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는 '더 나아진 나'로 완성된다

최초입력 2018.05.15 06:01:00
최종수정 2018.05.15 10:59:56

프리미엄 첨부 이미지
[김기철의 책으로 세상읽기-34] "심려를 끼쳐드려 진심으로 죄송합니다." 정확히 6번을 똑같은 말만 반복했다. 혐의를 인정하느냐는 질문에도, 물컵을 던진 것이 갑질이라고 생각하냐는 질문에도, 총수일가 사퇴론에 대한 생각을 묻는 질문에도, 마지막으로 할 말이 있느냐는 질문에도 조현민 대한항공 전 전무는 "심려를 끼쳐드려 죄송합니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대한항공의 홍보팀과 법무팀을 총동원해서 준비한 열여섯 글자를 앵무새처럼 외워댔다.

광고대행사 직원에게 물컵을 던진 혐의에 대한 조사를 받기 위해 경찰에 출두한 조현민 전 전무의 대답을 들으면서 반성하는 마음도 없고 사과할 마음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히려 "내가 왜 이 수모를 당해야 하는지 나는 모르겠다"는 억울함과 "두고 보자"는 복수심이 읽혔다.

누구나 잘못은 한다. 문제는 '사과'다. 사실 대한항공 3세들이 '사과'만 제대로 했어도 지금처럼 대한항공 안팎에서 '조씨 일가의 퇴진'을 요구받는 상황은 없었을 것이다. 그 기회가 2014년 12월 조양호 회장의 큰딸 조현아의 일명 '땅콩회항 사건' 때 한 번 있었다.

하지만 조씨 일가는 거듭날 수 있는 그 소중한 기회를 날려버렸다. 당시 들불처럼 타오른 대중의 분노 앞에 잠시 고개를 숙이기는 했지만 그들은 결코 '사과'하지 않은 것이다.

프리미엄 첨부 이미지


'공개 사과의 기술'의 저자인 서던오리건대 에드윈 L 바티스텔라 교수는 피해자에게 "미안하다"고 말하고 고개를 숙이는 것이 '사과'는 아니라고 주장한다. '사과'는 일종의 '과정'이라는 것이다.

사회학자 어빙 고프먼은 '완전한 사과'는 5단계의 과정을 거쳐 완성되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에드윈 L 바티스텔라 교수
▲ 에드윈 L 바티스텔라 교수
"사과하는 이는 수치심과 유감을 표현한다. 특정한 행동 규칙의 위반을 인정하고, 그에 따른 외면과 배척에 공감한다. 잘못된 행위를 명시적으로 부정하고, 그 행위와 연관된 이전의 자신을 비판한다. 앞으로 바른 행동을 하겠다고 약속한다. 그리고 속죄하고 배상을 제시한다."(22쪽)

반면 사회학자 니털러스 태뷰치는 고프먼의 '사과의 5단계'가 가해자 입장에서 정의한 '사과'라며 '사과 요구, 사과, 응답'의 '도덕적 삼단논법'을 제시한다.

"'사과 요구'는 잘못을 저지른 사람과 피해를 당한 사람이 사과로 화해할 수 있다고 인식하는 것이다. 이는 잘못한 사람의 자발적인 내부 인식으로 시작될 수도 있고, 피해를 당한 사람이 보이는 외부적 반응이나 제삼자가 피해의 내용을 가해자에게 지적함으로써 시작될 수도 있다. 피해자는 사과로 해결될 수 있음을, 즉 잘못이 사과로 풀릴 수 있는 문제임을 인식해야 한다. 가해자와 피해자가 모두 사과를 가능한 해법으로 생각해야 하기 때문에, 사과 요구는 초래된 피해에 대한 쌍방의 이해를 포함한다."(49쪽)

고프먼의 경우든, 태뷰치의 경우든 공통적으로 사과는 잘못에 대한 인정이 전제되어야 하고, 잘못으로 발생한 피해를 배상하고 구제해야 하며, 궁극적으로 다시는 그런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약속까지 전제되어야 한다. 이런 것들이 포함되지 않은 사과는 사과가 아니라 '변명'이자 '해명'이자 '자기변호'일 뿐이다.

프리미엄 첨부 이미지


바티스텔라 교수는 이를 1992년 발생한 오리건주 상원의원 로버트 팩우드 사건을 예를 들어 설명한다. 팩우드 사건은 지금으로 치면 '미투(Me Too)'사건이다. 이 사건은 '워싱턴포스트'가 팩우드 상원의원을 성희롱으로 고소한 여러 명의 여성들의 이야기를 기사화하면서 불거졌다. 해당 기사가 나온 뒤 팩우드 의원은 여러 차례 사과했다. 이를 순서대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제 발언이나 행동이 달갑지 않았다면, 제가 어떤 식으로든 개인적인 불편이나 당혹감이 들게 행동했다면 진심으로 죄송합니다."

