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변방 국가들을 보면 '기적의 한국'이 떠오르네

최초입력 2017.10.12 06:02:00
최종수정 2017.10.11 18:33:08

/삽화=양만금 화백
▲ /삽화=양만금 화백
[전광우·손현덕 통쾌한 경제-39] 얼마 전 매일경제신문사 후배인 김병호 기자가 카자흐스탄 연수를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제가 편집국장으로 있을 때 연수 결정이 이뤄졌는데 연수자 선발 때부터 우여곡절이 있었습니다. 나는 그가 러시아 모스크바 특파원을 지냈고 중앙아시아나 동유럽 지역 전문기자로 훌륭하게 성장할 것 같다는 기대감으로 그의 연수를 적극 지원했는데 지금 와서 보면 참 잘한 결정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에겐 이번 연수가 좋은 경험이 됐으리라 믿습니다.

그는 연수를 마치고 내게 책 한 권을 선물했는데 그게 연수의 결과물이었습니다. 요즘 보기 드물게 두꺼운 책이었습니다. 542페이지에 달하니 큰맘 먹고 시간을 내 읽어야 할 분량입니다. 책 제목은 '유럽 변방으로 가는 길'입니다. 마침 이번 추석 연휴가 길어 집에서 쉬는 동안 그 책을 다 읽었는데 페이지를 넘기면 넘길수록 책에 빠져들었습니다.

나름 세계 역사나 지역 정치에 대해 어느 정도 안다고 생각했었는데 이 책을 읽고 나서 그동안 내가 이 지역에 대해 얼마나 무지한지를 새삼 깨닫게 됐습니다. 그동안 내가 알았던 지식은 유럽을 둘러싼 얄팍한 전쟁사나 외신 보도로 접하는 러시아 인근 국가들의 소식, 그리고 여행에서 얻게 된 단편적인 정보였습니다.

김병호 기자는 유럽 변두리에 있는 25개국을 직접 돌아다니며 지역 이슈와 현지인들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중앙아시아·동유럽·발칸반도 주변에 위치한 우리가 잘 모르는 나라들의 사정과 그들이 안고 있는 고민을 유익하고 흥미롭게 풀어냈습니다. 단순한 여행 후기가 아닙니다.

저로서는 이 책을 읽고 나서 캅카스(영어론 코카서스) 지역에 아제르바이잔과 아르메니아, 조지아 3개국이 있는데 왜 아제르바이잔과 아르메니아가 그리 으르렁거리며 싸우고 있는지, 나고르노-카라바흐라는 분쟁지역은 어떻게 탄생했는지를 처음 알게 됐습니다.

또 러시아와 가까운 루마니아는 러시아의 반대편에, 러시아와 멀리 위치한 불가리아는 러시아 편에 서게 되는지도 명확하게 알게 됐고, 최근 크림반도 사태로 세계사의 메인메뉴로 등장한 우크라이나의 전략적 가치에 대해서도 확실히 이해를 했습니다. 조금은 창피한 고백입니다만, 리투아니아 밑에 있는 아주 작은 칼리닌그라드가 러시아의 한 주이며 이 발트해에 면한 지역이 러시아에 중요한 군사적 요충지라는 사실도 알게 됐습니다.

어찌하다 보니 칼럼이 책 소개로 흘렀습니다만 제가 말하고 싶은 건 다른 데 있습니다. 책을 쓰고 나서 저자인 김병호 기자는 국가안보의 중요성을 강조했습니다. 어떤 나라는 유럽에 줄을 대고, 또 어떤 나라는 러시아에 줄을 댑니다. 그런가 하면 애매모호한 전략으로 어느 편에도 서지 않는 나라도 있습니다. 그러나 공통적인 것은 국가안보가 확실하게 담보되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게 김병호 기자가 둘러본 유럽 변방 국가들의 애환이고 운명입니다.

그런데 저는 이 책을 다 읽고 드는 첫 번째 생각이 '대한민국이 참 대단한 나라구나'라는 거였습니다. 우리는 지금 '이것도 나라냐'고 푸념을 늘어놓고, 나라를 나라답게 만들자고 국민이 힘을 모으고 있지만 김병호 기자가 둘러본 나라들은 한결같이 우리 기준으로 치면 나라도 아니었습니다.

몰도바에서는 3년 전 은행 세 곳에서 10억달러의 돈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는데 지금까지도 경위 파악이 안 되고 있습니다. 국내총생산(GDP)의 10%나 되는 돈입니다. 국민은 정권 퇴진 시위를 벌였고, 이후 총리가 여섯 명이나 교체됐지요.

불가리아는 세계가 인정하는 레슬링 최강국입니다. 이 나라 경제는 덩치 큰 레슬러들이 장악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돈 많은 사업가의 보디가드를 하면서 폭력을 행사해 민영화된 공장을 빼앗기도 합니다. 조폭형 기업 문화와 막가파식 부패 사슬로 얼룩진 나라입니다.

이렇듯 대부분 국가에서 정치인이나 관료의 부패는 극에 달합니다. 국가의 수도라는 곳도 지저분하고 곳곳에 도둑과 강도가 활개를 치고, 여행객에게 바가지를 씌우지 않는 상인이나 택시 운전사가 드물었습니다. 한국을 찾는 외국인이 한국인에게 소매치기 당했다는 뉴스는 거의 접하기 힘듭니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안 당하면 오히려 그게 뉴스입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장기집권을 비판하지만 카자흐스탄이나 우즈베키스탄에 비하면 견줄 바도 아닙니다. 또 터키는 어떤가요.

스탄으로 끝나는 나라 중에 키르기스스탄이란 곳이 있습니다. 카자흐스탄 바로 밑에, 그리고 중국 서쪽에 붙은 나라입니다. 다른 중앙아시아 국가들과는 달리 두 번의 시민혁명을 통해 부패한 독재정권을 교체한 경험이 있는 나라입니다. 이 나라가 카자흐스탄이나 우즈베키스탄보다 나을까요? 부패는 사라졌을까요? 국세청장 스스로가 실토하듯 지하경제가 GDP의 60%가 되는 나라입니다.

김병호 기자가 이곳에서 만난 현지인들은 대부분 한국을 동경합니다. 우리는 안에서 서로를 욕하고 헐뜯고 국가경제가 망할 것처럼 말하는데 외국에서는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현지에서 사진을 찍어준 한 안내원의 얘기가 뭉클하게 다가왔습니다.

"나는 이 일을 그만두고 한국에 가서 자동차 정비를 하고 싶습니다. 작년에 제 친구가 한국 공장에 가서 취업했는데 한 달에 3000달러를 받는다고 합니다. 여기선 1년 꼬박 일해도 벌지 못하는 돈입니다. 한국에 꼭 가고 싶습니다."

'강대국의 흥망'을 쓴 유명한 역사학자인 폴 케네디 예일대 교수가 매일경제신문이 주최하는 세계지식포럼에 온 적이 있습니다. 특별강연을 하기로 했는데 장대환 매경미디어그룹 회장은 미리 "한국 역사에 대해 공부 좀 하고 오시라"고 주문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한국에 와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너희 나라는 참 이상하다. 벌써 지도상에서 없어져야 할 나라인데 아직도 존속한다는 게. 중국, 일본, 러시아 틈바구니에서 5000년을 망하지 않고 이렇게 성장했다는 건 세계사의 기적"이라고.

부정의 에너지를 긍정으로 바꾸면, 분열의 에너지를 융합의 에너지로 바꾸면 대한민국은 정말 기적을 일으킬 수 있는 나라가 아닐까요?

[손현덕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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