 번째 앨범까지는 이들이 본격적인 스타덤에 올랐던 시기였다. 브릿팝 밴드로서 전성기를 누렸던 때라고 할 수 있다. 두 번째 앨범 '모던 라이프 이즈 러비시(Modern Life Is Rubbish)', 세 번째 앨범 '파크라이프(Parklife)', 네 번째 앨범 '더 그레이트 이스케이프(The Great Escape)'로 대표된다.

이들이 영국을 넘어 글로벌 밴드로 도약한 이유에는 외부적인 환경 변화도 있었다. 당시 너바나 펄잼 사운드가든 등 미국 시애틀을 위시한 얼터너티브 밴드는 어마어마한 인기를 끌었다. 음악 강국인 걸 강조하는 영국 입장에서는 대놓고 밀어줄 만한 자국 밴드가 필요했다. 그때 걸려든 게 블러였다. 블러 오아시스 스웨이드 등 몇몇의 밴드를 '브릿팝'이란 범주에 몰아넣고 '브릿팝의 공습' 등 자극적인 멘트를 내세워 홍보 효과를 노린 것이다. 사실 이들 밴드는 한 가지 범주로 묶기에는 음악 스타일이 그다지 같지 않았다. 밴드 형태였다는 것 외에 공통점이 많아 보이지 않았다. 몽환적인 음악과 함께 게이 이미지로 무대를 방방 뛰는 스웨이드와 단정한 멜로디에 치기어린 가사를 내세운 블러가 뭐가 그렇게 닮았다는 것인가. 여하튼 이렇게 억지로 연결 지은 '브릿팝'이라는 카테고리는 영국 밴드를 효과적으로 선전할 수 있는 좋은 수단이 됐다. 언론은 언제나 경쟁구도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는데, 시애틀 그런지와 일합을 벌이는 영국 브릿팝은 주목하기에 좋은 먹잇감이 됐다.

그 덕에 세 번째 앨범 파크라이프(Parklife)는 엄청난 흥행을 한다. 1994년 브릿어워드에서 4관왕을 차지한다. 이를 통해 블러는 단숨에 전 세계에서 가장 잘나가는 밴드 중 하나로 군림한다(지금에야 오아시스가 블러보다 훨씬 유명하지만 1990년 중반 당시는 호각세였다. 블러 팬이 더 많았다고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특히 오아시스와의 갈등은 호사가가 주목할 만한 좋은 이슈거리가 됐다. 히트 행진은 블러가 먼저 했다. 오아시스는 도전자였다. 당시 영국인은 오아시스를 새롭게 떠오르는 신예, 블러는 이미 자리를 잡은 정상급 밴드로 인식했다. 그리고 사람들은 항상 '뉴페이스'의 도전을 흥미진진하게 바라보는 편이다.

블러 입장에서는 새로 부상한 상대가 오아시스였던 점이 부담이었을 것이다. 형제끼리도 막말을 하며 싸우는 오아시스가 외부의 적(?)에 대해서는 얼마나 까칠하게 굴었을까. 다수의 인터뷰를 통해 블러를 폄하하는 발언을 했고, 언론을 이를 받아 '브릿팝 남북전쟁'이라 제목을 뽑으며 양 밴드 간 갈등을 조장했다. 그러다 오아시스가 1995년 명반 '모닝글로리((What's The Story) Morning Glory?)'를 대히트시키며 결국 블러에 판정승을 거두게 되고 블러는 자존심을 크게 상하게 된다. 사실 오아시스와 블러는 그다지 닮은 게 없는 밴드여서 언론이 둘을 도마에 올려놓고 비교할 만한 대상이 아니었는데, 결국 블러가 피해를 입은 셈이 됐다. 블러는 그냥 블러의 음악을 하면 되고, 오아시스와 비교해 앨범이 더 팔렸는지 그렇지 않은지에 대해 큰 관심을 쏟을 필요는 없었다. 받아도 되지 않을 상처를 받은 것이다.

1997년 그 유명한 '브릿팝은 죽었다'는 알반의 발언은 이 같은 맥락에서 나온 것이다. 그는 '브릿팝'이란 단어 자체를 증오했다. 상업주의가 만들어 낸 쓰레기 같은 발언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기존 음악 방식도 확 바꿔 버린다. 브릿팝이란 단어를 세계에 널리 알린 일등 공신이었던 밴드가 이제는 브릿팝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치는 묘한 상황이 펼쳐졌다.

1997년 다섯 번째 앨범 '블러(Blur)'는 이런 상황에서 나온다. 밴드가 자신의 이름을 앨범명에 박는 것은 큰 결심이 섰을 때나 가능한 일이다. 딱 한 번밖에 쓸 수 없는 카드이기 때문이다. 블러는 이 앨범에서 기존 음악 스타일을 상당 부분 버리고 스트레이트한 하드록 영향을 상당 부분 받은 새로운 음악을 선보인다. 블러 특유의 재기발랄한 느낌은 쫙 빠졌다. 대표적인 곡이 한국에서도 사랑받는 '송투(Song2)'다. 러닝타임이 2분이라서 이름을 이렇게 지었다고 한다. 블러 음악인 줄 모르고 들으면 미국 시애틀 그런지 출신 밴드 음악이라고 착각할 정도다.

더 큰 변화는 다음 앨범인 '13'에서 나타난다. 평지풍파를 겪으며 성숙해진, 약간은 우울해진 블러를 만날 수 있는 앨범이다. 여기에는 명곡 텐더(Tender)가 실려 있다. 가스펠 느낌이 나는 느긋한 연주에 진성과 가성을 오가는 알반의 보컬이 더해진다. 어쿠스틱 느낌이 물씬 나는 연주로 이들이 '브릿팝'이라는 굴레를 얼마나 벗어나고 싶었는지를 보여준다.

이때까지가 블러의 전성기였다. 이후 베스트 앨범을 내놓고 침잠했던 이들은 2004년 급기야 밴드를 잠정 해체한다. 2008년 재결합을 하고 글로벌 투어를 했지만 이후 눈에 띌 만한 역작을 내놓지는 못했다. 2015년 새 앨범을 내놨지만 이미 전성기가 지난 이후 느낌이 확연했다.

블러는 앨범을 내놓을 때마다 성격이 많이 달라진 밴드다. 재기발랄한 초기 블러를 원한다면 파크라이프(Parklife)에 실린 걸스&보이스(Girls & Boys)가 제격이다. 시원하게 달리는 송2(Song2)는 과도기다. 텐더(Tender)는 언제 들어도 좋은 명곡이다.

동시대 경쟁했던 오아시스에 비해 다소 저평가된 느낌이 있어 안타깝다. 브릿팝이라는 굴레가 이들에게 적잖은 심리적 타격을 줬을 것이다.

[홍장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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