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남은 청담, 강북은 한남’ 굳어진 명품거리 공식

    2021년 07월 제 130호

  • 이탈리아의 럭셔리 브랜드 ‘구찌(Gucci)’가 지난 5월 29일 서울 한남동에 새로운 플래그십 스토어 ‘구찌 가옥(GUCCI GAOK)’을 개장했다. 이곳은 올해 창립 100주년을 맞은 구찌의 국내 두 번째 매장이자 서울 강북 지역의 첫 플래그십 스토어다. 1998년 청담동에 국내 1호 매장을 연 이후 23년 만에 마련한 단독 매장이기도 하다. 청담동 매장은 리뉴얼 공사를 앞두고 있어 당분간은 한남동 매장이 국내에서 운영되는 유일한 구찌 매장이 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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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남동 꼼데가르송길. 사진 류준희 기자


    4층 규모로 마련된 구찌 가옥은 한국 전통 주택을 의미하는 ‘가옥(家屋)’에서 공식 명칭을 착안했다. ‘집’이 주는 한국 고유의 환대 문화를 담아 방문객들이 편안하게 쉬어갈 수 있는 공간을 표방하고 있다.

    건물의 거대한 외관 파사드(Facade·건축물의 주된 출입구가 있는 정면)는 스테인리스 스틸 와이어로 작업하는 조각가 박승모와 협업했다. 상상의 숲에서 영감을 얻은 ‘환(幻·헛보임)’을 주제로 한 작품이다. 실재와 허상의 경계가 무너지는 찰나를 와이어의 중첩을 통한 명암 대비로 표현했다. 숲과 나무를 모티브로 인간의 의지 없이는 사라져 버릴 수 있는 환경의 소중함을 담았다. 파사드 작품은 낮에는 자연스럽게 드리우는 빛과 그림자가 어우러져 멋스럽다. 해가 지면 시시각각 바뀌는 조명이 더해져 웅장한 느낌이다. 구찌 측은 “계절별로 파사드의 조명을 달리해 크리스마스, 새해 등 특별한 시즌에는 테마가 있는 컬러를 선사할 예정”이라며 “이 지역의 랜드마크로 아름다운 볼거리도 함께 제공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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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남동 구찌 가옥
    ▶내·외부 전 층에 걸쳐 어우러진 건축미, 팝 스타일의 인테리어

    내부로 들어서면 건물 외관과는 전혀 다른 공간을 만나게 된다. 메탈릭한 타일과 독특한 조명이 어우러져 활기 넘치는 ‘팝’ 스타일의 감성을 완성했다. 각 층을 관통하는 나선형 계단을 오르면 층층마다 새로운 디스플레이가 펼쳐진다. 마치 1970년대 클럽의 감성을 옮겨놓은 듯한 다채로운 조명과 패브릭 소파 등 클래식한 가구들이 대비되며 그 시절 화려함을 떠올리게 한다. 1층부터 4층까지 열린 공간으로 구성된 구찌 가옥은 여성과 남성 레디-투-웨어를 비롯해 핸드백, 러기지, 레더 소품, 슈즈, 주얼리, 액세서리, 구찌 데코(Gucci Decor)까지 구찌의 전 상품을 만나볼 수 있다. 국내 구찌 매장에선 처음으로 프리미엄 파인 주얼리와 테이블 웨어도 만나볼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잠깐, 구찌는 너른 서울 하늘 아래 왜 굳이 한남동을 선택한 걸까.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그대로 구찌 측에 물었더니 장황한 답이 돌아왔다.

    “구찌 가옥이 자리 잡은 이태원은 조선시대부터 수도 한양으로 통하는 길목으로 역사적으로 오랫동안 문화의 교차로 역할을 해왔습니다. 생동감 넘치면서도 다양성이 공존하는 이태원만의 감성은 전 세계 사람들을 매료시키며 한국 문화의 다채로움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공간이 되어 왔습니다. 구찌 가옥의 이태원 오픈은 이러한 이태원의 문화적 전통과 자유로움에 대한 오마주(Homage·존경)이자, 구찌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알레산드로 미켈레의 자기표현과 개성을 중시하는 정신과도 맞닿아 있습니다.”

    다시 읽어보면 어디 하나 틀리거나 흠잡을 데 없지만 생각보다 지루하고 밋밋한 답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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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활기 넘치는 ‘팝’ 스타일 감성을 표현한 메탈릭한 타일, 유니크한 조명으로 이루어진 인테리어
    ▶淸·日·美까지 유난히 군사시설이 많던 지역

    구찌 측의 답변을 살피다 이태원의 지명이 궁금해졌다. 우선 그 유래부터 살펴보자. ‘이태원(梨泰院)’이란 지명은 조선시대 효종(1619~1659) 때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여러 설이 있는데 동네에 배밭이 많았다는 이유로 배나무 이(梨)가 붙었다고도 하고, 임진왜란 때 왜군이 귀화해 살았다 해서 이타인(異他人)이 어원이라고도 한다. 왜란 중 폭행당한 이들이 살던 동네라 해 다를 이(異), 태반 태(胎)자를 써 이태원(異胎圓)이 됐다는 설도 있다.

