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고 겪다 은행강도까지 울산 동구의 씁쓸한 자화상

최초입력 2018.01.26 06:01:00
최종수정 2018.01.25 14:56:25

[전국구 와글와글-12]
은행 강도 사건으로 본 울산 동구의 자화상
불황에 생활고 범죄로 이어지는 악순환에 주민들 씁쓸
실업자 늘고 땅값은 폭락...부자도시의 쓸쓸한 현실


울산 동구 현대중공업 /사진=매경DB
▲ 울산 동구 현대중공업 /사진=매경DB


지난 18일 현대중공업 울산조선소가 있는 울산 동구. 대한상공회의소가 선정한 국내에서 기업 만족도가 가장 높은 도시 인증식을 3시간여 앞두고 최근 들어 좀처럼 보기 힘든 은행 강도 사건이 발생했다. 울산의 대기업 조선소 협력업체에서 일하다 조선업 불황에 일자리를 잃고 일용직을 전전하던 한 40대 남성이 이날 오전 8시께 은행 출입문 근처에 숨어 있다가 출근하던 직원을 위협해 현금 1억1000만원을 빼앗아 달아났다.

이 남성은 흉기와 플라스틱 분무기로 은행 직원을 위협했다. 은행 직원에게 반항하면 분무기 안의 염산을 뿌리겠다고 위협했으나 분무기 안에 염산은 없었다. 그는 돈을 빼앗은 뒤 테이프로 은행 직원을 묶고, 도보로 달아나다가 작은 오토바이와 승용차를 이용해 울산을 빠져나갔다. 하지만 테이프를 허술하게 묶은 탓에 은행 직원은 범행 직후 테이프를 끊고 경찰에 신고했다. 경찰은 CC(폐쇄회로)TV로 대기업 작업 점퍼를 입은 남성을 추적해 경남 거제에서 6시간30분 만에 검거했다.

이 남성이 경찰에서 밝힌 범행 동기는 생활고였다. 그는 양육비와 생활비 마련, 빌린 돈을 갚기 위해 범행을 저질렀다고 진술했다. 지난 22일 현장검증에서는 "문득 억울한 마음이 들어 범행했다"고 말했다. "무엇이 억울했냐"는 취재진 질문에 "열심히 일해도 비정규직이라는 현실이 싫었다"고 답했다.

현장검증에서 일부 주민들은 "범죄는 용납될 수 없다"면서도 안타까운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주민들이 느낀 감정은 불황에 직장을 잃고 생활고로 살기가 힘들어진 사람이 강도짓을 할 정도로 한때 부자도시였던 동구의 위상이 바닥으로 추락한 것에 대한 씁쓸함인 듯했다.

울산 동구는 현대중공업이 불황에 흔들리면서 위기를 맞았다. 대기업 수주난 여파로 조선 협력업체들이 잇따라 문을 닫았고, 근로자들도 동구를 떠났다. 실직자 수를 가늠할 수 있는 고용보험 피보험자 수는 2015년 7만3083명에서 2017년 4만8355명으로 2만4728명(34%)이 줄었다. 이는 인구 감소로 이어졌다. 한때 18만명이 넘었던 인구는 지난해 말 16만9000여 명으로 감소했다. 동구 인구가 17만명 밑으로 떨어진 것으로 1997년 이후 20년 만에 처음이다.

부동산 시장도 바닥을 치고 있다. 부동산업계에 따르면 원룸 같은 다세대주택 공실률은 60%로 10곳 중 6곳은 방이 비어 있다. 지난해 동구지역 땅값은 0.79% 하락해 전국에서 하락 폭이 가장 컸다. 주요 상권 곳곳에서는 음식점, 상가의 임대와 폐점을 알리는 현수막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동구에서는 생계형 범죄도 심심찮게 발생하고 있다. 근로자와 그 가족을 상대로 계를 했던 계주는 수십억 원의 곗돈을 가로챘다가 덜미를 잡혔고, 취업에 실패해 생활고를 겪던 40·50대 남성들은 식당에서 소주를 훔치거나 마트에서 먹거리를 훔치다 붙잡히기도 했다.

울산 동구가 기업이 가장 만족하는 도시로 선정됐다는 뉴스도 팍팍한 현실을 사는 주민들에게는 먼 나라 이야기처럼 들렸다. 대한상의가 어떤 기준으로 도시를 선정했는지 의문을 제기하는 주민도 있었다. 권명호 울산 동구청장조차 "불황으로 힘든 도시가 기업 만족도 1위 도시로 선정돼 놀랐다"고 말했다.

현재 동구 주민들은 현대중공업 임금과 단체협상이라도 하루빨리 타결되기를 고대하고 있다. 임단협이 타결되면 돈이 풀릴 거라는 막연한 기대감 때문이다. 현대중공업은 이달 초 2년치 임단협에 잠정합의했으나 노조 찬반 투표에서 부결됐다. 현대중공업 노사는 다음주부터 재교섭을 시작할 예정이다.

[울산/서대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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