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신료 왕국' 태국에서 깨달은 맛의 신세계

최초입력 2018.02.13 15:04:00
최종수정 2018.02.14 09:10:15

다양한 향신료
▲ 다양한 향신료
[푸드 트래블-13] 향신료에 매력을 느끼기 시작한 건 직접 빵을 만들면서부터다. 국내외 서적 가릴 것 없이 다양한 베이킹 북을 독파하며 빵 만들기에 한창 빠져 있을 때였는데, 외국의 베이킹 레시피를 볼 때면 낯선 향신료가 자주 등장해 날 난감하게 했다. 그중 나의 궁금증을 자극한 건 '캐러웨이 시드(seed)'였다. 로프(loaf)라고 불리는 형태의 커다란 호밀빵에 들어가는 재료였는데, 레시피에선 캐러웨이 씨를 '꼭, 꼭!' 넣어야 한다고 두 번이나 강조하고 있어서 왠지 이게 없으면 빵이 완성될 것 같지 않았다. 궁금한 마음에 당시에는 우리나라에 흔하지 않은 캐러웨이 씨를 어렵게 구해 호밀 반죽에 넣어서 구웠는데 세상에, 그렇게 상쾌한 맛이 날 줄이야!

캐러웨이를 시작으로 넛메그, 아니스, 클로브, 카다멈 등 다양한 향신료와 레몬그라스, 바질, 고수 등 허브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나라마다 자주 사용되는 향신료나 허브가 달랐고, 낯선 재료들을 하나씩 맛볼 때마다 새로운 맛의 세계가 열렸다. 재료의 맛을 알고 나면 외국 요리에 접근하는 게 훨씬 쉬워진다. 무슨 맛인지 알 수 없다고 느꼈던 '정체불명의 맛'의 정체를 알게 되는 것이다.

태국의 풍경
▲ 태국의 풍경
방콕의 거리 풍경
▲ 방콕의 거리 풍경


다양한 향신료의 맛을 즐기게 될 즈음에 이런 재료들을 활용한 요리를 배워보고 싶었다. 향신료로 가득한 요리를 배울 수 있는 가장 가까운 나라는 태국이었다. 세계 5대 음식 중 하나로 꼽히는 타이 음식은 그 독특한 향과 맛으로 국경을 초월해 전 세계인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난 겨울 찬바람이 쌩쌩 부는 서울을 벗어나 따뜻한 도시 방콕으로 향하는 비행기 티켓을 예매했고, 방콕에서 요리를 배울 만한 쿠킹 스쿨을 검색하기 시작했다.

태국에는 크고 작은 쿠킹 스쿨들이 있다. 전문적인 요리사를 양성하기 위한 스쿨은 물론이고 관광객들을 위한 일일 클래스를 진행하는 곳들도 많다. 수업 기간도 하루 코스에서부터 일주일 코스, 한 달 코스까지 다양하고 요리 수업이 시연으로만 진행되는 곳, 실습을 겸하는 곳, 시장에서 재료를 구입하는 과정부터 함께 하는 곳 등 다양하다. 그중 내가 고른 곳은 '블루 엘리펀트'다. 1984년에 문을 연 이곳은 세계 75대 레스토랑으로 선정될 만큼 유명한 곳으로 세계 각지에 지점을 두고 있다. 블루 엘리펀트가 태국 요리를 대표하는 곳 중 하나이기도 하고 이곳의 쿠킹 스쿨을 거쳐 간 요리하는 지인들도 많은 터라 난 망설임 없이 선택했다. 여행 일정에 맞춰 수업을 신청한 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방콕으로 향했다.

방콕 수완나품 공항에 도착하자 습기를 가득 머금은 후끈한 바람이 밀려 들어왔다. 방콕에서의 일정은 태국을 대표하는 커피 중 하나인 '도이창' 커피를 마시면서 시작했다. 사람들이 '태국에선 기-승-전-마사지'라고 부르며 좋아하는 타이 마사지도 만족스러웠고 길거리 노점에서 만난, 우리 돈 천 원도 안 되는 저렴한 가격의 맛있는 팟타이도 날 즐겁게 했다. 하지만 이번 여행의 하이라이트는 쿠킹 스쿨! 그곳에서 어떤 요리와 어떤 사람들을 만나게 될지가 가장 기다려졌다.

블루 엘리펀트 외관
▲ 블루 엘리펀트 외관


수업이 있던 날 아침, 방콕의 지하철인 BTS를 타고 블루 엘리펀트가 있는 수라삭 역에 도착했다. 노란색 외벽을 지닌 블루 엘리펀트는 멀리서도 한눈에 들어왔다. 이 건물은 1903년에 지어진 오래된 건물로 당시에는 봄베이 백화점으로 사용됐었고, 이후 역사적 흐름에 따라 중국인, 태국인, 일본인 등 여러 차례 주인이 바뀌다가 태국 상공회의소 본부로 사용되기도 한 유서 깊은 건물이다.

