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멜이 본 조선 형벌제도, 이 정도로 가혹할 줄이야

최초입력 2016.07.15 15:55:00
최종수정 2016.07.15 18:17:27

하멜 표류기.
▲ 하멜 표류기.
[고전으로 읽는 우리역사-3] "조선인은 훔치고 거짓말하며 속이는 경향이 아주 강하다. 믿을 만한 사람들이 되지 못한다. 남을 속여 넘기면 그걸 부끄럽게 생각하는 게 아니라 아주 잘한 일로 여긴다. 그들은 여자같이 나약한 백성이다. 타르타르(청나라)가 얼음을 건너와 이 나라를 점령했을 때 적과 싸워 죽은 것보다 산으로 도망해서 목매달아 죽은 병사가 더 많았다. 그들은 피를 싫어한다. 전투에서 누군가가 쓰러지면 곧 달아나고 만다."

하멜표류기 초판 목판화 8장 중 하나로 네덜란드 선원들이 어선을 훔쳐 달아나려고 시도하다가 붙잡혀 곤장을 맞고 있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 하멜표류기 초판 목판화 8장 중 하나로 네덜란드 선원들이 어선을 훔쳐 달아나려고 시도하다가 붙잡혀 곤장을 맞고 있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조선이라는 나라의 존재를 유럽에 최초로 소개한 '하멜표류기'는 조선인의 민족성을 언급하면서 이렇게 기술했다. 하멜표류기는 네덜란드인 하멜이 일본 나가사키로 항해하던 중 태풍을 만나 조선 제주도에 표착한 뒤 탈출하기까지 1653년부터 1666년까지 조선에 억류된 생활을 기록하고 있다. 이 기간 제주도, 한양, 강진, 여수에 끌려다니며 겪은 고된 생활을 자세하게 적었으며 그 과정에서 접촉한 조선 사람에게 들은 여러 지방의 풍속과 사정도 담고 있다. 특히 부록인 '조선국기'에는 한국의 지리 풍토, 산물, 경치, 군사, 법률, 교육, 무역 등이 구체적으로 적혀 있어 당시 한국의 사회 실정, 풍속, 생활 등을 파악하는 데 귀중한 사료로 평가된다.

 하멜의 시선은 전반적으로 부정적이지만 정확하다. 하멜은 조선의 인구가 매우 많다고 느꼈다. 남자는 이미 아이를 몇 낳은 아내라도 내보내고 다른 여자를 아내로 취할 수 있다. 처첩을 몇이라도 거느릴 수 있으며 그래도 남에게 흠 잡히지 않는다. 자기 여인을 여종보다 별로 나을 게 없이 취급한다. 사소한 일을 트집 잡아 아내를 내보낼 수 있으며 남자가 아이를 원치 않으면 쫓겨난 여자는 그 애들을 데리고 나가야 한다. 이 나라에 인구가 그렇게 많은 것도 그리 놀랄 일이 아니다. 인구가 많지만 남부 지방에서 쌀과 잡곡, 목화가 풍부하게 재배돼 풍년에는 충분히 자급자족한다고 묘사했다.

 일본과 조선 땅 사이에 있는 제주도와 대마도에 대한 설명이 매우 이채롭다. 대마도는 애초 조선땅이었는데 일본과 전쟁에서 조약을 맺어 제주도와 교환했다고 조선사람들이 말한다고 전하고 있다.(공식적으로는 제주는 신라에 복속됐으며 신라 멸망 후 독립했다가 고려 때 다시 우리 영토로 편입됐다. 대마도는 태종이 이종무를 시켜 완전히 정벌했지만 복속하지는 않았다. 조선과 일본을 모두 상국으로 모시던 대마도는 1868년 메이지유신 이후 완전히 일본 영토에 들어갔다.)

 조선은 청나라에 예속돼 있다. 하지만 국왕의 권위는 실로 절대적이다. 국왕은 조정의 의견을 따르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나라를 통치한다. 양반들은 토지와 노예에 의해 수입을 얻는다. 개중에는 2000~3000명의 노예를 소유한 사람도 있다. 종이 인구의 절반이 넘는다.

 17세기인데도 조선은 세계를 인식하는 수준이 지극히 낮았다. 조선인들은 12개 왕국밖에 없다고 알고 있었다. 이들 나라는 모두 중국 천자의 지배를 받았으며 공물을 바쳐야 했다고 판단했다. 청나라가 중국을 소유한 뒤로는 다른 나라들이 모두 스스로 해방됐다고 인식했다. 많은 나라가 있다며 이름을 말해 주어도 조선인들은 비웃으며 필시 고을이나 마을 이름일 거라고 반박한다. 하멜은 해안에 대한 지식은 태국 이상 멀리 나아가지를 못한다고 했다. 그들보다 더 멀리서 온 외국인과 교류해 본 경험이 거의 없다.

