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시 쓸까요!

최초입력 2021.02.18 10:45:25
최종수정 2021.02.18 10:50:08

직접 촬영



시를 배운다. 두어 달 됐다. 사뭇 경직된 머리에 운율이 스민다. 심드렁 앙가슴이 물기 촉촉해진다. 병이 길고 생은 가팔라 모두가 허덕이는 때에 무슨 얼어죽을 시냐고 흘기는 사람도 있겠지. 현실감 없는 극단적 낭만주의자라 호도할 수도 있을 테고. 일견 틀린 말은 아니기에 이견도 담아 듣는다.
하지만 배울수록 시는 낭만이 아니다. 지극히 현실이다. 뜨거운 반성이고 치열한 제안이다.

그 나이에 뭘 또 배워? 이 말을 늘 듣고 살았다. 나에게 배움이란 지식의 축적이 아니다. 생경함에 나를 밀어넣고 영감을 발견하는 자발적 선택적 고오생이랄까. 그런데 그 고생 뒤에 낙이 왔다. 돈도 명예도 사랑도 아니지만 구체적 기쁨이 감각됐다. 햇살의 향을 킁킁 맡게 됐고 초록의 맛을 쌉싸래하게 감지했지. 당신의 옆모습을 오래 바라봤고 나의 뒤꿈치를 가만히 매만졌고. 시를 쓰면서! 언어를 어루만지면서! 마음 젤 깊은데 우물을 팠다. 단어 하나씩 길어올렸고 마침표는 빠뜨려도 좋았다.

써 온 시는 모두들 소리내어 읽었다. 느닷없는 고백이거나 말할 수 없는 비밀처럼 은밀하게 들렸다. 함께 쓰는 우리는 심장 맨아래칸을 열어둔 것만 같았다. 부끄럽지만 후련한 단어들, 쓸쓸하지만 다정한 심상이 빼곡했다. 수업을 이끄시는 시인 김명리 선생님은 우리들의 우물을 하나씩 가만히 들여다봤다. 쓸쓸한 유년의 슬픔을 어루만졌고, 당돌한 중년의 도발을 응원했지. 김명리 선생님 그 자신도 거친 생의 꽃밭을 흑발과 맨발로 걸어온 모습이었다. 여전히 그 한가운데 서있는 양 기꺼이 위태롭고 아름다웠다. 김명리 선생님 시 중 마음으로 들어 온 시가 있다. <비밀을 말하려는 순간>           

 비밀을 말하려는 순간 우리는 이 세상에서 가장 상냥한 이웃, 마음의 한 세기가 포말처럼 부풀었다 사라지는 겨울 저물녘에 우리는 만났네 우리는 청맹과니와도 같은 눈사람의 눈, 안감이 자꾸만 비어져 나오는 새하얀 물결무늬 정장차림으로 한번도 가 본 적 없는 사막의 광활, 서로의 숯검정이 동공에 되비치는 야릇한 눈석임물에 대하여 얘기했었네 비밀을 말하려는 순간 사물이 되어버리는 괴로움, 흉금에 가득한 고통에 대해서는 말하지 못했네 눈꽃 핀 시간의 둘레가 아직은 형광 빛으로 펼쳐 있고 서서히 녹아내리기 시작하는 눈사람, 우리는 눈사람의 눈속의 눈물, 한려수도 섬들처럼 반짝이며 떠있는 청회색 구름들 <<김명리, 「제비꽃 꽃잎 속」, 서정시학>>

우리는 비밀을 말할 수 없다. 쉽게 고백할 수 없지. 세상 상냥한 이웃일수록 돌아서는 속도는 빛과 같고, 털어놓은 흉금은 서둘러 돌아오는 흉기가 되기 십상. 그러니 눈사람 같은 우리, 그 눈속의 눈물 같은 우리. 온전한 존재이면서 동시에 그것을 파괴하는 카르마를 어찌할까. 말할 수 없다고 오직 침묵하고 고백할 수 없다며 냉담할까.

하여 시를 배운다. 함께 쓰고 읽고 느껴본다. 다 큰 어른인 줄 알았는데 덜 여문 아이가 튀어나온다. 언 땅 틈으로 설렘이 톡, 봄의 싹을 틔운다. 물기없는 일상을 뚫고 흠씬 젖은 단어를 길어올린다. 내일의 나는 조금 더 괜찮아질 것 같다. 나아질 것만 같아. 생이 유정해지는 이토록 좋은 방법이라니. 우리 모두 시를 쓰고 삽시다! 선동하고 싶다. 굳이 배우지 않아도 내 인생의 시를 쓰면서 살 수 있지. 오늘 잠깐 하늘을 올려다봤다면, 빌딩 사이 아슬하게 걸린 초생달을 보며 슬며시 웃었다면, 당신과 즐긴 오후의 홍차가 영원이길 잠시라도 바랐다면, 이미 그대 삶 속엔 시가 있는 것이다. 스쳐 지나가는 순간을 낚아채 받아쓰기 하면 되는 것.

굳이 왜 써야 하냐건 웃지요.

임지영 우버객원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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