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급구조체계 핵심 건드린 '911 오퍼레이터'의 묘미

최초입력 2017.10.11 06:02:00
최종수정 2017.10.10 17:49:50

[게임의 법칙-53] ◆긴급출동 오퍼레이팅 시뮬레이션, '911 오퍼레이터'

게임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사람들에게 '이 게이머는 무엇과 싸우고 있습니까'라는 질문을 던지면 어느 정도 공통된 범주 안에서 답변을 들을 수 있다. 대악마, 적군, 악당무리, 몬스터 같은 이름일 것이다. 플레이어의 도전 욕구를 불러일으키기 위해서는 적절한 난이도와 함께 감정이입이 손쉬운 대상으로 상대를 설정하는 것이 좋고, 이런 면에서 많은 게임이 도전의 대상으로 어느 정도 익숙한 상대역을 선택하곤 한다.

그런데 선악 이분법에 기초한 익숙한 대결 구도는 한편으로는 쉽고 재미있는 게임의 근본이면서 동시에 식상함의 근원이기도 하다. 단순한 이분법의 대결 구도만으로는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수용자들의 욕구를 채우기에 역부족인 경우가 많기에 최근에는 악역 하나에도 다채로운 설정과 배경을 동원해 나름의 정당성을 부여하는 경우가 많다.

게임의 경우 단지 악역이라는 범주를 넘어 아예 갈등 구도 자체를 다르게 설정해버리는 경우도 존재한다. 악당을 물리치는 용사, 정의 구현을 위해 달리는 영웅과 같은 대결 구도가 아니라 전혀 다른 면에서의 도전과 응전을 그리면서 색다름을 만들어가는 게임이 적지 않은데, 이번에 이야기할 '911 오퍼레이터'도 그러한 게임이다.



◆쏟아지는 사고, 부족한 인력과 장비, 애쓰는 오퍼레이터

911 오퍼레이터는 이름 그대로 미국의 긴급구조시스템인 911을 모티브로 한 시뮬레이션 게임이다. 플레이어는 911 시스템의 전화 오퍼레이터가 되어 긴급 전화를 받으며 각 상황에 맞춰 주어진 도시 안에 의료팀, 소방팀, 경찰팀을 적절하게 파견해 위기 상황을 해결해 나가야 한다. 초반 튜토리얼에서 간단했던 임무들은 게임을 진행할수록 점점 더 복잡하고 난감한 상황들로 발전해 나가며, 시나리오 모드에서는 실제 발생했던 여러 사건을 모티브로 한 재난 상황들을 해결해야 하는 입장에 놓인다.


▲ '911 오퍼레이터' 에 걸려오는 긴급전화는 대체로 실제로 있었던 일들로부터 모티브를 가져와 재구성한 사례들이다. 실감나는 성우 연기 덕분에 몰입감이 적지 않다.
주어진 구조 인력은 한정적인 데 반해 상황은 갈수록 늘어나기 때문에 미처 다 대응하기 어려운 난감한 상황이 끝없이 펼쳐진다. 3개의 의료팀이 모두 파견 나간 사이에 새로 들어온 긴급전화가 의료팀을 필요로 하고, 모자란 인력 때문에 결국 환자가 사망하는 사건들을 겪노라면 실제 구조 현장의 오퍼레이터가 겪을 갑갑함에 함께 가슴을 치는 상황을 지속적으로 경험하게 된다.

지진, 대규모 인질극 같은 초대형 사고라도 터지면 사실상 구조 체계가 마비되는 대공황을 맞이하기도 한다. 걸려오는 전화를 받는 와중에도 계속 터지는 사고 속에서 플레이어에게 떠오르는 생각은 섬뜩할 정도로 현실적이다. "아, 인력과 장비 지원이 조금만 더 있었더라면…"이라는 생각은 비단 플레이어에게만 존재하는 생각이 아니라, 바로 현실에서 응급구조체계가 늘 직면하는 문제에 대한 안타까움 그 자체다.

게임은 응급구조체계가 처한 가장 큰 어려움은 실제 사건 사고의 발생 빈도에 비해 턱없이 모자라는 구조자원임을 정확히 짚으며, 이를 현실에서 있을 법한 상황논리를 게임 안에 재현함으로써 플레이어에게 게임의 논리를 통해 전달한다. 그리고 그 부족한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두 가지 수단을 플레이어에게 제공하는데, 하나는 자원의 확보이고 다른 하나는 보유 자원의 효율화다.

