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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음악세상] 자메이카 레게음악 전설이 된 ‘밥 말리’

최초입력 2018.01.09 16:55:52
1970년대의 자메이카는 밥 말리(Bob Marley)라는 전설적인 뮤지션의 탄생으로 온 국민이 위안을 받은 시기였다. 밥 말리는 1945년 자메이카의 수도 킹스턴에 속한 작은 마을인 트렌치타운에서 영국계 백인 아버지와 현지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당시의 트렌치타운은 자메이카의 불안정한 정치가 고스란히 드러나던 현장이었다.

자메이카는 오랜 기간 영국의 식민지로 있다가 독립을 했지만, 사회주의 노선인 인민국가당과 친미 성향의 자메이카 노동당이 첨예하게 대립해 피바람이 불었다. 그가 사는 트렌치타운에서도 연일 시위가 있었고, 시위에 참가했다가 죽거나 사라지는 사람도 있었다.

밥 말리는 울음으로 감정을 표현하면서 성장했고, 눈물이 인간에게 깨우침과 예술을 선사한다고 믿었다. / Pixabay


“세상의 모든 인간은 울음으로 태어났으며, 울음으로 감정을 표현하면서 성장한다”고 밥 말리는 강조했다. 또한 눈물은 인간에게 깨우침을 안겨주고 예술을 선사한다고 믿었다. 그래서 그는 밴드를 결성할 때도 그 이름을 울부짖는 사람들을 뜻하는 ‘웨일러스’라고 불렀다.

밥 말리의 노래는 수많은 자메이카인들을 위로했다. 그의 노래는 어지러운 정계를 비판하고 소박한 민중의 삶을 대변했다. 1973년에는 ‘I Shot The Sheriff'를 발표했는데, 이듬해 미국의 기타리스트 에릭 크랩튼이 원곡을 해석해 빌보드 1위를 기록하면서 세계적으로 유명세를 떨치기 시작했다.

그는 평화를 노래했지만, 그가 노래하는 현장은 결코 평화롭지 못했다. 결국 1976년 그의 매니저와 아내가 총상을 입으면서 눈앞에서 삶의 위협을 느끼고 망명을 택해 영국으로 건너간다. 자메이카의 상황은 시간이 흐를수록 나빠져 갔고, 정치적인 대립은 걷잡을 수 없이 격화되며 연일 소요가 터졌다.

마침내 자메이카 양측 정당의 무력단체 대표들이 휴전을 약속하는 평화협상을 하자, 정부는 이를 대대적으로 선언하기 위해 내쫓다시피 했던 밥 말리를 다시 부른다. 그렇게 그는 고국의 부름을 받고 돌아오고, 자메이카 역사에 길이 남을 만한 공연이 기획된다.

밥 말리의 ‘사랑과 평화의 콘서트’ 공연은 자메이카에 내분이 끝났고, 마침내 평화로운 세상을 찾았다는 선언의 행사였다. 무대를 통해 인민국가당의 마이클 맨리와 노동당의 에드워드 시가가 함께 손을 잡는 그림 같은 순간도 연출됐다.

레게풍의 색상과 음악, 패션은 종교적인 신앙의 내용을 담고 있다. / Pixabay


한편으로 밥 말리는 유명한 전도사이기도 했다. 그의 종교는 라스타파리아니즘이라 불리는데, 아프리카 부족주의와 민족주의가 결합된 종교로 성서의 새로운 해석이 사상의 기반이다. 어릴 적부터 신자였던 밥 말리가 10대 시절 길에서 음악을 시작했을 때, 삶을 이루고 있던 종교가 음악에 스며든 것은 당연했다. 음악은 익숙한 아프리카 리듬에서 출발했고, 신도들처럼 알록달록한 모자를 쓰고 녹색, 빨간색, 노란색, 검은색이 강렬한 원색의 옷과 액세서리로 신앙의 내용을 담았다.

머리를 자르지 않고 길게 늘어뜨린 ‘드래드’ 또한 신체를 소중히 여기라는 종교적 지시를 따른 것이다. 이런 사상을 담은 그의 노래는 자국의 선풍적인 호응을 넘어 1970년대 중반부터 세계로 뻗어나갔다. 밴드 웨일러스는 현재까지 미국 투어를 완수한 자메이카의 유일한 뮤지션으로 기록되고 있다.

그가 표방했던 장르인 레게는 요즘은 여름에 즐기는 가벼운 음악으로 통하지만, 여기엔 그들의 종교와 사상이 담겨 있다. 그렇지만 특수한 종교 활동만으로는 의미를 한정할 수 없는 인류의 이상적인 미래가 담겨져 있다. 36살의 나이로 밥 말리가 세상을 등진 후, 그의 생일인 2월 6일은 자메이카의 국경일로 지정이 됐다.

[MK스타일 김석일 기자 / 도움말 : 이민희 (‘왜 그 이야기는 음악이 되었을까’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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