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전 박봉환 장관이 던진 질문

최초입력 2018.02.05 06:02:00
최종수정 2018.02.05 08:50:33

박봉환(朴鳳煥) 전 동력자원부 장관
▲ 박봉환(朴鳳煥) 전 동력자원부 장관


[전광우·손현덕 통쾌한 경제-59] 기자 초년병 시절, 자주 찾아뵙던 분이 있었습니다. 출입처의 기관장이었지만, 그를 만나 나누는 대화는 소위 '기사 거리'을 구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먼 정도가 아니라 아예 상관이 없었습니다. 그 때 그 분은 본인이 정말 심혈을 기울여 쓴 두툼한 책 두 권을 선물했습니다. 요새 나오는 책과는 달라도 많이 다릅니다. 글씨도 작고 얼핏 보면 한자가 절반은 차지할 정도로 빽빽합니다. 한글 세대들은 참 읽기 어려운 책이지요.

내 나름대로 책을 평가하는 기준이 하나 있는데 그게 서문입니다. 그건 소설가 장정일씨가 <위대한 서문>에서 말한 대로, 서문은 읽고 있는 책을 해설해주는 최고의 참고서이며 저자의 욕망이 고스란히 투영된 글입니다. 한번 읽고 말 것이 아니라 곁에 두고 매번 펼쳐 보아야 하는 것. 그래서 나는 서문이 긴 책을 좋아합니다. 이 책은 서문이 참 깁니다. 얼마나 기냐고요? 55페이지입니다. 서문 뒤에는 서장(序章)이라고 또 있는데 이것 역시 22페이지나 됩니다. 합치면 77페이지입니다. 상 하권을 합치면 대략 1000페이지 정도 되는 책인지라 다 읽는데 꽤나 오랜 시간을 투자한 기억이 납니다. 그러고도 중요한 대목을 몇 차례나 다시 들춰본 책입니다.

현대자본주의 : 그 고뇌와 활로(상) (박봉환 저)
▲ 현대자본주의 : 그 고뇌와 활로(상) (박봉환 저)


이 책의 제목은 <현대자본주의>. 저자는 박봉환씨입니다. 나는 보험출입기자 시절, 그가 손해보험협회장으로 있을 때 만났습니다. 1933년에 태어나 2000년에 세상을 떠나셨으니 요즘으로 치면 단명인 셈입니다. 1957년 서울대 정치학과를 졸업한 뒤 고시 행정과에 합격해 김포세관장을 거쳐, 재무부 이재국장, 청와대 중화학공업 기획단 부단장 등을 지냈습니다. 동력자원부 장관을 하다가 공직에서 물러나 증권감독원장, 손해보험협회 회장을 역임했으니, 나는 그를 인생의 끝 무렵 쯤 알게 된 셈입니다. 사실 그가 현역 시절 맡았던 직책은 어찌 보면 그리 화려하지는 않습니다. 그를 오히려 유명하게 만든 건 전두환 前 대통령의 경제 가정교사였다는 점일 겁니다. 당시 전 前대통령에게 경제 문제를 조언한 두 분이 계신데 한 분은 아웅산에서 운명을 달리 한 김재익 경제수석이고 다른 한 분이 박봉환씨입니다.

그 당시 나는 박봉환씨에 대한 선입견이 있었습니다. 바로 전두환 정권 시절의 참모였다는 점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를 만나 대화를 나누고, 그의 <현대자본주의>란 책을 읽으면서 그에게 완전히 반해버렸습니다. 그래서 종로에 있는 그의 사무실을 시간이 날 때마다 찾아가 소중한 말씀을 귀동냥했고 책 내용에 대한 토론도 나눈 기억이 생생합니다. 단언컨대 나는 관료 출신이 쓴 책 중, 아니 어떤 고명한 학자조차도 이렇게 철학적 사색과 고뇌에 찬 성찰이 깊숙이 뿌리내린 저서를 쓴 걸 아직까지 본 적이 없습니다. 이 책이 출판된 게 1988년입니다. 최근 헌법 개정을 둘러싸고 자유주의와 자본주의에 대한 논란이 이는 걸 지켜보면서 나는 다시 오래된 이 책을 꺼내보았습니다. 그 책 얘기를 짧게 하려고 합니다.

서문은 그 책의 나침반입니다. 책을 쓴 동기가 나오지요.

"우리가 몸담고 있는 자본주의는 인간으로부터 가난의 굴레를 벗겨줘 우리 인류의 생활향상과 번영에 크게 기여하였으며 마르크스까지도 자본주의는 100년도 못되는 기간 동안에 과거의 모든 세대를 합친 것보다도 더 많은 대량의 거대한 생산력을 만들었다고 절찬하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이렇게 욕을 먹고 공격을 받고 있는가를 규명해보고 싶었다"

또 하나의 문제제기.

"시장의 결함을 극복하기 위해 정부의 개입이 이루어졌으나, 이러한 정부의 개입이 이번에는 더 큰 결함을 안고 있어 새로운 문제가 되고 있다. 이 양쪽의 결함을 다 같이 극복하고 경제의 발전과 함께 경제적 정의를 실현할 수 있는 제3의 길은 없을까?"

그는 효율과 공평의 가치에서 방황했습니다.

"효율만 치중하고 공평을 소홀히 하면 배분적 정의의 원칙을 그르치고, 그렇다고 공평만 지나치게 강조하다 보면 성장이 안된다. 그래서 자본주의는 불균형의 경제가 되고 사회주의는 부족의 경제가 된다. 이 문제는 궁극적으로 인생관 내지 철학의 문제로 귀결될 것이다."

이런 고민에서 그는 사회주의가 근대화의 모델이 될 수 없다는 논거와 사회주의의 장래에 대한 통찰을 던지는 한편, 현대자본주의의 기본적 딜레마와 민주주의정부 의 국가 경영능력에 대한 고찰에 들어갑니다.

가끔 유명 인사의 어록을 발췌해 일종의 제사(題詞)처럼 올려놓곤 하는데 박봉환씨는 서장 첫머리에 르네상스란 용어를 학술적으로 정립한 스위스의 유명한 문화사가인 야곱 부르크하르트의 편지에서 한 대목을 인용했습니다.

"위로부터의 탐욕적인 자본주의(대기업)와 아래로부터의 가공할 욕구가 서로 충돌한다. 이들 둘은 마치 같은 궤도 위를 서로 마주보고 달리는 급행열차와 같이 언젠가는 충돌하고 말 것이다."

3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도 박봉환씨가 던지는 질문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그가 스스로 던진 질문들에 대한 답을 어떻게 찾았는지, 한번 이 책을 읽어보시길 강력히 권장합니다.

[손현덕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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