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가 닳도록 스페인어] 포도알과 함께하는 스페인의 12월 31일

최초입력 2018.01.02 17:31:02
최종수정 2018.01.02 17:31:43
어린시절 12월 31일이 되면 가족들과 TV앞에 모여서 그 해의 가요대전, 연기대상 시상식 등을 보며 올해는 누가 대상을 탈지 맞춰보곤 했던 기억이 난다. 그날 잠을 자면 눈썹이 하얗게 된다는 어른들 말에 동생과 잠들지 않으려고 아등바등대기도 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12시로 넘어갈 때 제야의 종소리를 꼭 들어야만 한해가 잘 마무리 되고 새해에 좋은 일이 생길 것만 같아 안심이 되었던 것 같다.

사진:픽사베이



한 해의 마지막 날, 우리나라에서는 보신각 타종행사에 참여하기 위해 서울 광화문 광장에 많은 인파가 몰리듯이 스페인 마드리드의 태양의 문(Puerta del Sol), 이른바 솔 광장에는 ‘도쎄 깜빠나다스(Doce campanadas)’를 함께하기 위한 많은 사람들이 모인다. Doce campanadas는 스페인어로 숫자 12를 뜻하는 ‘doce’와 종소리를 뜻하는 ‘campanadas’가 합쳐진 말인데 묵은해를 보내고 새해로 넘어가는 자정에 행해지는 타종행사이다. 한국에서 제야의 종소리가 방송을 통해 전국에 울려 퍼지는 것처럼 스페인에서도 매년 이 행사가 방송을 통해 전해진다.

그런데 이때 방송을 전하는 사회자들의 손에, 솔 광장에 모인 사람들의 손에, 또 가정에서 TV를 통해 행사를 바라보는 시청자들에 손에 무언가 하나씩 들려있다. 바로 12개의 포도알(doce uvas)이 들어있는 컵이다. 타종이 시작되면 종소리에 맞춰 이 포도를 다 먹어야만 하는데, 종이 한번 칠 때마다 포도알 한 알을 먹어야 하는 시스템으로 12번의 종이 끝나는 시점에 12알의 포도알을 모두 먹으면 새해에 행운이 온다고 믿는다. 기를 쓰고 포도알을 다 먹은 뒤에, 함께 샴페인(champán) 잔을 부딪히며 새로운 해가 왔음을 축하하는 의미로 서로의 볼에 입맞춤을 하는 dos besos(도스 베소스)를 나누고 스페인어로 ‘즐거운 새해’를 뜻하는 ¡Feliz Año Nuevo!(펠리스 아뇨 누에보)를 외친다.

사진: 자체촬영



지난 칼럼에서 크리스마스 이브를 스페인어로 Nochebuena(노체부에나), 즉 좋은밤이라고 부른다고 한바 있다. 이 Doce campanadas가 행해지는 12월의 마지막 밤은 그렇다면 스페인어로 뭐라고 할까? 그렇다. ‘늙은, 오래된’의 뜻을 가진 형용사 vieja를 붙여 Nochevieja(노체비에하)라고 부른다. 그 해의 가장 늙고 오래된 밤이라는 뜻이다.

나 역시 스페인 유학시절 Nochevieja를 친구들과 보냈다. ‘여명, 새벽’을 뜻하는 예쁜 이름의 Alba(알바)라는 친구가 자신의 집에서 fiesta(피에스타: 파티)를 열어 맛있는 저녁식사를 준비해 주었고, 우리는 수다도 떨고 게임도 하며 놀다가 12시가 되기 30분 전쯤부터 TV를 틀었다. 다들 미리 씻어놓은 청포도가 들어있는 컵을 하나씩 나눠 받았는데, 친구들이 약속이나 한 것처럼 포도 껍질을 다 벗기기 시작했다, 나만 빼고. 왜 껍질을 벗기냐고 묻자 껍질이 없어야 종소리에 맞춰 포도알을 먹기가 편하다고 했다.

이 글을 읽고 있을 나의 학생들 중 일부는 연말에 나와 함께 Doce campanadas를 해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12알의 포도를 먹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직접 해봐서 안다. 학생들이 새해부터 좌절하지 않길 바라는 마음에 보통 작은 포도알을 준비해 주기는 하지만, 종소리에 맞춰 먹으려다보면 포도알 파편이 입 밖으로 튀어나오기도 하고 침이 흐르기도 하고, 정말 쉽지 않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보면, 꼭 포도를 껍질 채 씹어 먹어야 한다는 법이 어디 쓰여 있는 것은 아니니 새해에 자신에게 꼭 행운이 올 수 있도록, 먹기 좋게 포도알을 준비해 놓은 나의 스페인 친구들의 노력이 의미있게 다가왔다.

물론 요령 같아 보일 수 있겠지만, 무방비 상태로 껍질 채 포도를 전투적으로 집어 삼키려 했었던 나로서는 상상도 못했던 일이기 때문이다. 행운을 잡기 위해서, 적어도 뒤늦게 자신이 할 수 있었던 것은 없었는지 후회하지 않기 위해, 최소한의 것이라도 해보는 노력으로 보였다고 하면 너무나 거창할까? 뒤늦게서야 나 역시도 포도 껍질을 하나하나 다 까서 알맹이만 들어있는 포도 컵을 들고 Doce campanadas에 맞춰 행운의 포도알을 모두 먹는데 성공했다. 가족들 없이 처음으로 먼 타지에서 보낸 12월 31일이었지만 의미있는 이벤트, 친구들과 나눈 덕담과 함께 따뜻했던 날로 기억된다.

친구들, 가족들, 직장동료들과 함께하는 송년회로 연일 바쁠 시즌이다. 좋은 사람들과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한해를 마무리하는 와중에 하나의 이색적인 이벤트로 Doce campanadas를 떠올려주면 좋겠다. 1월부터 12월까지의 행운을 담은 포도알 먹기를 직접 해보지는 못하더라도 다음해의 나의 소망과 계획은 무엇인지, 한 알 한 알 포도알을 먹는 기분으로 곱씹어보면 보다 계획적인 2018년을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

[곽은미/마르가 스페인어 강사]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