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림은 사랑입니다

최초입력 2020.10.14 14:41:26
최종수정 2020.10.14 16:52:06
ㅡ사진 좀 찍어주세요

봄볕같은 청춘남녀가 수줍게 카메라를 내민다. 핸드폰이 아닌 코닥 일회용 필름 카메라. 요즘도 이게 나오는구나. 신기하고 귀엽다.

ㅡ딱 한장 남았어요.

갑자기 사명감에 불탄다. 인생 사진 남겨줄게!

ㅡ둘이 마주봐요! 자연스럽게 눈 마주치고 웃어봐요. 옳지, 잘한다!

카메라에 눈을 바짝 댄다. 프레임 속 세상. 아름다운 가을 하늘과 들판 가득 춤추는 핑크뮬리, 그 속에서 둘이 웃는다.
핑크뮬리 아스라한 분홍도 그들보다 어여쁘지 않다. 티끌없이 청명한 파랑하늘도 사랑보다 다정하지 않고. 두사람 눈웃음에 중심을 잘 맞추고 옛날식으로 하나둘셋 공들여 셔터를 눌렀다.

ㅡ현상될 때까지 기다려야겠네요!

ㅡ네. 기다리는 시간이 너무 좋아요.

둘이의 얼굴이 가을 햇살보다 빛난다. 시간을 나눠갖고 있구나. 사랑을 키워가고 있구나. 사랑은 기다릴줄 아는 것이니까. 예쁜 사랑 하세요! 주책떨고 싶은걸 참았다.

우리는 언제부터 기다리는 게 힘들어졌을까. 핸드폰의 보급 이후에 모든게 빠르고 편해졌지만, 감정은 격해졌고 분노도 쉬워졌다. 내가 보낸 문장에 당신이 바로 답하지 않으면 짜증부터 난다. 읽고 씹히기라도 하면 분노 조절 잘 안되고. 사람 사이는 치밀해졌고 거리는 초연결 됐다. 어쩌면 기다림이 필요없는 시대다. 당신이 어디만큼 왔는지 다 보이고, 짜장면이 얼만큼 불었는지 다 알 수 있다. 기다림 대신 효율적으로 시간을 쓸 수 있어 좋은건가. 그래도 왜 오래 기다렸던 그 때가 그립지. 설레며 기다릴 줄 알던 우리가 그립지.

오래 기다린 전시를 만났다. 지그시 바라볼 전시를 만났다.

최영진 작가의 '거울같은 바다에 숭어가 뛰어놀았네展'. 작가는 20년이 넘게 서해 바다를 찍어왔다. 오래 바라본다는 건 사랑인데 이제 대상은 사라지고 사진이 여기 남았다. 새만금 사업으로 바다의 지형은 변했다. 서서히 사라져가는 바다를 작가는 오래도록 지켜봤다. 오래 한 풍경을 바라보는 것, 오래 한 사람을 기다리는 것, 오래 한 마음을 간직하는 것, 사랑이다. 애잔하고 따뜻한 것이고 어렵고 귀한 것이다. 바다를 가만히 들여다봤다. 바다의 전설과 갯벌 속의 서사, 무구한 이야기들이 출렁인다. 좀 더 가까이 다가가본다. 높이 나는 새와 멀리 가는 어부가 아련하다. 우주같은 바다가 속속들이 드러난다.

사진이 감동적인 것은 그것이 실재했다는 것과 기다림 때문이다. 순간을 포착하려고 얼마나 오래 숨을 참는걸까. 작품 속에 명징한 기다림이 확연하므로. 렌즈 너머의 심연의 눈은 오래 기다린만큼 깊어간다. 작가는 형형해진 눈빛으로 가장 마음에 가까운 풍경을 길어올린다. 지난한 기다림을 알기에 보는 이도 가만한 응시로 마음을 포개본다. 불현듯 애틋한 서정이 차오른다. 오래 기다리면 그가 오는걸까, 좋은 날이 오는걸까.

아름다운 것들 앞에서 우린 사진을 찍느라 여념이 없다. 여러장 마구 찍고 지우면 그만이다. 즉흥은 미덕이 됐고 지금만 살게 됐다. 돌이켜보면 마음이 깊어갔던 순간은 끝없이 기다리던 순간이다. 필름을 맡기고 기다리던 시간, 기억을 소중히 간직하던 시간, 간절한 소망이 스미던 시간, 신에게 말을 걸던 시간. 눈빛이 깊어가며 가을빛을 띄던 시간.

기다림도 배워야 한다. 그럴려고 최영진 작가님의 바다를 한 점 품고 왔다. 서재에 걸어두고 마주할 때마다 오래 기다리던 마음을 기억하려고. 깊게 바라보던 마음을 닮아가려고. 자꾸 보다보면 닮아간다. 기다리고 그리워하면 더 사랑하게 된다.

오늘부터 내 마음은 바다다.

Geojeon2005 23×31 최영진



임지영 아트위드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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