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AI도 대체할 수 없는 남과 여의 시너지 `

최초입력 2021.02.01 10:16:26
최종수정 2021.02.01 10:40:32

사진 출처: 영화 '만추'의 한 장면



1. 50만년 동안 전승된 코드(Code)

현생 인류의 역사가 50만년이라고 들었다. 호모 사피엔스. 우리가 영어로 휴먼 비잉(Human Being) 즉 인류(人類)라고 부르는 존재 말이다. 얼마 전 이어령 박사가 모 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모든 인류의 나이는 우주의 나이와 같다고 했다. 우리 부모님의 부모님의 부모님을 계속 타고 올라가서 초기 원시 우주의 성분까지 올라가면 나이는 36억년 정도라고 하시더라.

36억 살이든 50만 살이든 우리가 지금 이 순간 21세기의 공기와 물을 마실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남과 여 때문이다. 그 오랜 시간 남과 여가 서로에게 애틋함을 느끼며 사랑을 나눈 결과물이 바로 우리다.


종족 번식이란 생물학적 의미를 떠나, 남녀간의 사랑이란 감정에는 우리가 알 수 없는 코드가 분명이 있을 것이다. 그것은 해독되지 않아도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우리 스스로가 그저 마음으로 태어나면서 알게 된 것이다. – 엠마누엘 칸트가 말한 오성(悟性)처럼. 하지만 정확이 그것이 어떻게 만들어져서 작동하는지 우리는 아직도 잘 모른다 .

2. 모성에 대한 동경

이집트 피라미드가 생긴 역사가 지금으로부터 최대 5천년 전이라고 한다. 피라미드의 용도는 많은 사람들이 여러 가지 이야기를 했다. 하지만 한가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용도는 그 당시 인간들이나 지금의 인간들이 늘 가진 궁금증의 발로는 확실하다. 바로 ‘나는 어디에서 왔을까’라는 궁금증 말이다. 고대인들은 인류가 별에서 왔다고 믿었다고 한다. 한국인을 비롯한 동양인은 북두칠성(플레이아데스 성단)에서 왔다고.

그래서 예전에 인간은 죽음에 가까워 질 수록 하늘에 가까워지고 싶어지는 것 같다. 피라미드를 짓고 죽은 파라오뿐 아니라 요즘까지도 분당에서부터 보이는 저 높은 ‘L’ 타워를 짓고 가신 모 그룹 회장님처럼 말이다. 이어령 박사는 하늘이 아니라 우주를 말하셨으니 더 차원이 높으신 듯. 결국 인간이 가진 가장 큰 동경의 근원은 내가 어디서 왔는지 그리고 어디로 가는지 인 것. 결국 모성(母性)이다. 단순이 날 낳아주신 어머니를 넘어서 날 현실에 있게 해준 프로세스 말이다.

3. 인간성(人間性)에 대한 의무(義務)감

리들리 스콧의 영화 프로메테우스를 보면 마이클 패스벤더가 열연한 AI(이름 데이빗)가 인간이 동면 중인 거대한 우주선에서 혼자 깨어, 영국의 거장 데이빗 린 감독의 영화 아리비아의 로렌스를 보는 장면이 나온다. 그 AI는 영화에 흠뻑 몰입을 하면서 인간을 배우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영화가 끝날 때까지 데이빗은 결국 인간이 왜 인간에 대한 의무감을 가지는 지 그리고 왜 자기희생을 하는지를 이해하지 못한다. 인간성에 대한 비밀 또한 풀지 못한다. 그저 그가 심취한 영화의 주인공 로렌스(피터 오툴)가 자신과 비슷한 외모(금발머리 등)를 가졌다는 것 외에는 인간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과학적으로는 인간의 존엄성 그리고 자유와 평등의 원칙인 민주주의는 절대 설명이 안 되는 원칙이다. 물론 자본주의적으로도 마찬가지. 돈의 논리로 인간의 존엄성이란 그저 기업의 상품 소비의 강력한 촉매제일 뿐이니 말이다. 그 인간 그 자체로서의 의무감을 촉발시키는 원초적 프로세스의 시작이 바로 ‘남(男)과 여(女)’이다.

4. 유한한 인생이 주는 허무(虛無)함의 위로(慰勞)

예전 추억의 만화 은하철도 999의 철이는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 안드로메다행 999호를 탄다. 불우했던 자신의 어린 시절을 일소하고 영원한 삶을 살 수 있는 기계인간이 되기 위해서 말이다. 내가 10살 정도였던 1980년대에 본 만화인데, 당시에 그 만화를 볼 때는 영원한 삶이란 것이 그 다시 매력적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아직 나에게 남은 인생도 너무나 길어 보였기 때문에. 정말 철이가 얻고 싶어한 그 영원한 인생처럼 말이다.

하지만 세월이 조금만 지나면서 거짓말처럼 죽음이란 것은 이제 저 너머에 가까이 보이기 시작한다. 끝 말이다. 그 끝이 주는 허망함에서 우리를 탈출시켜줄 것이 있다. 내면(內面)의 새로움과 피안(彼岸)의 신비감. 바로 남과 여이다. 남과 여는 서로가 서로에게 이미 무한한 우주와 같이 다르고 또 신비하기 때문이다.

어떤 이유든 무엇 때문이든, 남자가 여자를 여자가 남자를 궁금해 하지 않는 순간 인간은 마지막으로 AI와 차별화 시켜줄 인간성 즉 바닷가에서 조개껍데기를 줍는 어린아이의 호기심을 잃게 될 것이다. 유한한 인생이 주는 그 허무함을 막아낼 수 있는 방패. ‘남과 여’야 말로 인간이 저 허무함에서 자신을 온전히 지켜내게 해줄 우리에게 얼마 안 남은 따듯한 온기(溫器)인 것이다.

정민우 우버객원기자 [듀오 회원관리부 총괄 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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