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과 북한이 벌이는 '이니셜 D의 전쟁'

최초입력 2018.05.17 06:01:00
최종수정 2018.05.17 09:13:59

[한꺼풀 벗긴 글로벌 이슈-126]

北이 쓰는 'Denuclearization'

핵보유국으로서의 비핵화 의미

외부 개입 없는 주체적 처리 의지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의 'Denuclearization'

'일괄적 타결' 의미 강조한 표현

북한과 같은 단어, 다른 의미 넣어



최근 마이클 폼페이오 장관의 'Dismantlement'

구체적·물리적 핵폐기 조치 강조

핵+대량살상무기 폐기 의미한다는 분석도

핵탄두를 실을 수 있는 북한의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사진=위키피디아
▲ 핵탄두를 실을 수 있는 북한의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사진=위키피디아


요즘 미국에선 CVID 대신 PVID가 대세가 됐다. 둘 다 북한 핵 프로그램을 해결하는 방법을 일컫는 말이다. CVID는 완전하고 확인 가능하며 불가역적인 비핵화(Complete, Verifiable, Irreversible Denuclearization)를, PVID는 영구적이고 확인 가능하며 불가역적인 핵폐기(Permanent, Verifiable, Irreversible Dismantlement)를 각각 의미한다.

PVID는 지난달 신임 마이크 폼페이오 미국 국무부 장관이 새롭게 언급한 단어다. '완전한 비핵화(Complete Denuclearization)'가 '영구적인 폐기(Permanent Dismantlement)'로 바뀌었다. 외교에서는 수사가 중요하다. 한 글자만 달라져도 완전히 다른 해석과 조치를 의미할 수 있다. 그러나 마이클 폼페이오 장관은 이를 언급하며 북한 핵폐기 프로세스에 무엇이 어떻게 달라졌다는 의미인지 설명을 하지 않아 분분한 해석을 낳았다.

전문가와 언론은 첫 글자에 주목했다. 'C'가 'P'로 바뀐 데 대해 훨씬 강력해진 표현이라는 분석이 제기됐다. 완전한 비핵화 조치뿐 아니라 완전한 비핵화 상태를 영구적으로 유지하겠다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의 의지가 반영됐다는 해석이 주를 이뤘다.

상대적으로 뒤의 'D'의 변화는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D'라는 이니셜 자체도 변하지 않았을 뿐더러, 비핵화(Denuclearization)나 폐기(Dismantlement)나 결국 똑같은 방법론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가려진 'D'의 변화의 배경에는 미국과 북한이 오래 전부터 기싸움을 해온 역사가 자리잡고 있다. D를 두고 다투는 '이니셜 D'의 전쟁이다.

존 볼턴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보좌관 /사진=플리커
▲ 존 볼턴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보좌관 /사진=플리커


애초 CVID의 창시자는 존 볼턴 현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보좌관이다. 그가 조지 W 부시 행정부에서 국무부 국제안보·군축 담당 차관으로 일하던 시절 고안한 용어다. 그러나 지금의 CVID와는 약간 달랐다. 앞글자는 변화가 없었지만, 그때의 D는 'Dismantlement'였기 때문이다.

Dismantlement는 직역하면 '핵 해체'가 된다. 동결→신고→사찰→해체 절차로 이뤄진 비핵화 로드맵에서 마지막 절차에 해당한다. 핵시설에 콘크리트를 부어 완전히 불능화시키는 작업을 의미하는 것이다. 'Denuclearization'보다는 실질적이고 물리적인 조치의 의미가 두드러진다.

CVID는 2003년 5월 5일(현지시간) 국무부 대변인 정례 브리핑 답변에서 처음 언급됐고, 곧 미국 매파가 주장하는 북한 비핵화 프로세스로 자리잡았다. 그해 8월 열린 첫 6자회담에서도 이 표현이 처음 등장했다.

그러나 북한은 이 용어에 즉각 태클을 걸고 나섰다. "승전국이 패전국에 쓰는 표현"이라며 "일고의 가치도 없다"고 반발했다. 당시 핵개발에 한창이던 북한으로서는 '핵 해체'란 구체적 조치의 의미를 담은 단어를 불편하게 받아들인 것이다. 해체 작업을 위해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사찰과 미국 측 핵폐기 전문가들이 들어오는 것에 대해서도 불쾌감을 숨기지 않았다.

비난에 직면한 부시 행정부는 제3차 6자회담에서 '포괄적 비핵화(Comprehensive Denuclearization)'라는 개념을 새롭게 들고나왔다. Dismantlement를 Denuclearization으로 바꿈으로써 구체적인 조치의 의미를 희석시키고 보다 정치적인 맥락을 넣은 것이다. 북한도 이 개념을 받아들였으나, 북한이 쓰는 Denuclearization은 핵보유국으로서 외부 개입 없이 '자발적 비핵화'를 하겠다는 의미로 해석됐다.

트럼프 행정부는 부시 행정부의 뒤를 이어 최근까지 Dismantlement 대신 Denuclearization을 써왔다. 그러나 트럼프 행정부가 쓰고 있는 Denuclearization은 일괄타결식 해결을 강조하는 의미가 담긴 새로운 단어라는 해석이 제기됐다. 외교부 당국자는 "현 트럼프 정부는 일괄 타결식 해결을 주장하고 있기 때문에 모든 단계를 포괄하는 Denuclearization을 주로 언급하고 있다"고 말했다. 곧 'Dismantlement까지 포괄하는 Denuclearization'이란 의미다. 보기에만 같아보일 뿐, 북한과 트럼프 행정부는 Denuclearizaiton을 서로 명백히 다른 의도로 사용해온 것이다.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부 장관 /사진=위키피디아
▲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부 장관 /사진=위키피디아


폼페이오 장관이 최근 다시 들고 나온 Dismantlement도 단순히 과거로의 회귀가 아니라 '핵폐기+α'라는 새로운 의미를 담았다는 분석도 나온다. Denuclearization과 달리 Dismantlement에는 핵이란 의미가 없다. 핵폐기는 물론이고, 북한이 현재 가지고 있는 생화학무기 등의 대량살상무기(WMD)의 폐기까지 새롭게 조건에 추가됐다는 해석이다. 폼페이오 장관은 지난 2일 취임사에서 "우리는 영구적이고 검증 가능하며 되돌릴 수 없는 북한 WMD의 폐기(permanent, verifiable, irreversible dismantling of North Korea's WMD program)를 지체 없이 행하는 데 전념할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최진봉 성공회대 교수는 "Dismantlement에는 핵이라는 말이 없다"며 "포괄적으로 핵무기만이 아니라 생화학무기까지도 폐기라는 의미에 함께 쓰는 것이 아니냐라는 생각"이라고 말했다.

[안정훈 국제부 기자]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