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나키스트 박열 되살아나다

최초입력 2017.07.26 15:02:00
최종수정 2017.07.26 14:49:40



[비욘드 무비-170]
이준익 신작 영화 '박열'
'국뽕' '신파' 걷어낸 경쾌한 역사극
철저한 고증 돋보여


"나는 조선의 개새끼로소이다."

일제강점기를 다루고 있지만 영화 '박열'은 경쾌하고 심지어 가볍다. 지난 6월 28일 개봉한 이준익 감독의 신작 '박열'은 '국뽕'과 '신파'와는 거리가 멀다. 영화 제목이자 주인공인 박열(이제훈)이란 인물 자체가 위트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박열의 성격은 그가 만든 단체 '불령사'라는 이름에서도 추측 가능하다. 무장투쟁을 목적으로 한 비밀 결사단의 이름을 일본인들이 말 안 듣는 조선인들을 지칭했던 단어 '불령선인'에서 따와 지었다. 여기에 형무소에서 애인을 무릎에 앉혀두고 찍은 괴사진과 '나는 개새끼로소이다'라는 시까지, 지금 봐도 파격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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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 1923년 관동대지진이 발생하자 일본 내각은 민중들의 관심을 돌리기 위해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탔다는 소문을 퍼트린다. 이로 인해 6000여 명의 무고한 조선인이 학살된다. 이른바 간토대학살이다. 이어 국제사회의 비난이 두려웠던 일본은 사건을 은폐하기 위해 사건의 배후로 불령선인 박열을 지목한다.

영화 '박열'의 진짜 이야기는 바로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일본 내각의 계략을 눈치 챈 박열은 그들의 끔찍한 만행에 국제사회의 시선이 집중될 수 있도록 스스로 황태자 암살 계획을 자백한 뒤 조선 최초의 대역죄인이 되어 사형까지 무릅쓴 공판을 시작한다. 영화는 박열과 그의 연인 후미코의 재판 과정을 조명한다.

재판 과정에서 박열이 일본이 자행한 간토대학살을 논리적으로 조목조목 지적하는 부분과 후미코가 천황제의 허구성과 폭력성을 까발리는 장면은 영화의 하이라이트다. 구구절절 옳은 말이다. 그래서 통쾌하다. 당시 '박열'과 '후미코'의 이러한 활약은 아사히신문을 비롯한 당시의 일본 신문들에서 상세히 다뤘는데, 제작진은 철저한 고증을 위해 각 신문사에 연락을 취해 사건이 일어났던 날짜의 신문 기사 내용을 모두 요청해 검토하는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이 감독은 "법정에 선 박열이 일제를 준엄히 꾸짖는 말들 모두 기록에 남은 그대로"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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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익 감독과 '박열'의 첫 만남은 2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영화 '아나키스트'(2000)를 제작하던 이준익 감독은 시나리오 작업을 위해 자료 조사를 하는 과정에서 조선 독립운동의 역사를 다룬 다양한 서적에 등장하는 수많은 독립투사 가운데 '박열'이라는 인물에 주목하게 된다. 1919년 3·1운동 당시 고등학생의 신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일제의 폭압에 강한 분노를 느끼고 일본 제국주의의 심장부인 도쿄로 건너가 적극적으로 투쟁했던 청년 '박열'에게 매료된 것이다.

영화의 매력은 곧 '박열'이란 인물이 가진 매력이다. 아나키스트인 그의 적은 '일본'이 아니라 부당한 폭력을 행사하는 권력이다. "일본 민중은 나의 적이 아니다"라는 영화 속 대사가 보여주는 그의 저항정신은 평등이라는 보편적 가치에 기반을 두고 있다. 이준익 감독은 "박열이라는 인물 자체가 아나키스트로서 탈국가적이고 탈민족적이었다. 인간 대 인간으로서의 온전한 삶의 가치관을 추구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쁜 일본인' '억울하지만, 선량한 조선인'이라는 단순한 이분법적인 사고로 영화를 그려내고 싶지 않았다"고 연출을 시작했던 당시를 회상했다. 이처럼 영화는 일본인은 나쁘고 조선인은 착하다는 이분법적 구조를 사용하지 않는다. 동료였지만 배신하는 조선인도 있고, 철저히 일본인이었지만 어느 순간 박열과 후미코에게 동조하는 이들도 있다. 선악을 출신 국가로 나누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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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열 역을 맡은 이제훈은 남루한 차림부터 일본어 대사, 호기로운 눈빛, 폭발적인 발성까지 데뷔 이래 가장 파격적인 변신을 시도했다. "연기 인생에 터닝 포인트가 될 것"이라고 자부할 만하다. '동주'에서의 쿠미 역 이후 이준익 감독의 뮤즈가 된 최서희는 이번 후미코 역으로 또 한 번 손색없는 일본인 연기를 펼쳤다. 완벽한 일본어는 물론 어눌한 한국어 발음으로 당당하면서도 익살스러운 면모를 두루두루 소화했다.

다만 '후미코'가 아쉽다. 후미코는 조선인과 일본의 하층민이 핍박받는 모습을 보고 아나키스트이자 페미니스트로 성장한 인물이다. 그녀는 일본인이면서도 천황제를 맹렬히 비판했던, 여성이었음에도 신진 사상에 누구보다 깨어 있던 지식인이었다. 시대가 낳을 수 있는 가장 입체적인 인물이다. 한데, 영화가 후미코의 매력을 다 담아내지 못한 것 같다. 박열과 그녀가 사상적으로 논쟁하는 부분이 있었다면 어땠을까. 심문 과정에서 아무것도 알지 못한 채 '박열과 함께 했다'고 무작정 발설하는 모습은 못내 아쉬움이 남는다. 최근 인터넷상에 뒤늦게 후미코의 삶을 되돌아보는 콘텐츠가 늘고 있단다. 이 역시 아쉬움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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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주 문화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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