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디오헤드는 왜 '크립'을 부정했을까

최초입력 2018.04.06 06:01:00
최종수정 2018.04.06 11:13:17

프리미엄 첨부 이미지


[스쿨 오브 락-52] 흔히 '소년 출세'를 인생의 3대 악재라고 한다. 젊은 나이에 출세하는 게 왜 안 좋은 일일까. 아마도 어린 나이에 세상의 주목을 받으면 교만해지기도 쉽고, 인생살이가 지금처럼 잘 풀릴 거란 눈높이가 너무 높아져서일 것이다. 많은 뮤지션이 소위 '소퍼모어 징크스(sophomore jinx)'에 빠지는 것도 같은 이치일 것이다. 첫 앨범 성공 이후 두 번째 앨범을 히트시키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니다. 첫 앨범의 성공 공식을 그대로 답습했다가는 진부함을 벗어 던지기 힘들다. 첫 앨범의 성공에 도취되어 "이제는 내가 하고 싶은 음악을 하겠다"고 파격을 들고 나오면 대중이 외면한다. 익숙하지만 새로운 것, 양립할 수 없는 이 공식을 최적의 비율로 대중 눈높이에 충족해야만 계속 승승장구할 수 있다. 흔히 '원 히트 원더(one-hit wonder )'라고 불리는 한 곡만 큰 흥행을 거둔 뮤지션이 무수히 떴다가 지는 것은 이 같은 이유에서다.



이런 각도에서 '라디오헤드(Radiohead)'가 보여준 발자취는 적잖은 시사점이 있다. 영국 출신의 라디오헤드는 단단한 팬층을 보유하고 있는 히트 밴드 뮤즈(Muse), 콜드 플레이(Cold Play) 등이 한때 라디오헤드의 아류라고 불렸을 만큼 록계에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하는 거장 밴드다. 1990년대 초 데뷔해 기존 음악 문법을 무너뜨리고 다시 쌓는 식으로 평단의 지지와 대중의 사랑을 고루 누린 흔치 않는 밴드다. 그러면서 라디오헤드를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억울하게(?) '원 히트 원더'로 오해받는 존재이기도 하다(이는 라디오헤드의 음악성이 좋지 않거나 이들의 후속 앨범이 흥행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다. 그들의 첫 앨범에 실린 한 곡이 한국을 포함한 전 세계에서 워낙 압도적으로 유명해졌기 때문일 것이다).



라디오헤드는 영국 옥스퍼드셔주에서 1985년 톰 요크, 조니 그린우드, 에드 오브라이언, 콜린 그린우드, 필 셀웨이 등 5명으로 결성됐다. 결성 당시 밴드 이름은 '온 어 프라이데이(On a Friday)'였다고 한다. 이들은 스쿨밴드 형태로 모임을 했는데, 주로 모이던 날이 금요일이었기 때문이었다(이런식으로 생활 속에서 밴드이름이나 회사 이름을 짓는 경우가 종종 있다. 게임 '애니팡' 시리즈로 유명한 '선데이토즈'는 창업 멤버들이 일요일에 '토즈' 카페에 모여 사업 얘기를 나눴기 때문에 회사 이름을 이렇게 지었다고 한다). '온 어 프라이데이'가 라디오헤드로 바뀌게 된 것은 밴드를 결성한 이후 한참이 지난 후였다. 한참 인디 신에서 활동하던 온 어 프라이데이는 나름의 인기를 인정받아 음반사 EMI와 정식 계약을 하게 되는데, 음반사 요구에 따라 토킹 헤즈(Talking Heads)의 음반 트루 스토리즈(True Stories)에서 따온 라디오헤드로 밴드 간판을 바꿔 달게 되었다고 한다.



