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소설] 바람 끝에 서다-12

최초입력 2017.09.12 15:05:00
최종수정 2017.09.13 14:57:10

/사진=게티이미지뱅크
▲ /사진=게티이미지뱅크
[바람 끝에 서다-12] <12편 - 푸른 밤>

어스름한 저녁, 저 멀리 바다 위로 붉은 노을이 길게 드리운 풍경을 보며 비행기는 제주도에 내렸다. 서울에 두고 온 설렘이 다시 남자의 마음에서 일어났다. 여자는 평소처럼 무덤덤한 표정이었다. 어두운 기내에서도 여자는 선글라스를 끼고 있었기에 그 표정을 다 읽을 수는 없었지만, 남자는 여자가 긴장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12월의 제주도는 아직 늦가을의 정취가 남아 있었고, 바람이 세게 불 때를 빼면 그렇게 춥지 않았다. 한라산 허리를 가로지르는 도로를 달릴 즈음 두 사람은 마지막 노을이 사라지는 바다를 바라보았다. 붉게 빛나던 노을이 시나브로 찬란함을 잃어 가는 모습은 두 사람의 사랑과 닮은 것 같아 각자 아쉬운 미소를 지었다. 말하지 않았지만, 그 시간 그곳에서 남녀는 아무런 대안 없는 길을 재촉하는 나그네에 불과했다. 무엇을 예상할 수도 없고, 어떻게 하겠다는 계획도 무의미한 불확실과 미지의 시간만이 그들 앞에 놓여 있었다.

숙소는 누군가가 켜 놓은 불빛에 아담하게 빛나고 있었다. 돌담길이 앙증맞게 손님을 맞고 있었다. 주변으로는 선명하지 않았지만 감귤 나무가 집을 둘러싸고 있는 풍경이었다. 바닷가였지만 바다는 보이지 않았다. 1층에 들어서자 여자의 얼굴이 밝아졌다. 아까부터 검정 안경을 벗어 머리 위에 꽂은 채였던 여자는 숙소가 마음에 들었는지 여기저기를 바쁘게 돌아 다니며 집안을 구경했다. 하얀색 벽과 하얀색 커튼이 길게 드리운 1층은 칸막이가 없는 커다란 거실이었다. 부엌과 식탁이 연결된 한쪽 벽을 제외하고는 소파와 아기자기한 소품들이 전시된 미술관 같았다. 실내 계단으로 난 2층은 아늑했다. 천장에는 유리창을 통해 하늘을 볼 수 있도록 했고, 큼지막한 침대가 부끄럽다는 듯이 누워 있었다. 마루에 덩그러니 놓인 욕조는 홀로 외로워 보였다. 단순했지만 아늑했고, 꾸미지 않았지만 감각적인 인테리어가 두 사람의 긴장을 풀어주었다. 남자가 2층 창문을 열자 저 멀리 몇 개의 노란 불빛이 바다 위에 떠 있는 것이 보였다. 여자도 어느 새 그 옆에서 같은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싸늘한 바람이 바다로부터 불어와 두 사람에게 인사하듯 스치고 지나가자, 여자의 머리카락이 가볍게 흩날렸다. 그 모습이 예쁘다고 생각한 남자가 여자의 볼에 뽀뽀를 했다. 귓불에도 뽀뽀를 했다. 여자는 멀리 바다만 응시한 채로 가느다란 한숨을 내쉬었다. 남자는 여자의 뒤로 돌아가 두 팔을 둘러 여자를 안았다. 여자가 힘을 빼고 남자에게 기대자 남자가 여자의 목덜미에 가볍게 또 뽀뽀를 했다. 여자의 가느다란 신음소리는 남자를 더욱 흥분시켰고, 남자는 여자를 돌려 세워 입술을 포개고 제주도에서의 첫 키스를 나누었다. 키스는 진하고 달콤해서 두 사람은 시간 가는 줄 몰랐다. 키스를 멈춘 남자가 여자를 꼭 안아 주었다. 두 사람은 누군가 떼어내려고 하는 것도 아닌데 더 힘을 써 서로를 안았다. "배고파요." 여자의 한마디가 아니었으면 두 사람은 그 자리에서 무슨 사고라도 칠 뻔했다.

여자의 현실적인 말에 남자는 다시 정신을 수습한 사람처럼 "맛있는 거 먹으러 가요"라며 여자를 끌고 2층을 내려왔다. 차를 두고 두 사람은 작은 골목길을 걸어 나와 한참을 큰 길을 따라 제법 가게들이 모여 있는 곳에 다다랐다. 마산집. 남자가 여자를 안내한 곳의 이름이었다. 제주도와 어울리지 않는 낯선 이방인 같은 이름의 식당은 저녁 시간이 끝날 무렵이었지만 자리를 찾기 힘들었다. 마침 일어서는 젊은 연인의 자리를 차지한 K는 예약을 할 걸 그랬다며 멋쩍어했다. 여자는 또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자리에 앉았다. 처음처럼을 고집하던 두 사람도 오늘은 흰색 한라산을 마시기로 했다. 마산집은 두툼한 흑돼지 구이로 유명한 곳이었다. 여기저기 시끌벅적하게 연기를 피우며 연거푸 고기를 먹는 모습이 흡사 동네 잔칫집 같았다. 털보 주인이 두 사람이 먹을 고기를 준비하는 동안 한라산 한 병이 게눈 감추듯 사라졌다. 안주는 전복죽이 전부였지만, 두 사람은 소주만 있어도 최고로 행복하다는 듯이 술을 애호했다.