2. "저는 어떤 여성에게든 의식적으로 해를 끼칠 의도가 전혀 없었습니다. 따라서 저는 연루된 모든 이들과 오리건주의 주민께 심심한 사과를 전합니다. 제가 적절한 조처를 취한다면 제 과거의 행적이 용서받지 못할 일은 아니기를 바랍니다."

3. "저는 제 행동에 전적인 책임을 지고자 여기에 나왔습니다 제가 한 짓은 어리석고 천박할 뿐 아니라 전적으로 잘못된 것으로 그 외에는 달리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4. "여성 문제에 대한 저의 헌신과 직장 내 성 중립에 대한 제 신념에 비춰볼 때, 저의 행동에 대한 작금의 공격은 깊은 우려를 자아냅니다. 제 신념이 진정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저의 행동이 그런 신념에 충실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점을 인식합니다. 비록 이런 사건이 대부분 10~20년 전 일이고 그로 인해 직업이나 급여에 불이익을 당한 사람은 없지만, 제 행동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때는 몰랐습니다. 이제는 압니다."

5. "저는 사과합니다. 그리고 혐의에 대해서는 아예 논의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이 제가 사과하는 내용입니다. 저는 제가 했다고 혐의가 제기된 행동에 대해 사과하고 미안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172~173쪽)




저자는 팩우드의 문제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사과는 없고 자기변명으로만 일관했다는 것이다. "그의 사과는 불성실한 말뿐인 사과였다. 자기 잘못을 어떤 식으로도 밝히지 않았고 그 잘못의 심각성이나 그것이 끼친 해악의 윤리적 무게도 인정하지 않았다. 그의 사과는 사과의 효과를 저해하는 다른 전술들과 뒤섞였다. 팩우드는 혐의를 부인했고, 알코올중독을 핑계로 책임을 회피했으며, 자기 잘못을 한낱 무례한 행동으로 축소했다. (중략) 자신을 비난하는 이들을 공격했고, 수사가 진행중이어서 부적절하다며 혐의 내용을 언급하는 자체를 오랫동안 거부했다."(180쪽)

말하자면 팩우드의 사과는 완전한 사과의 '반면교사'인 셈이다.



저자 바티스텔라는 개인적 사과뿐 아니라 국가와 공동체 차원의 사과, 역사적 범죄에 대한 사고 문제도 이야기한다. 일본의 위안부 문제에 대한 사과, 세월호의 문제에 대한 재조사 등에 대해 우리 사회에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지에 대해 많은 시사점을 던져주고 있다.

일본이 1941년 진주만을 침공한 뒤 미국에서는 미국에 거주하는 일본인들이 일본을 위해 일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과 공포감이 확산되면서 서부지역에 사는 일본계 미국인 11만7000명을 10개 수용소에 억류했다. 1945년 억류가 해제되고 통행금지령이 풀린 뒤에도 일본계 미국인들은 큰 고통과 피해를 입었다.

이에 대해 역대 5명의 미국 대통령들이 이에 대해 직접 사과했고, 40년이 지난 1981년에는 '전시 민간인 이주와 억류 진상 조사위원회'를 꾸려 2차 세계대전 중 전쟁부 차관을 지낸 인물까지 750여 명의 의견을 청취했고 배상 문제를 담당하는 배상행정국을 설치해서 8만2000건이 넘는 배상 청구를 처리했다.

물론 미국 내에서 이에 대한 반대의 목소리도 있었다. 노스캐롤라이나의 제시 헬름스 상원의원은 "1940년대에 발생한 문제의 배상비용을 1980년대 시민이 부담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에 대해 바티스텔라는 "국가 지도자는 과거의 불의를 바로잡아야 할 도덕적 의무가 있다"면서 "그들은 역사적 불의를 비난하는 것은 물론, 시정하고 화해를 촉진하는 특별한 책임을 진다"고 했다.

특히 역사적 과오에 대한 국가적 차원의 사과는 현재에 대한 자부심이 바탕이 될 수밖에 없다. 개인적 잘못에 대한 사과가 '잘못을 딛고 한걸음 성숙한 나'로 이끌 듯이 국가적 차원의 사과 역시 '도덕적으로 차별된 국가'로 나아가는 문을 열어주는 것이다. "국가적 사과는 필요하고 유용한가? 나는 그렇다고 믿는다. 국가적 사과는 화해의 시작이나 마무리 단계가 될 수 있다. 철학자 브라이언 와이너가 설명하듯이, 성공적은 국가 차원의 사과는 '정부가 이제 역사적 과오를 인식하고, 당시 희생자들에게 속죄하고 배상할 정부가 되었음을 선언할 수 있다'는 의미다. 달리 말해 현 정부는 과거 정부와 도덕적으로 차별된다."(211쪽)

프리미엄 첨부 이미지


지난 5월 4일 중국 베이징대 린젠화(林建華) 총장은 개교 120주년 기념식에서 축사를 하다가 중국 중학생용 교과서에 나오는 단어인 홍곡(鴻鵠·큰 기러기와 고니)을 홍호(鴻浩)로 잘못 읽어 비판을 받았다. 중국의 지성을 대표하는 대학의 총장이 중학생용 한자도 제대로 읽지 못한다는 비판이었다. 이에 대해 린젠화 총장은 장문의 사과문을 올렸다. 사과는 어떠해야 하는지 이 사과문에 모두 포함되어 있다. 길지만 모두 인용할 수밖에 없다. 일독을 권한다.