    차이는 있지만 이태원하면 이방인(외국인)이 떠오르는 선입견엔 별다른 이견이 없다. 유난히 군사시설과 인연이 많았던 탓이다. 1882년 임오군란을 진압하러 온 청나라 군대, 일제 강점기엔 일본군 사령부, 광복 이후엔 미군이 머물렀으니 어쩌면 당연한 결과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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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특한 투명 튜브 형태의 디스플레이와 건물을 관통하는 메탈릭 타일의 나선형 계단


    1970년대 미군 기지에서 나온 물품이 거래되며 상권이 형성된 이태원은 이후 미군을 위한 유흥가와 기지촌, 클럽 등이 들어섰다. 미군 기지를 중심으로 외국인 전용주택과 고급 주택단지가 들어섰고, 1988년 올림픽 당시엔 1800여 개의 점포가 들어서며 쇼핑 천국이란 이미지를 얻게 됐다. 하지만 1990년대 퇴폐업소 단속과 범죄와의 전쟁이 진행되며 상권이 눈에 띄게 위축된다. 여기까지가 20세기 이태원의 역사다. 1997년 관광특구로 지정된 이태원은 21세기를 맞으며 문화 트렌드를 선도하는 색다른 변화를 시도한다.

    첫 번째 변화는 2001년 지하철 6호선 이태원역 개통과 함께 진행됐다. 유동인구의 증가가 새로운 상권 형성에 물꼬를 텄다. 이국적인 분위기를 즐기려는 젊은 층이 유입되며 그들의 입맛에 맞는 프랜차이즈와 패션숍, 레스토랑이 들어섰다. 외국인 관광객과 거주 외국인 등 외국인 유동인구의 비율이 여타 도심에 비해 월등히 높아 이국적인 문화가 여전히 장점으로 부각됐다.

    2010년에 접어들며 이태원은 두 번째 변화를 시도한다. 지하철 6호선 한강진역 부근과 대사관길을 지나 한남오거리 유엔빌리지 진입로(독서당길)까지 연결고리를 만든 것이다. 이 시기부터 이태원과 한남동의 경계가 희미해지기 시작한다. 통칭해 한남동 일대라 불리며 강남 신사동 가로수길에 빗대 제2의 가로수길이라 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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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꼼데가르송 플래그십 스토어. 사진 류준희 기자
    ▶이태원역과 한강진역 주변은 전혀 다른 상권

    부동산 전문가들은 “이태원역 주변과 한강진역 주변의 상권은 10여 년 전이나 지금이나 성격이 전혀 다르다”고 말한다. 이태원역 주변은 쇼핑과 유흥문화가 공존하는 복합 상권이다. 빅사이즈 전문점 등 독특한 패션 전문점이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내국인보다 외국인을 노린 전문점이다. 높아진 임대료와 팬데믹 상황이 겹쳐 상황이 녹록지 않지만 이색적인 레스토랑 또한 젊은 층을 끌어들이는 확실한 보증수표다.

    해외여행이 쉽지 않는 요즘엔 국내에 거주하는 외국인들의 발길이 이어지며 이국적인 분위기를 도드라지게 한다. 최근엔 코로나19로 인한 규제가 완화되며 이러한 문화를 즐기려는 내국인의 발길도 잦아지고 있다. 서울지역뿐만 아니라 수도권 일대에서 일부러 찾는 명소 중 한 곳이다. 덕분에 재방문율도 높다. 서울에선 유사한 상권을 찾기 힘들 만큼 특색이 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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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움미술관


    이태원 사거리에서 한강진역(지하철 6호선) 방향으로 진행되는 이태원로는 해밀턴 호텔 방향과 한강진역 방향의 상권이 분리된다. 해밀턴 호텔에서 녹사평역 방향은 패션의류, 액세서리 매장이, 한강진역 방향은 레스토랑과 카페가 자리했다. 이태원역 1·4번 출구 방향은 보세의류, 잡화점, 기념품 매장, 패스트푸드점 등이, 이태원역 4번 출구로 나서면 보광동 방향으로 클럽과 레스토랑, 카페가 들어섰다. 이태원역 2·3번 출구에선 이국적인 퓨전 레스토랑, 카페, 제과점 등을 찾아볼 수 있다. 주변의 한 공인중개사는 “상권이 예전 같진 않지만 팬데믹 이전의 동대문과 명동엔 동양인 관광객이 많았고, 이태원엔 서양인이 많았다”며 “그래서 이태원 일대엔 브런치와 샌드위치를 즐길 수 있는 작은 레스토랑이나 카페가 지금도 간간이 눈에 띈다”고 설명했다.

