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자도 공주도 없다…잔혹한 현실 만난 고전 '백조의 호수'

최초입력 2018.04.14 14:30:00
최종수정 2018.04.14 14:26:57

[더 스테이지-119]
마이클 키칸-돌란의 '백조의 호수'
고통스러운 현실 속에서 아름다움을 기워내는 수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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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자도 공주도, 그들이 사는 아름다운 왕궁도 없다. 그야말로 황폐하다. 종이박스, 비닐, 벽돌 등 무채색의 차가운 소재로 꾸며진 무대. 발레 '백조의 호수'의 아름다운 세트를 기대한 사람들의 기대를 시작부터 부숴뜨린다. 마이클 키건돌런의 '백조의 호수' 속 주인공 지미는 왕자가 아니라 홀어머니와 사는 서른여섯 살의 아일랜드 무직자다.

LG아트센터의 기획공연 마이클 키건돌런의 '백조의 호수'는 고전 발레 '백조의 호수'에 아일랜드의 설화 '리어의 아이들' 그리고 2000년에 실제 아일랜드 롱퍼드에서 일어난 '존 카티' 사건(존 카티가 주택 철거 계획에 반발해 무장한 채 경찰과 대치하다 사살당한 사건)까지 세 가지 이야기를 모티브로 만든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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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 지미는 카티처럼 정부의 주택 공영화 정책으로 아버지와의 추억이 깃든 집을 잃게 된다. 실의에 빠진 그는 호수에서 총으로 자살하려다 네 마리의 백조를 만나게 되는데, 이들은 원작의 마법사의 저주에 걸린 공주가 아니라 아일랜드의 부패한 성직자에게 성추행당한 가여운 파놀라와 그녀의 동생들이다. 작품은 정신질환과 사회적 고립, 음흉한 정치인들, 성추행을 일삼는 성직자로 가득 찬 아일랜드의 현실을 생생하게 묘사한다.

아일랜드 유명 영화배우 마이클 머피가 소녀들을 성추행하는 성직자, 부패한 정치인, 폭력적인 경찰 등 1인5역을 맡았다. 여기에 노르웨이와 아일랜드 전통음악을 기반으로 하는 3인조 현악 밴드 '슬로 무빙 클라우드'의 음악과 고전발레와는 거리가 먼 무용수들의 자연스러우면서도 독특한 움직임이 더해졌다. 연기, 노래, 무용이 합쳐진 융합극인 셈. 세 부분이 넘치거나 부족함 없이 완벽하게 어우러진다. 막이 올라가면 발가벗고 목줄을 맨 채로 염소 소리를 내고 있는 머피의 존재감이 묵직하다. 곧이어 흘러나오는 애절한 음악이 감탄을 자아내고 마지막에는 8명의 무용수들이 만들어내는 아름다운 몸동작에 감동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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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의 추악함과 고통을 고스란히 무대에 가감 없이 표현하는 데도 아름다움을 느끼게 한다. 영국의 일간지 가디언은 이 작품을 '끔찍하게 아릅답다(terrible beauty)'고 평했다. 그 말 그대로다. 쓰레기더미 속에서 반짝임을, 지옥 속에서도 희망을 키워내는 비범한 작품이다. 성추행과 그것을 발설하지 못하는 고통에 몸부림치는 백조들의 춤은 아름다워 애잔하다. 백색의 수녀복처럼 보이는 드레스를 입고, 무겁고 거대한 날개를 질질 끌고 다니는 네 마리의 백조가 무대 끝 높은 곳에 걸터앉아 있는 장면은 두고두고 잊히지 않는다.

지미와 피놀라의 파드되는 고전발레의 오데트와 지그프리트의 파드되 못지않은 감동을 자아낸다. 상처받은 존재들이 서로에게 상처 줄까 또 입을까 두려워하며 다가갔다 멀어진다. 숨죽이고 바라보게 된다. 조심스럽게 서로를 만지다 화들짝 놀라 물러섰다, 다시 용기를 내 다가가 서로의 상처를 발견하고 보듬는 이 춤은 첫눈에 반해 모든 걸 거는 동화 속 사랑만큼이나 낭만적이다.

마지막 순간, 죽은 지미와 피놀라가 부활해 모든 출연자들과 함께 백조의 깃털을 날리며 환희의 춤을 춘다. 무대와 객석에는 새하얀 깃털이 하나둘씩 떨어진다. 무용수들은 6㎏에 달하는 깃털 뭉치들을 가지고 춤을 추며 객석에 흩뿌린다. 어마어마한 깃털 폭풍이 아주 느리게 객석을 향해 다가온다. 눈보다 느리고 가볍게 떨어지는 깃털 속에서 장난스러운 라틴 리듬에 맞춰 슬로모션처럼 아주 느릿느릿 몸을 움직이는 무용수들을 보며 관객들은 깃털에 뒤덮이게 된다. 순간 눈을 뜬 채로 꿈을 꾸는 듯하다. 천진난만한 어린아이들이 베개싸움 혹은 눈싸움을 벌이는 듯하다. 새하얀 날개로 덮인 무대가 방금 펼쳐졌던 고통과 잔혹한 현실을 자취 없이 감춰버린다. 천국처럼 포근해 보이기만 한다. 키건돌런은 음울한 현실 속 사랑과 구원은 여전히 가능하다는 메시지를 전해 큰 감동을 자아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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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언론은 한 개부터 다섯 개 만점까지 리뷰어들의 평가에 따라 별을 매기는데, 사실 별 세 개만 해도 볼 만하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세계적으로 이름이 알려진 스타 아티스트들이 거의 빼놓지 않고 서는 런던 무대지만, 이름 있는 아티스트라고 해서 그들의 작품이 모두 열광적인 지지를 받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이런 가운데 키건돌런의 '백조의 호수'는 가디언을 비롯해 파이낸셜타임스, 옵서버, 이브닝 스탠더드 등 영국 주요 언론으로부터 만장일치에 가까운 열광과 함께 별점 다섯 개를 받았다.

[김연주 문화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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