라디오헤드가 메이저 데뷔 첫 앨범을 세상에 내놓은 것은 밴드가 처음 태동한 지 무려 8년이 지난 1993년이었다. 음반 제목은 '파블로 허니(Pablo Honey)'였다. 여기에 라디오헤드의 대표곡이라고 할 수 있는 '크립(Creep)'이 실려 있다. '크립'은 1992년 말 싱글커트되어 먼저 출시됐는데, 이 당시만 하더라도 전혀 인기를 끌지 못했다. 1990년대는 누가 뭐라 해도 그런지가 록 음악계를 지배하던 시기였다. 라디오헤드의 첫 앨범은 그런지로 분류될 만한 여러 요소를 많이 갖추고 있었다. '크립' 역시 너바나(Nirvana)가 불렀다고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형태의 곡이었다. 시중에서 라디오헤드를 일컬어 '가벼운 너바나'라고 부르는 말이 회자될 정도였다. 쉽게 말해 그런지 열풍에 편승한 그저 그런 밴드 취급을 받았다는 얘기다. 록음악의 본류라고 자부하는 영국 평단가가 '그런지 짝퉁'으로 분류되는 라디오헤드를 칭찬하기란 아예 불가능한 구조였다. 이 앨범에 실린 곡 중에 '애니원 캔 플레이 기타(Anyone Can Play Guitar)'라는 곡도 있었는데 이 역시 펑크록으로부터 '연주와 노래를 하는데 프로페셔널하지 않아도 된다'는 철학을 계승한 그런지 바탕의 일부를 공유하는 내용으로 비치기도 했다.



이 앨범이 실패했으면 아마 지금 우리가 상상하는 라디오헤드는 없었을 가능성이 높다. 아마 밴드는 해체되었거나 아니면 상당 기간 방황을 거듭했을 공산이 크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곡이 미국을 강타하는 이변이 벌어진다. 그 중간다리에 생뚱맞은 이스라엘이 있었다. 1993년 초반 라디오헤드는 영국을 제외한 다른 나라에서 활동을 시작했다. 그런데 이스라엘에서 슬슬 반응이 오기 시작했다. 결국 영국을 벗어나 처음으로 콘서트를 연 국가가 이스라엘이 되었다.



이후 거의 시차를 두지 않고 미국 서부 캘리포니아 라디오에서 '크립'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너바나 펄잼 사운드가든을 위시한 그런지가 한창 전성기를 달릴 무렵, 영국에서 날아온 중고 신인 밴드 음악이 그런지 문법을 잘 계승했다는 것은 미국 팬 사이에서도 먹힐 만한 스토리였다. 지금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것처럼 '크립'은 멜로디를 따라 부르기 쉬운 '웰메이드' 그런지라고 할 만하다. 후렴부 특유의 고음으로 호소력 있게 내뱉은 톰 요크의 보컬도 꽤 매력이 있었다. 결국 크립은 미국 빌보드 모던 록 차트 2위를 차지하는 쾌거를 거둔다. 이 인기는 이듬해 영국으로 역수입돼 영국 차트 7위를 차지하게 만드는 원동력이 된다. 자국에서 주목받지 못했던 영국 밴드가 이스라엘을 거쳐 미국에서 주목받고 여세를 몰아 본국에서도 인기몰이를 한 것이다.

<크립(Creep)>

When you were here before(니가 처음 여기 왔을 때)

couldn't look you in the eye(난 널 제대로 쳐다볼 수도 없었어)

You're just like an angel(넌 정말이지 천사 같은 존재야)

your skin makes me cry(널 보면 정말 울 것 같아)



you float like a feather in a beautiful world(넌 그렇게 아름다운 세상 속에서 깃털처럼 떠다니는데)

I wish I was special(나도 좀 특별했으면 좋겠어)

you're so fucking special(넌 정말이지 죽여주게 특별한데)

but I'm a creep(난 너무 등신 같지)

I'm a wierdo(난 미친놈이야)

what the hell am I doing here(젠장 난 여기서 도대체 뭘 하고 거야)

I don't belong here(난 여기 속하지도 않는 몸인데)



