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경제이야기(5) 창업생태계와 스테이크홀더

최초입력 2018.05.11 16:10:00
최종수정 2018.05.11 16:02:05

지멘스 부스
▲ 지멘스 부스
독일경제 이야기 (5)

우리나라가 올해부터 본격적으로 추진하려는 국가 사업 중 하나가 '도시재생 뉴딜'입니다. 장기적이고 전문적인 일종의 부동산 개발 프로젝트인데 말 그대로 낡고 오래된 도시 지역을 새롭게 탄생시켜 활기를 불어넣고 주민들의 복지를 높이겠다는 취지에서 여러 나라에서 다들 하는 사업입니다.

이 도시재생 뉴딜을 한다고 하면서 벤치마킹한 곳이 바로 독일 베를린입니다. 아마 거의 모든 언론사가 베를린 출장을 다녀와 기사를 썼을 겁니다. 그곳이 '팩토리 베를린'입니다. 베를린 장벽에 있는 맥주공장을 스타트업의 요람으로 만들었습니다. 젊은 창업 청년들이 이곳에 모여 협업을 하며 기업을 키워나갑니다. 여기에 구글이 100만유로를 투자해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곳이 독일에 100개가 넘습니다. 이번 출장 기간 중 '유레프(EUREF) 캠퍼스'라는 곳과 스필펠트(Spielfeld)라는 곳을 둘러봤습니다. 유레프는 베를린 중심가에서 차로 20분가량 떨어진 과거 가스발전소 자리에 위치해 있는데 붉은색 벽돌로 된 여러 동의 건물이 겉보기엔 교도소 같다는 느낌이 들기도 했습니다만 내부를 완전히 재생해 건물 안으로 들어가면 완전 현대식 공간이 나옵니다. 여기서 에너지 최적화 솔루션을 개발하고 완전자율주행 버스에 필요한 소프트웨어를 개발합니다. 9개 기업이 입주해 있는데 서로 지식을 공유하고 시너지 효과를 극대화하는 협업의 현장입니다. 저는 일종의 공방(工房) 같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스필펠트는 시내 길거리의 건물을 '디지털 허브'로 만들어 원하는 사람들이 이곳에서 단기간 프로젝트를 할 수 있도록 설계했습니다. 우리 일행은 여기서 4개 기업의 스타트업 피치를 들었는데 그동안 제조업 중심의 성공적 독일 모델에 집착하느라 디지털이나 인터넷 투자를 모험으로 여기고 꺼렸는데 이제는 분위기가 완전히 바뀌었다고들 합니다. 그게 독일의 인더스트리 4.0입니다. 독일 정부가 판을 깔아준 것이지요. 대기업과 중소기업, 대학 연구기관이 기술과 지식을 서로 공유할 수 있도록 네트워크를 만든 것입니다. 정부는 법 체계를 정비하고 표준화와 보안에 대한 가이드라인 같은 것을 마련하는 역할을 맡습니다. 여기에 벤처캐피털리스트 같은 투자자들이 모여들기 시작했습니다.

SAP 부스
▲ SAP 부스


독일은 SAP라는 훌륭한 소프트웨어 기업이 있긴 하지만 미국 실리콘밸리의 구글, 아마존, 애플 같은 혁신기업은 그리 눈에 띄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삼성, 현대차 같은 대기업도 없습니다. 그런데 제가 보기엔 '협업 생태계'라는 아주 강력한 무기가 있습니다.

독일에서 가장 많이 듣는 말 중 하나가 이해관계인(stakeholder)이란 겁니다. 미국은 주주(shareholder) 중심의 자본주의지만 독일은 종업원, 지역주민, 시민단체 등 기업의 이해와 관계된 집단의 목소리를 경청하는 문화가 조성돼 있습니다. 그래서 의사결정이 매우 느려 보이기도 합니다만 결정이 되면 바뀌는 경우가 거의 없지요. 국내 굴지의 대기업이 독일 기업 하나를 인수하려는 협상이 있었는데 기업 CEO와의 협의에서 원칙적 합의가 도출됐습니다. 그런데 이 독일 CEO는 본국에 돌아가 우리의 이해관계자들과 협의를 거쳐 알려주겠다고 했는데 8개월 동안 답이 없더라는 겁니다. 그러고 나온 게 "이제 결정이 내려졌는데 기업 매각은 안 한다"는 답이었답니다.

이는 1920~1930년대 발터 오이켄 등을 중심으로 하는 프라이부르크 학파가 정립한 '사회적 시장경제' 모델의 영향 때문입니다. 시장 경쟁에 기반을 둔 경제이나 사회적 균등성을 강조하는 소위 '질서 자본주의'입니다. 무슨 질서냐? 경쟁 질서, 통화 질서, 사회 질서입니다. 이 부분은 제가 전에 쓴 '30년 전 박봉환 장관이 던진 질문'에서 설명한 바 있습니다. 개인의 자유와 선택이라는 효율성과 사회적 보호라는 형평성에서 균형을 잡는 시스템입니다.

독일은 제조업의 나라이지요. 흔히 4차 산업혁명의 핵심 중 하나인 사물인터넷(IoT·Internet of Things)과 관련해 독일에는 우스갯소리가 하나 있습니다. 미국이 인터넷을 갖고 있다면 우리는 사물(things)을 갖고 있다는 겁니다. 정말 물건 만드는 데는 혀를 내두를 정도의 완벽함과 철저함이 있는 나라가 독일입니다. 흔히들 뿌리산업이라고 하지요. 주조, 금형, 용접, 열처리, 도금 같은 산업을 말하는데 이게 독일의 단단한 기초를 만들고 있습니다. 장인정신이지요. 한국무역협회 자료에 따르면 주요 국가별 세계 수출 시장에서 점유율 1위를 차지하는 품목 수가 독일이 세계 2위입니다. 단연 중국이 1위인데 독일은 그 숫자가 한국의 10배 정도 됩니다. 그 제조의 강점이 디지털 협업으로 살아나고 있다고 보입니다.

하노버 메세 전시장
▲ 하노버 메세 전시장


독일 정부 관리의 브리핑을 들었는데 저도 그 숫자에 대해 좀 놀랐습니다. 제조업 비중이 꽤 될 줄 알았는데 22%(부가가치 기준)밖에 안된다는 겁니다. 70% 이상이 서비스업입니다. 그 서비스업이라는 게 우리나라처럼 식당 같은 자영업이 많은 게 아니라 제조업에 파생된 지식서비스업이 많다는 게 차이점입니다.

출장 나오기 1주 전 영국에서 발행되는 이코노미스트지(誌)의 커버스토리가 '쿨한 독일(Cool Germany)'이었습니다. 독일은 지금 정치, 경제, 문화, 사회 전반적으로 최고의 시기를 누리고 있다는 게 이 잡지의 분석이었습니다. 베를린은 시내 곳곳에 뭔가를 개조하려는 건설 크레인이 목격됩니다. 독일이 정말 변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외견상으로뿐만 아니라 내부적으로도 말입니다. 더욱 다양해지고 더욱 개방적으로. <시리즈 끝>

[손현덕 매일경제신문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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