 외국인의 눈으로 볼 때 조선의 형벌제도는 가혹하기 이를 데 없다. 한 여인이 남편을 죽였다. 관아에서는 이 여인을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한길 가에다가 어깨까지 파묻었다. 그 여자 옆에는 나무톱을 놓아두었는데 이곳을 지나다니는 사람들은 양반을 제외하고 누구나 그 톱으로 한 번씩 그녀가 죽을 때까지 목을 잘라야 한다.

 살인죄를 저지른 자는 사형에 처하지만 그 절차가 낯설다. 피살자의 시체를 구석구석 닦아 낸 식초와 더럽고 구역질 나는 물을 잘 섞은 다음 이 혼합 액체를 범죄자의 입에 물린 깔대기에 배가 찰 때까지 들이붓고는 부어오른 배를 터질 때까지 매질한다. 결혼한 다른 남자의 아내를 데리고 자면 사형에 처해진다. 남자들은 여자를 아주 좋아하며 질투심이 너무 많아 절친한 친구에게도 좀처럼 아내를 보여주려 하지 않는다. 범죄자는 자기가 죽는 방법을 선택할 수는 있다. 남자들은 보통 뒤에서 찔려 죽기를 원하며 여자들은 자기 목을 찔러 죽는 방법을 택한다.

 국왕에게 세금을 제때 내지 못한 사람은 밀린 세금을 다 낼 때까지 또는 죽을 때까지 한 달에 두세 차례씩 정강이뼈를 맞는다. 맞다가 죽으면 그의 일가친척이 밀린 세금을 내야 해 국왕이 결코 자기 수입을 못 받는 법은 없다. 하멜 일행의 물품을 훔친 도둑의 경우 1m 길이의 팔뚝만 한 몽둥이로 발바닥을 매질했다. 각각 30~40대씩 맞았는데 그중 일부는 발가락이 떨어져 나갔다.

 하멜은 사찰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사찰은 주로 양반들의 놀이터로 비쳤다. 그들은 기생이나 다른 동반자를 데리고 절에 자주 놀러온다. 절은 숲이 우거진 산속에 위치해 있어 경치가 매우 아름답고 절간 건물은 나라에서 가장 잘 지어진 건물로 간주된다. 절은 매음굴이나 선술집에 가깝다.

 여러 군대 중 승병이 조선에서 가장 우수한 병사로 간주된다고 했다. 그들은 유사시에 승병으로 활약해야 하므로 칼과 활로 무장하고 있다고 소개한다.

 부모는 자식을 소중히 여기며 자식도 부모를 공경한다고 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양반 등 일부 계층에 국한되는 일이다. 종들은 자기 자식들을 거의 돌보지 않는다. 자식이 일할 만한 나이가 되면 주인이 데려가 버린다.

 조선인들은 질병을 크게 혐오한다. 전염병이라도 걸리면 환자를 집에서 운반해 그가 살고 있는 마을이나 고을 밖으로 실어내어 들판에 그런 목적을 위해 만든 조그만 초가집으로 데려간다. 그에게는 아무도 접근하거나 말을 걸지 않는다. 지나가는 사람은 환자 쪽을 향해 땅에 침을 뱉고 지나간다. 도와줄 친구가 없는 사람은 아무도 돌보지 않아 그대로 죽어버리고 만다.

 담배 사랑도 경이롭다. 남자뿐만 아니라 여자도 피우고 심지어는 너댓 살 먹은 아이들도 피운다는 것이다. 담배를 피우지 않는 사람은 발견하기 어려울 정도라고도 했다.

네덜란드 호린험에 있는 하멜상.
▲ 네덜란드 호린험에 있는 하멜상.
하멜이 조선에 당도했을 때 네덜란드는 최고 황금기를 맞았다. 3만4000척의 상선을 보유하고 세계 무대에서 활약하면서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경제적 번영과 함께 문화 부흥도 최고조에 이르렀다. 네덜란드가 자랑하는 레이던대학이 이 시기 창립되고 국제법의 창시자 휘호 흐로티위스, 철학자 스피노자, 물리학자 크리스티안 하위헌스, 미생물을 처음 연구한 안톤 판 레이우엔훅, 화가 반다이크 등도 이 시기 활동했다. 하멜 일행이 무려 14년간이나 조선에 머물렀는데도 조선은 이런 시대의 변화를 전혀 읽어내지 못했다. 한일합병은 결코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난 사건이 아니다.



▶헨드릭 하멜(1630~1692)=네덜란드 호린험에서 태어났으며 23세이던 1653년 동인도회사 소속 선박 선원으로 일본 나가사키로 가던 도중 일행 36명과 함께 제주도에 표착했다. 1666년 억류 생활 끝에 탈출하여 1668년 귀국했다. 고국에 돌아간 하멜은 조선에서의 억류 기간 도중 받지 못한 임금을 청구하려고 보고서를 썼다. 1668년 이를 근거로 한 '하멜표류기'가 암스테르담과 로테르담에서 출판됐다. 그때까지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조선에서의 표류 이야기가 유럽인들의 관심을 끌면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그 후 동인도회사 회계사로 일하다가 1692년 독신으로 사망했다.

[배한철 영남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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