후략



가사의 일부만 들어도 알 수 있지만 전형적인 찌질한 젊은 남성의 독백이다. 특유의 자기비하적인 우울한 가사와 디스토션이 걸린 기타리프는 미국의 그런지 느낌이 물씬 난다. 그러나 어쨌든 이 곡으로 라디오헤드는 성공적인 데뷔를 마쳤다. 그런데 한가지 문제가 생겼다. 라디오헤드가 이 곡을 안 좋아하게 된 것이다. 이곡은 라디오헤드의 의사와 무관하게 라디오헤드를 대표하는 곡이 됐다. 밴드 초창기 라디오헤드는 전 세계를 떠돌며 하늘의 별 개수와 비교될 정도로 '크립'을 불러댔다. '난 등신이다. 난 미친놈이다'를 하루에만 몇 번씩 외쳐댔을 것이다. 급기야 라디오헤드는 본인들이 만든 이곡을 '쓰레기'라고 부르게 되는 사태까지 벌어진다. 공연장 어디에 가더라도 사람들은 '크립'만을 불러주기를 원했다. 사실 '크립'은 앨범의 대중성을 높이기 위해 마지막에 급조한 곡에 가까웠다. 라디오헤드의 음악 스타일을 대변한다고 말하기는 힘든 곡이었다. 하지만 앨범 차트 역주행까지 펼쳐 얻은 인기가 워낙 강렬해 '라디오헤드=크립'이란 등식이 형성될 위기였다.



1995년 두번째 앨범 '더 벤즈(The Bends)'를 내놓은 뒤 팬들이 보인 반응을 겪고 아마도 라디오헤드는 마음을 굳혔을 것이다. 이 앨범은 아일랜드 출신 전설적인 록그룹 U2의 보노(Bono)가 집에 불이 난다면 꼭 들고 나와야 할 앨범으로 꼽을 만큼 명반이다. 그런지 색깔이 짙게 묻어났던 전작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색채의 음악이 듬뿍 담겨있었다. 온몸으로 찌질함을 표현했던 '크립'과는 가사도 많이 달라졌다. 치기 어린 젊은이가 성숙해지며 잔잔한 어조로 자신의 고통과 서러움 한 자락을 처연히 드러낼 수 있는 성장의 흔적이 묻어 있었다. 이 중 요크의 팔세토 창법과 잔잔한 기타가 돋보이는 '스트리트 스피릿(페이드 아웃)(Street Spirit (Fade Out))' 가사 한 자락을 소개한다.

<스트리트 스피릿(페이드 아웃)>

Rows of houses, all bearing down on me(날 압도하듯이 늘어선 집들)

I can feel their blue hands touching me(파란 손이 날 만지는 게 느껴져)

All these things into position(이 모든 게 다 제자리를 지키고 있지)

All these things well one day swallow whole(이 모든 것들은 언젠가 우릴 다 집어삼킬 거야)

And fade out again and fade out(그리고 사라지는 거지, 페이드 아웃)



This machine will, will not communicate(이 기계는 다시 통신하지 못할거야)

These thoughts and the strain I am under(이런 생각들 그리고 내가 밑바닥이 된다는 불안감)

Be a world child, form a circle(세계의 아이들아 집단을 형성해)

Before we all go under(우리 모두 밑바닥으로 떨어지기 전에)

And fade out again and fade out again(그리고 사라지는 거지, 페이드 아웃)



Cracked eggs, dead birds(깨진 달걀, 죽은 새)

Scream as they fight for life(생존을 위한 싸움으로 비명을 지르는)

I can feel death, can see its beady eyes(난 죽음을 느낄 수 있어, 그들의 번쩍거리는 눈이 보여)



후략



하지만 점점 성숙해지는 그들을 놓고 팬들은 "크립은 어디에 있나요"라고 끊임없이 물었다. "새 앨범은 전작과는 좀 다른 것 같은데 크립 스타일의 곡은 무엇인가요"라고 묻기도 했다. 급기야 라디오헤드는 '크립'과의 결별을 선언한다. 그리고 의도적으로 '크립'과는 반대 방향으로 간다. 1집 스타일의 그런지 곡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었다. "크립에 지쳤다"고 선언하기도 했다. 한참 동안 크립을 공연장에 올리지 않았다. 몇 년 동안 크립을 부르지 않던 그들은 2000년 초반 오랜만에 일본 공연에서 앙코르곡으로 '크립'을 부른다. 간간이 한 번쯤 부르긴 했지만 2009년 이후에는 한 번도 부르지 않았다. 이들이 다시 '크립'을 부른 건 2016년에 이르러서였다. 2012년 내한 공연 당시에도 한국 팬들을 위한 깜짝 행보는 없었다. 언제부터인가 라디오헤드 공연장에서 '크립'을 외치는 것은 금기어가 돼버렸다.



