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책세상] 성폭력 피해-가해자 ‘용서’ 앞에 마주서다

최초입력 2018.01.08 15:24:14


수많은 테드(TED) 강연 중 샌프란시스코에서 진행되었던 한 강연은 유례없는 것이었다. 성폭력 생존자 여성과 가해자 남성이 함께 단상에 올랐기 때문이다. 강연 주제는 ‘강간과 화해에 관한 우리의 이야기’였다. 생존자 토르디스 엘바와 가해자 톰 스트레인저, 그들의 이야기는 1년간 415만이라는 조회수를 기록하며 책으로 출간되기에 이르렀다.

1996년 16살이었던 아이슬란드 소녀 토르디스는 교환학생으로 호주에서 온 소년 톰에게 강간당하고 버림받는다. 당시 그녀는 술에 취해 있었고, 톰과는 연인 사이였기 때문에 스스로도 강간임을 인식하지 못했다. 그러나 9년 동안 자해, 알코올 의존 등으로 고통 받으며 트라우마에 시달렸고, 마지막 절규인 양 가해자에게 메일을 보낸다.

당시 1년의 교환학생이 끝나고 호주로 돌아온 소년은 죄책감에 시달리며 더욱 자신이 저지른 일을 잊고 부인하며 살아간다. 그러나 9년 후 한 통의 메일을 받고 얼음처럼 굳어버린다. 자신이 한 일이 ‘강간’이라고 명확하게 지칭되자 과거의 사건과 기억들이 떠올랐다. 그는 옛 연인이자 피해자인 토르디스의 요구에 응하며 8년간 300통의 메일을 주고받는다. 그리고 두 사람은 일주일동안 직접 대면하는 용기를 보여준다.

이들의 이야기는 <용서의 나라>라는 책으로도 출간이 됐는데, 제목이 뜻하는 용서의 나라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케이프타운을 의미한다. 케이프타운은 ‘강간의 도시’라 불릴 만큼 성범죄율이 높은 도시 중 하나이면서도 넬슨 만델라의 용서로 상징되는 도시다. 이렇게 역설적이고 상징적인 도시에서 두 사람은 16년 만에 재회하여 일주일동안 용서와 화해로 향하는 대화를 나눈다.

성범죄 역사에서 생존자와 가해자 양측이 자발적으로 소통하고 대화한 사례는 흔치 않을 뿐만 아니라, 그것이 실제로 진정한 참회와 용서로 이어진 사례도 극히 드물다. 두 사람은 자신들의 사례가 결코 정답이 아니라고 강조한다. 그들의 이야기는 성폭력이 끔찍한 범죄임에도 불구하고 전 세계에서 일상적으로 일어난다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또한 ‘강간을 당하는 원인은 피해자에게 있다’는 식의 편견들이 얼마나 폭력적일 수 있는지 지적한다.

생존자가 ‘용서’를 택한 이유도 인상적이다. 토르디스는 용서를 이야기하는 대목에서 이렇게 말한다. “내가 하려는 용서는 숫돌에서 나온 서슬 퍼런 것이고 속박을 끊기 위한 것이다.” 그녀의 용서는 무조건적이거나 종교적인 용서나 사건을 잊고 덮으려는 행동이 아니라, 트라우마가 자신의 인생을 망가뜨리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가해자 역시 자신의 과오를 제대로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같은 범죄가 재발하지 않도록 세상을 바꿔나가는 일에 적극적으로 협력하는 것까지 ‘용서를 받을 자격’을 갖추려 노력한다. 그들의 이야기는 강간이 사라지지 않는 오늘날의 현실을 일깨우면서, 남녀 모두가 깨어 있는 의식으로 이 문제에 동참해야 한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MK스타일 김석일 기자 / 도움말 : 토르디스 엘바, 톰 스트레인저 (‘용서의 나라’ 저자) / 디자인 : 책세상]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