"친애하는 동학 여러분.

매우 미안합니다. 개교 기념 행사에서 축하 연설 중 '홍곡'의 발음을 잘못 읽었습니다. 솔직히 말해 나는 정말로 이 글자의 발음을 숙지하지 못했습니다. 이번에 배웠지만, 비용은 확실히 무척 비싸네요.

이번 잘못이 많은 동학과 친구를 실망하게 했습니다. 베이징대 총장으로 어휘 기초가 이렇게 낮아서는 안 됩니다. 솔직히 내 문자 기초는 좋지 않습니다. 이번 잘못으로 이 문제가 폭로됐을 뿐입니다.

나의 초·중 시절에는 문화대혁명이 일어나 교육이 멈췄습니다. 시작된 몇 해 동안 교과서도 없었고 이후 교과서는 있었지만, 무척 단순했습니다. 내가 받은 기초 교육은 완전하지도 체계적이지도 못했습니다. 나는 네이멍구(內蒙古)의 수십 가구에 불과한 작은 농장에서 지냈습니다. 지금 사람들은 당시 불편함을 상상하기 어려울 겁니다. 농장은 도시에서 수십 ㎞ 떨어져 있었을 뿐만 아니라 도시는 마차를 타고 온종일 나가야 할 정도로 멀었습니다. 당시는 지금같이 발달한 인터넷도 없었고 책도 찾기 어려웠습니다. 최근 나는 '총장관념-대학의 개혁과 미래'란 책을 냈습니다. 책에서 당시 상황을 언급했습니다.

'문화대혁명이 시작됐을 때 나는 초등학교 5학년이었습니다. 수년간 교과서가 없었습니다. 선생님은 우리에게 (마오쩌둥) 어록과 노삼편(老三篇·마오쩌둥의 저술 세 편으로 '베쑨을 기념하여' '우공이산'(愚公移山)' '인민을 위해 복무하자'(爲人民服務))만 외우도록 했습니다. 배움에 대한 욕심이 가장 강렬하던 10대에 다른 책은 없었습니다. 마오쩌둥 선집과 당시 간부 교육용 소비에트 사회주의 교과서만 반복해 읽었습니다. 중국 근현대사 지식도 처음에는 모두 마오쩌둥 선집과 주석에서 얻은 것입니다. 모순론과 실천론을 읽은 뒤 중학교 정치 과목에서 다른 한 편을 배웠을 뿐입니다. 하나가 나뉘어 둘이 되고 대립을 통일하고, 주요모순과 2차 모순 등, 이들 개념은 줄줄 외웠고 우리 세대의 사상과 관념에 깊이 영향을 끼쳤습니다.'

나는 운이 좋아 1977년 대입 어문 과목 중 작문에서 80점을 받았지만, 단어와 어법은 20점에 불과했습니다. 아니었다면 베이징대에 합격하지 못했을 겁니다. 시험 며칠 전에 어법 책 한 권을 읽고 주어와 서술어가 무엇인지 알았습니다. 어법 개념은 분명하지 않았고 대학 입학 뒤에야 영어를 배우며 무척 고생했습니다.

이 편지를 쓰면서 여러분에게 말하려는 점은 내 무지나 실수를 변호하려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에게 진짜 나를 알리고 싶어서입니다.

여러분의 총장은 완벽한 사람이 아니며 결점이 있고 부족하며 잘못을 범한 사람입니다. 또 여러분께 말하고자 하는 것은 위에 언급한 책을 포함해 모두 내가 쓴 것이라는 점입니다. 그 내용과 사상은 모두 여러분이 알아주길 바랍니다.

나는 노력하겠지만 이후 이런 잘못이 또 출현하지 않으리라 보장하기 어렵습니다. 문자 수련은 하루아침에 되지 않습니다. 내 나이의 사람은 짧은 시간 안에 문자 수준에서 큰 진보를 이루기 어렵습니다.

진정 나를 실망하게 하고 부끄럽게 한 것은 나의 잘못에만 관심을 불러 치사를 통해 여러분께 알리려던 사상을 홀시하게 만든 것입니다. '간절함과 질의는 가치를 만들지 못합니다. 반대로 미래를 향한 걸음을 방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걸음을 미래로 향하게 하는 것은 확고한 믿음, 현실에 직면할 용기와 미래와 직면할 행동입니다.'

다시 한번 사과드립니다.

여러분을 사랑하는 총장 린젠화."

프리미엄 첨부 이미지
[김기철 기자]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