이 같은 분위기에서 세 번째 앨범 '오케이 컴퓨터(OK Computer)'가 나온다. 1997년 세기말 분위기를 물씬 담아 내놓은 앨범이다. 이 앨범을 계기로 라디오헤드는 거장의 반열에 오를 수 있는 가능성을 인정받는 밴드가 된다. 수많은 아류밴드(본인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지만)를 탄생시키며 1990년대 판 '아트록'의 전형을 확립한다. 각종 전자음을 적절하게 활용해 세기말 음울한 분위기를 표현한 이들은 더 이상 라디오헤드가 '크립'류의 그런지 음악을 하는 밴드가 아니라는 걸 세계에 알렸다. 사실 이 앨범이 나오기 전 음반사의 반응은 뜨악했다. 이렇게 난해한 프로그레시브 록으로 어떻게 히트를 할 수 있겠느냐는 회의에 사로잡혀 있었다. 하지만 이들은 영국 차트 1위를 데뷔하며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한다. 1970년대 세계를 주름잡은 '핑크 플로이드'를 떠올리게 한다는 극찬을 이끌어 내며 음악계 중심에 바로 선다. 파라노이드 안드로이드(Paranoid Android), 카르마 폴리스(Karma Police), 노 서프라이지즈(No Surprises) 등의 싱글곡도 인기를 끈다.



다음 앨범인 '키드 에이(Kid A)' 역시 'OK Computer'의 연장선상에 있는 앨범이었다. 이들은 이 앨범으로 드디어 빌보드 앨범차트 1위에 오른다. 프로그래밍된 전자비트와 스트링 오케스트라 등 곡의 웅장함을 더할 여러 장치를 적극 활용했다. 이즈음에서 라디오헤드에 대한 평가를 정확히 둘로 갈린다. 초창기 따라 부르기 좋은 멜로디를 가진 대중적인 밴드 라디오헤드와 후반기 도대체 알아먹지 못할 만한 어려운 음악을 구사하는 후반기 라디오헤드는 확연히 달랐다. 당연히 어려운 걸 좋아하는 평론가들 손은 후반기에 더 많이 올라갔고, 놀랍게도 라디오헤드는 어려운 음악으로도 상업적 성공을 거두는 괄목할 만한 성적을 냈다. 이후로도 '헤일 투 더 시프(Hail to the Thief)' '인 레인보우즈(In Rainbows)' 등 라디오헤드 철학이 실린 명반을 줄줄이 내놓고 있다.



라디오헤드는 여전히 현역 밴드다. 그 흔한 멤버 교체조차 없다. 물론 멤버들이 한때 '더 이상 보여줄게 없다'며 우울증에 빠지기도 하고, 밴드 활동은 내팽개친 채 솔로활동에만 열중하던 과도기도 있었지만 해체와 재결합을 반복하는 다른 밴드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건전한(?) 편이다. 추천 곡으로는 역시 '크립'을 빼놓을 수는 없겠다. 라디오헤드의 성공 밑바탕을 깔았지만 역설적이게도 라디오헤드에 의해 부정됐던 비운의 곡이다. 첫 앨범에 실린 '애니원 캔 플레이 기타'도 숨겨진 명곡이다. 이 밖에 '노 서프라이지즈' '하이 앤드 드라이(High And Dry)'도 추천할 만 하다. 그리고 또 하나의 명곡, 영화 '로미오와 줄리엣' OST에 실렸던 '엑시트 뮤직(Exit Music)'은 반드시 들어야 한다. 곡 후반부로 흘러갈 수록 흐느끼듯 절규하는 요크의 명품 보컬을 제대로 감상할 수 있다.



[홍장원 기자]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