매 게임마다 일정 주기를 넘기면 플레이어의 구조 활동에 대한 평가가 이루어지며, 평가를 통해 얻은 자원으로 다음 주기에 사용할 추가 인력과 장비를 구매할 수 있다. 이를 통해 좀 더 복잡해지는 도시 안의 사건 사고에 대응할 수 있는 여력을 확보해 다음 미션에 도전하게 되는데, 물론 다음 미션 또한 늘어나는 자원에 맞춰 더욱 복잡해지기 때문에 사실상 극복보다는 순환에 가까운 형태로 돌아오곤 한다. 따라서 플레이어가 집중해야 하는 지점은 보유한 자원의 효율적 사용으로 잡힌다.

플레이어는 그래서 최대한 출동이 용이한 위치에 각 팀을 대기시키며, 들어오는 긴급전화를 받을 때도 어떤 상황인지, 어떤 팀이 필요한지를 빠르게 확인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게 된다. 게임이 이 상황을 위해 제시하는 사례는 실제 911 기록에서 가져온 것들을 중심으로 구성돼 있는데, 당황스러울 정도의 사례도 많아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예를 들어 배가 아프다고 전화가 왔을 때 긴급이라고 바로 의료팀을 보내면 낭패를 보는 사례가 있는데, 언제부터 아팠냐고 한 번 더 확인해 보면 두 달 전부터 아팠다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장난전화도 오고, 아이들이 전화해 수학 문제 답을 물어보기도 해 긴급과 긴급이 아닌 경우를 빠르게 구별할 수 있는 기술을 요구한다. 문제는 이 상황을 단순하게만 파악했다가는 함정에 빠질 수 있다는 점이다. 실제 911 전화 사례 중 유명한 '피자 주문' 전화가 게임 안에 들어 있다는 점이 대표적이다. 911에 전화해서 피자를 시키는 사람을 단순 장난전화로 취급하지 않고 '지금 혹시 긴급상황인가요?'를 확인해 위기를 넘긴 사례가 게임 안에 들어 있어 효율화를 추구하는 플레이어들을 긴장시키고 있는 것이 911 오퍼레이터의 게임 구조다.



◆응급구조 시스템 안에서 문제를 바라보는 방식

예전에 인기를 끌었던 TV 외화 시리즈 중에 '긴급구조 911'이라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실제 미국 911 시스템에서 발생했던 사건 사고를 드라마로 재구성한 이 시리즈는 독특한 사건 사고와 이를 신속하게 해결하는 911 시스템의 활약을 다루며 한국에서도 상당한 인기를 끈 바 있다. 현대사회를 살아가며 맞닥뜨리는 수많은 위협으로부터 자신을 지켜주는 응급구조 시스템에 대한 신뢰와 애정을 사회 전반에 전파하며 호응을 얻었던 이 TV 시리즈와는 다른 각도에서 911 오퍼레이터는 긴급구조 시스템의 의미를 다룬다.

훌륭하고 영웅적인 구조작업을 다룬 텔레비전 시리즈와 달리, 게임은 시스템 자체를 다루는 매체 특성을 활용해 긴급구조 시스템이 가진 어려움을 수용자들에게 전달하고자 한다. 동시다발로 터져나오는 사고에 대응하기 위해 부족한 인력을 추스르고, 쏟아지는 구조 전화 속에서도 긴급 유무와 진위 여부를 체크하면서 최대한 모두를 도울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해야 하는 절실함을 상황의 게임적 재연을 통해 플레이어에게 체감시킨다. TV 시리즈가 다루지 않은 시스템적 측면을 911 오퍼레이터는 적절한 실제 사례를 바탕으로 한 난이도 구성으로 파고들었고, 플레이어에게 실제 오퍼레이터의 그것까지는 아닐지라도 적어도 현재의 구조 시스템이 가진 이슈가 무엇인지를 함께 고민하게 만든 것이다.

한국에서는 얼마 전 소방관 처우 개선에 대한 법률에 관해 이런저런 말이 많았던 적이 있었다. 열악한 소방관 근무환경의 개선에는 모두 동의하면서도 선뜻 예산 증액이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은 나름 현실적 판단으로부터 나온 것이라 생각해 보려 해도 여러 모로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911 오퍼레이터는 이 문제에 대해 상당히 강렬한 메시지를 품은 게임이다. 직접적으로 메시지를 전달하지 않더라도, 게임 속 환경에 재구성된 사회구조를 통해 이슈를 바라보는 프레임을 제시하고 이를 통해 플레이어에게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식으로 911 오퍼레이터는 상당히 성공적인 결과를 이끌어냈고, 만약 한국에서도 유사한 방식의 게임이 나온다면 소방예산 증액이라는 이슈 파이팅의 측면에서도 적지 않은 발화 방식이 되지 않을까.

[이경혁 게임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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