두 사람은 그동안의 각자의 여행담을 늘어 놓았고, 불륜에 휩싸인 감독과 여배우를 상기했다. 여자가 "영화감독과 여배우, 감독의 아내, 셋 중에서 누가 제일 불쌍하다고 생각해요?" 남자에게 물었다. "감독과 배우는 서로의 선택이었고, 아무것도 선택할 수 없었던 감독의 아내가 제일 불행한 것 아닐까요?" "아니요. 저는 여배우가 제일 불쌍하다고 생각해요. 유부남을 사랑한 젊은 여배우는 모든 걸 걸었고 제일 많이 잃을 겁니다." 앞으로 아파해야 할 시간과 고통스러운 밤이 여배우를 기다리고 있을 거라며 여자는 사랑하는 사람들은 왜 모두 아프기만한 건지 모르겠다며 사랑 참 어렵다는 식으로 대화를 이어갔다. 도톰한 흑돼지가 잘 구워졌을 즈음 한라산이 또 한 병 사라졌다. 두 사람은 서로의 결혼생활에 대해서도 스스럼 없이 말을 이어갔다. 여자는 결혼 후 아이를 가지고 나서는 남편과 지금까지 잠자리를 하지 않았다고 했고, 남자는 졸혼에 대해 동의한다고 했다. 두 사람은 점점 취해갔다. 여자는 한 번 사는 인생이라는 말을 자주 했고, 남자는 사랑이 어떻게 끝날 수가 있냐고 했다. 주변의 술 손님들이 차례로 자리를 떠서 마산집에는 젊은 연인과 털보 주인, 일을 하는 아주머니가 전부였다. 남자가 특유의 술 기운 용기를 내서 "다시 누군가를 사랑하고 싶어요" 하자, 여자는 "용기 있어요?"라고 물었다. 남자는 술이 어지간했지만 그 물음에 선뜻 대답을 하지 못했다. 여자는 기다렸다는 듯이 "쉽지 않은 일이죠" 하며 남자의 마음을 읽었다. 남자는 여자가 말한 용기의 의미가 뭘까 잠깐 생각에 잠겼다. 그 순간 남자는 여자가 피식 미소 짓는 표정을 보았다. 분위기는 약간 가라앉았지만 두 사람은 굳이 심각해지고 싶지 않았다. 지금은 제주도이고, 술에 취했고, 앞에 앉은 사람에게 서로 좋은 감정이었고, 밤 늦은 시간이었다. 식당 안은 두 사람뿐이었다. 털보 주인은 가끔 술 한잔을 건네받고 이야기도 끼어 들었지만 밤 12시가 가까워지자 문을 닫고 싶어하는 눈치였다. 남자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기가 두려웠다. 식당을 나가면 그다음에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나지 않았다. 스스로 헤쳐 나가야 하는 둘만 남겨진 시간에 대한 걱정이 앞섰다. 숙제를 끝내지 못한 초등학생이 개학을 앞둔 심정과 같았다.

귤밭을 따라 숙소로 돌아오는 길은 호젓하고, 한가로웠고, 반달이 살짝 사위를 분간할 정도로 밝았다. 여자는 헝겊으로 만든 작은 가방을 어깨를 가로질러 메고는 주머니에 손을 넣고 걷고 있었다. 남자는 여자의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었다. 조막만 한 여자의 손이 피할 길 없이 남자의 손을 반겼다. 차가웠다. 남자가 여자의 손을 만지작거리자 수줍게 온기가 주머니 속을 퍼져 나갔다. 남자가 노래를 나지막하게 불렀다. "너에게 난 해질녘 노을처럼 한 편의 아름다운 추억이 되고…." "나에게 넌 내 외롭던 지난 시간을 환하게 비춰주던 햇살이 되고 조그맣던 너의 하얀 손 위에 빛나는 보석처럼 영원의 약속이 되어…." 남녀가 듀엣으로 불렀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노래를 남자는 혼자서 여자가 들릴 만큼의 크기로 흥얼거렸다. 덜 익었지만 제법 노란색을 띤 귤들이 바람에 흔들리며 남자의 노래에 맞춰 춤을 추고, 경계를 삼아 놓은 현무암 담벼락의 돌들이 웅웅 거리며 화음을 넣었다. 여자도 그 풍경이 좋았는지 발걸음을 가볍게 옮기고 있었다. 숙소의 불빛이 눈에 들어오자 두 사람은 포옹을 했다. 시원한 바람, 살짝 내려 앉은 달빛, 탐스럽게 향기로운 귤밭. 푸른 제주도의 밤이 더욱 푸르게 두 사람을 감쌌다. 그 순간 남자는 여자에게 진심으로 가슴속에 빛나는 작은 별이 되고 싶었다.

[독고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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