    이태원역을 중심으로 발전하던 이태원 상권은 한강진역 주변으로 확대되며 새로운 상권을 형성하게 된다. 2010년대 제2의 가로수길이라 불린 곳은 한강진역에서 한남동 일대 약 650m에 이르는 길이다. 이곳은 일본 디자이너 레이 카와쿠보가 만든 명품 브랜드 ‘꼼데가르송’ 플래그십 스토어를 2010년 당시 제일모직(현 삼성물산 패션부문)이 인수하면서 떠오르기 시작했다. 젊은 층 사이에서 ‘꼼데길(꼼데가르송길)’이라 불리기 시작한 것도 이 시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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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남더힐 전경
    ▶이국적인 거리에서 명품거리로 변신

    구찌 가옥이 자리 잡은 곳은 이태원역과 한강진역의 중간지점이자 꼼데길로 향하는 길목이다. 이 거리에는 패션·뷰티 관련 명품 브랜드 매장이 곳곳에 자리하고 있다. 우선 삼성물산 패션부문의 ‘띠어리’가 2018년 이곳에 4층 규모의 플래그십 매장을 마련했다. 4층 건물이지만 패션과 음악, 카페를 한곳에서 누릴 수 있는 공간으로 설계되며 젊은 층을 끌어 모았다. ‘에루샤(에르메스, 루이비통, 샤넬)’라 불리는 명품 브랜드를 한곳에서 판매하는 삼성물산의 편집숍 ‘비이커’, 코오롱 FnC의 ‘시리즈’도 근방에 매장이 자리했다. ‘이솝’ ‘꼬달리’ 등 뷰티 브랜드 매장과 ‘조 말론’ ‘르 라보’ 등 향수 브랜드도 이 거리에서 찾아볼 수 있다.

    다시 한 번 질문해보자. 구찌는 너른 서울 하늘 아래 왜 굳이 한남동을 선택한 걸까. 이번엔 명품 업계 관계자가 답했다.

    “한남동은 강남지역의 매매가를 뛰어넘는 주거지가 형성되며 청담동처럼 부촌으로 자리했어요. 청담동 명품거리엔 매장과 맛집이 촘촘하다면 한남동엔 리움미술관부터 뮤지컬 극장 블루스퀘어, 현대카드 뮤직 라이브러리 등이 자리하며 쇼핑과 미술, 음악을 함께 즐길 수 있는 곳이 됐습니다. 또 유엔빌리지 방향의 독서당길로 들어서면 각국의 대사관이 위치해 분위기도 차분하고 치안도 든든합니다. 명품브랜드 입장에선 마다할 이유가 없는 곳이에요. 또 한 가지, 어쩌면 가장 중요한 부분일 수도 있는데, 강남권에서 한남대교를 건너면 도착할 수 있는 지리적 이점도 한몫 단단히 하고 있습니다. 브랜드 입장에선 강북지역의 전통적인 부촌인 성북동, 평창동 고객과 강남지역 고객을 모두 잡을 수 있는 명당 중의 명당이죠.”

    고객 입장에선 쇼핑과 함께 문화를 즐길 수 있고, 브랜드 입장에선 사통팔달 교통 요지에서 서울지역 부촌을 아우를 수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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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태원역 인근 상권. 사진 류준희 기자


    이른바 한남동 명품거리의 확장세는 앞으로 더 거세질 전망이다. 단국대학교 부지에 지어진 고급 주택단지 ‘한남더힐’ 외에 ‘나인원한남’이 지난해 1월 입주를 마무리하면서 이 지역에 고소득자 유입이 더 늘었다. 여기에 유명 연예인들이 속속 보금자리를 마련하며 방송과 언론을 통해 주목받게 된 점도 굳건한 상권 형성에 기여했다. 한남동의 한 공인중개사는 “한남동의 강변북로로 방송국이 모여 있는 상암동이나 여의도로 이동하기에 가장 적합한 지역”이라며 “최근 입주를 마친 나인원한남이나 유엔빌리지의 고급주거단지도 다른 이들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 생활할 수 있어 비싼 가격에도 연예인들이 많이 찾고 있다”고 전했다. 한 부동산 전문가는 “그렇다고 한남동이 청담동을 대체하는 명품거리가 되진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두 지역의 성향이 전혀 다르다”며 “특히 한남동은 MZ세대까지 아우르고 있어 소비층도 확연히 다르다”고 설명했다.

    [안재형 기자]

    [본 기사는 매경LUXMEN 제130호 (2021년 7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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