블루 엘리펀트의 요리 실습 공간
▲ 블루 엘리펀트의 요리 실습 공간
블루 엘리펀트의 베스트 레스토랑 상장들
▲ 블루 엘리펀트의 베스트 레스토랑 상장들


설레는 마음으로 문을 열고 들어섰다. 내부는 생각했던 것보다 규모가 더 컸고 벽에는 이곳을 방문한 많은 연예인과 정계 인사들의 사진, 베스트 레스토랑으로 선정된 상장들이 걸려 있었다. 조금 기다리니 함께 수업을 들을 학생들이 속속 도착했다. 모두 열다섯 명이었는데 나와 일행, 중국계 캐나다인 부부와 한국인 모녀, 그리고 나머지 아홉 명은 모두 프랑스인이었다. '역시 프랑스는 미식의 나라구나!' 싶었다. 타국의 요리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다니!

방콕의 재래 시장 투어
▲ 방콕의 재래 시장 투어
방콕의 재래 시장 투어
▲ 방콕의 재래 시장 투어


우리는 요리를 가르쳐 줄 셰프와 인사를 나누고 함께 재래시장 투어를 시작했다. 재래시장의 풍경은 다른 나라들과 비슷했지만 시장 냄새는 조금 달랐다. 약간 맵고 시큼한, 그러면서도 톡 쏘는 냄새랄까. 셰프는 우리가 재료를 만져보고 냄새를 맡아볼 수 있게 하나하나 소개했다. 고량강(galangal), 레몬그라스, 카피르 라임 잎, 코코넛, 타마린드 등 책에서만 보던 재료들이 눈앞에 펼쳐졌다. 난 발효 냄새에 익숙한 터라 피시 소스 같은 생선을 발효시킨 소스에도 큰 거부감이 없었는데 (우리나라의 액젓과 비슷하니까.) 프랑스 사람들은 발효시킨 소스들의 냄새에 놀라 얼굴을 찌푸리기도 했다. 하긴, 발효의 냄새엔 적응이 필요한 법이지. 우린 셰프가 사 준 연유가 들어간 봉지 밀크티를 하나씩 들고 방콕 재래시장의 구석구석을 다녔다.

요리 실습을 위해 준비된 재료들
▲ 요리 실습을 위해 준비된 재료들
시장 투어를 마치고 돌아와서 본격적인 요리가 시작됐다. 함께 사 온 재료들로 네 가지 요리를 직접 만들어 보는 수업이다. 발음조차 어려운 네 가지 요리가 오늘의 메뉴다. 새우와 '윙드빈'이라고 불리는 날개 달린 콩처럼 생긴 채소를 넣은 샐러드(Yam Tua Plu Koong), 고추에 스위트 바질을 버무려 완성한 생선(Pla Rad Prik Kee Nhu Bai Horapha), 레드 커리 페이스트를 직접 만들어 넣고 끓인 코코넛 밀크의 레드 커리(Keang Phed Kai Nor Mai Sod), 다양한 허브와 라임즙을 듬뿍 넣어 끓인 고기 수프(Soup Nua Samoon Prai)다. 낯선 이름과 달리 만들기는 어렵지 않았고 맛도 아주 좋았다. 외국인을 대상으로 하는 쿠킹클래스이다 보니 요리가 전반적으로 누구나 거부감 없이 먹을 수 있는 것들이었고, 요리를 잘하지 못하는 사람도 충분히 따라올 수 있도록 셰프가 잘 이끌어 주었다. 점심은 자신이 직접 만든 요리로 식사를 하는 것이었는데 모두들 자신이 만든 요리에 만족하는 모습이었다.

요리 실습이 끝난 뒤 학생들이 직접 만든 음식들로 차려진 식탁
▲ 요리 실습이 끝난 뒤 학생들이 직접 만든 음식들로 차려진 식탁


방콕의 쿠킹스쿨을 경험한 나는 서울로 온 뒤 의욕 충만해져서 태국 요리 만들기에 잠깐 빠져 있었다. 팟타이나 똠양꿍은 시시하다며 직접 다양한 커리 페이스트를 만들기도 했다. 지금은 어떠냐고? 글쎄. 블루 엘리펀트에서 배웠던 레시피가 어디 갔더라. 그때 받은 쿠킹 스쿨 수료증만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을 뿐이다.

[정영선 요리연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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