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남아를 이해하는 키워드 '아세안 방식(ASEAN Way)' 아시나요

최초입력 2018.05.04 18:05:00
최종수정 2018.05.07 14:26:22

 인도네시아 중앙은행 공무원들과 면담 중인 한국 IT 기업인들
▲ 인도네시아 중앙은행 공무원들과 면담 중인 한국 IT 기업인들


[우리가 몰랐던 아시아-2] "동남아시아 공무원들과 미팅을 하고 나면 속이 터져요. 이메일 답변은 하세월이고, 답답해서 전화를 걸면 알겠다는 말만 되풀이하지 진척되는 일이 없어요."

동남아 시장 문을 두드리는 주변 기업인들이 종종 어려움을 털어놓는다. 그중에는 업무차 명함을 건넨 동남아 공무원들의 급할 것 없다는 업무 태도에 속앓이를 하는 경우도 많다. 요구 사항을 당장이라도 들어줄 것 같은 첫 만남의 화기애애함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담당자의 회신은 더디기만 하다. 가부 결정을 기다리다 지친 중소기업 임직원, 스타트업 창업자들이 "희망 고문이 따로 없다"고 하소연을 하는데 안쓰러움마저 든다.

동남아 공무원 사회의 여유로운(?) 업무 처리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생각해볼 수 있다. 우선 대다수 동남아 방문객이 공감하는 사회 전반의 느릿한 생활습관을 들 수 있다. 연중 무더위가 지속되는 적도에 걸쳐 있는 지리적 특성상 동남아에서 한국인 특유의 '빨리빨리' 문화를 기대하기는 쉽지 않다. 이와 함께 동남아 공무원들의 '갑' 자세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천연자원의 천국 동남아에서는 전통적으로 사업 인허가권 등을 움켜쥔 공무원들의 영향력이 남달랐다. 여기에 최근 경제가 성장가도를 달리면서 비즈니스 기회를 찾아 전 세계의 자본과 인력이 몰려들고 있다. 이렇듯 공급이 수요를 초과하는 상황에서 아무래도 공무원 조직보다는 민간 기업들이 몸이 달 수밖에 없다.

물론 동남아 공무원들 모두가 불만의 화살을 맞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인프라스트럭처 개발, 공장 신설 등을 위해 외자 유치에 사활을 건 지방의 공무원들은 상대적으로 업무를 진행하는 데 적극적이고 그만큼 현장의 볼멘소리도 적다. 그리고 공무원 사회의 복지부동 분위기는 지역을 막론하고 일정 부분 지구촌의 공통 현상이기도 하다. 전문가들은 싱가포르 등을 제외한 공무원 조직의 전반적인 느린 업무 태도가 동남아를 이해하는 핵심 키워드와 직결돼 있다고 입을 모은다. 동남아 10개 나라로 구성된 지역협력기구 아세안(ASEAN)의 운용 방식인 '아세안 방식(ASEAN Way)'이 그 주인공이다.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 위치한 아세안 사무국(ASEAN Secretariat) 건물
▲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 위치한 아세안 사무국(ASEAN Secretariat) 건물


1990년대 초반 무렵 본격화한 것으로 알려진 아세안 방식은 아세안의 작동 원리로 해석할 수 있다. 구체적으로는 지난해 설립 50주년을 맞은 아세안을 이끌어온 일련의 규약들을 의미한다. 아세안 방식은 '내정 불간섭(non-interference)'과 '합의에 기반한 의사 결정(consensus decision-making)' 원칙에 기반하고 있다. 2015년 말 아세안경제공동체(AEC·ASEAN Economic Community)를 출범하며 단일 시장 협력체를 선언한 아세안을 제도적으로 뒷받침해온 두 축이다.

아세안 회원국들은 그동안 상호 내정에 간섭하지 않는다는 방침을 고수해왔다. 국제사회에 커다란 논란을 불러일으켰던 로힝야족 난민 사태는 아세안의 불간섭 원칙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로 꼽힌다. 실제 이슬람계 소수민족 로힝야족에 대한 미얀마 정부군의 학살에 항의하는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무슬림 단체 등의 시위가 이어졌지만 정작 역내 국가 차원에서는 눈에 띌 만한 움직임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합의에 기반한 의사 결정 역시 역사적으로 뿌리내려온 메커니즘이다. 아세안 지도자들은 민감한 사안은 일단 보류한 채 합의를 이끌어낼 수 있는 문제들을 끊임없이 논의하면서 의견을 모아왔다. 인도네시아에서 30년 넘게 거주한 한 교민은 "지방 국립대학의 단과대 학장 선거 등도 비슷한 과정으로 진행된다"며 "몇 달, 몇 년이 걸리더라도 구성원들의 합의를 통해 결국 만장일치로 리더를 추대한다"고 강조했다.

아세안을 떠받치는 두 가지 원칙을 바라보는 외부의 시선은 다소 엇갈린다. 동남아 사회의 특수성이 반영된 고유한 방식이라는 긍정적 평가가 있는가 하면, 이해관계가 제각각인 10개 국가가 모여 탄생한 지역협력체의 현실과 동떨어진 규범이라는 회의적 인식도 존재한다. 특히 서구권에서는 내정 불간섭 원칙에 얽매여 인권 탄압 및 환경 파괴 이슈 등에 침묵하는 점, 다수결 원칙을 배제하고 합의에 바탕한 의사 결정에 의존하는 데 따른 비효율성 등을 지적하기도 한다.

하지만 아세안 방식이 동남아 사회 전역에 깊숙이 자리 잡아왔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리고 일각의 부정적 시각에도 불구하고 앞으로도 아세안의 주요 제도적 장치로 중요성을 뽐낼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아세안 방식을 존중하고 이해하려는 노력을 기울임으로써 현지인들에게 한 걸음 다가가는 편이 현명하지 않을까. 동남아 공무원 조직의 느긋함을 탓하기에 앞서 그들의 입장에 서 보려는 자세가 필요한 것처럼 말이다.

[방정환 아세안비즈니스센터 이사 / '왜 세계는 인도네시아에 주목하는가'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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