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글로벌 반도체 패권전쟁… 삼성, SK가 정중동인 이유

    2021년 10월 제 133호

  • 반도체 패권 경쟁이 격화되는 가운데 글로벌 반도체 업계가 인수·합병(M&A)으로 요동치고 있다. 주요 반도체 업체들은 연이어 굵직한 M&A 거래를 추진하면서 대대적인 판도 변화를 모색하고 있다. 반도체 기근 사태를 겪은 각국 정부들 역시 반도체 공급망 확보를 위해 직·간접적으로 사업 확장에 나선 자국 반도체 업체들을 지원하고 있다. 업계에서는 향후 수십 년간 주도권을 놓고 ‘쩐(錢)의 전쟁’이 막을 올렸다는 평가를 내리고 있다.

    시장조사업체 IC인사이츠에 따르면 반도체 업계 M&A 규모는 2018년부터 급속도로 성장하고 있다. 지난해 M&A 규모는 1180억달러로 2019년 315억달러 대비 3배 이상 증가한 것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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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각국 반독점 심사기구도 전선에 뛰어든 모양새

    이처럼 반도체 M&A 전쟁이 격화되면서 각국의 반독점 심사기구도 전선에 뛰어드는 모양새다. 반도체가 국가안보 차원의 문제로 격상된 후 주요국 정부는 특정 업체나 국가가 과도한 시장 지배력을 획득할 가능성이 있는 거래에 대해 제동을 걸고 있다. 합병 심사를 강화하는 방식으로 경쟁국 업체의 M&A에 제동을 거는 사례가 늘어나고 있는 것이다. 일각에선 소수 기업이 독점적 지위로 올라서는 것을 방지하고 공정한 시장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설립된 반독점 심사기구가 ‘자국우선주의’를 실현하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했다는 우려도 나오고 있다.

    실제 최근에는 중국계 사모펀드의 매그나칩반도체 인수가 미국 정부의 제동으로 무산 위기에 처한 상황이다. 미국 정부는 해당 인수 작업이 완료될 경우 미국의 국가안보에 위험이 될 수 있다며 거래를 원점에서 검토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유기발광다이오드(OLED) 디스플레이용 구동 반도체(DDI)와 차량용 반도체 등을 만드는 매그나칩반도체는 옛 하이닉스반도체(SK하이닉스)의 시스템 반도체 사업이 분리돼 2004년 설립됐다. DDI는 디스플레이 장치를 활용하는 대부분의 정보기술(IT) 기기와 자동차 등에 탑재되기 시작하면서 핵심 반도체 부품으로 주목받고 있다. 현재 매그나칩은 DDI 생산 부문에서 삼성전자에 이어 세계 2위에 올라있는 것으로 평가받는다.

    지난 8월 30일(현지시간) 매그나칩반도체는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에 제출한 자료를 통해 미국 외국인투자심의위원회(CFIUS)로부터 “매그나칩 매각으로 발생할 가능성이 있는 미국의 국가안보상 위험성을 확인했다”는 내용의 서한을 받았다고 밝혔다. CFIUS는 “이러한 위험 요소를 상쇄할 만한 대안이 없다”면서 “조사 기간 내에 국가안보 리스크에 대한 판단을 바꿀 만한 새로운 정보가 없다면 대통령에 이 같은 내용이 전달될 것”이라고도 밝혔다. 지난 3월 와이즈로드캐피털이 매그나칩반도체와 14억달러(약 1조6000억원) 규모의 주식 매매 계약을 체결한 뒤 미국 정부는 지속적으로 거래에 제동을 걸어왔다. 5월 CFIUS가 해당 거래를 대상으로 조사에 착수한 데 이어 한 달 뒤 미국 재무부는 합병 절차를 잠정 중단하라고 명령하기도 했다. 당초 9월 중순께 완료될 것으로 전망되던 CFIUS의 조사 결과 역시 예상보다 빠르게 통보됐다.

    이후 9월 10일 매그나칩반도체는 CFIUS에 소명자료를 제출하며 재심사를 요청한 상태다. 재심사를 승인한 CFIUS는 이르면 10월 28일 그 결과를 발표할 예정이다. 거부권을 가진 CFIUS가 재심사를 승인한 것 자체를 긍정적인 신호로 보는 시각도 있으나 단지 시간 끌기에 불과하다는 해석도 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취임 후 줄곧 자국 내 반도체 가치사슬(밸류체인) 생태계 조성을 강조해왔기 때문에 심사 결과는 이미 정해져 있다는 분석이다. 매그나칩의 주요 주주는 미국 기관투자자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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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 반도체 인수합병에 먼저 제동

    글로벌 반도체 M&A 거래에 먼저 제동을 걸기 시작한 것은 중국이다. 중국은 한국의 공정거래위원회와 비슷한 성격인 국가시장감독관리총국(SAMR)이 글로벌 반도체 기업들의 인수·합병과 관련한 반독점 심사를 담당하고 있다. 최근 SAMR는 주요 반도체 기업 인수 때마다 뚜렷한 이유 없이 승인 절차를 미루거나 허가하지 않으면서 거래를 무산시키기도 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미국 어플라이드머티리얼즈(AMAT)와 일본 반도체 기업 고쿠사이일렉트릭의 M&A다. 지난 3월 중국은 양사의 M&A 거래 심사를 지연시키면서 결국 거래를 무산시켰다. 당시 일본 공정거래위원회가 일찌감치 합병을 승인하고 한국과 미국, 유럽연합(EU) 등도 거래를 문제 삼지 않았지만 중국 정부는 9개월 넘게 심사를 지연시켰다. 결국 AMAT는 거래를 포기하고 1억5400만달러의 위약금을 물기도 했다. 업계에선 고쿠사이일렉트릭이 미국 업체로 넘어가면 미국 정부의 수출규제에 따라 중국 업체들의 반도체 장비 조달이 더 어려워질 것으로 본 중국 정부가 거래를 지연시킨 것으로 보고 있다.

    또 지난 2018년엔 미국 통신 반도체 기업 퀄컴이 중국 정부의 승인 절차 지연으로 네덜란드 반도체 회사 NXP 인수를 취소한 바 있다. 당시 퀄컴의 인수를 승인하지 않은 국가는 9개국 중 중국이 유일했다. 당시 계약 규모는 440억달러였고 계약 무산으로 퀄컴이 NXP에 지불한 위약금만 20억달러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러한 가운데 미국의 웨스턴디지털이 일본 키옥시아에 대한 합병을 추진하고 있다는 보도가 나오면서 반도체 M&A 시장에는 긴장감이 더해지고 있다. 해당 거래가 성사될 경우 낸드플래시 시장의 경쟁구도가 재편될 것이라는 분석과 함께 중국과 미국 정부의 반도체 패권 다툼이 더욱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사건으로 번질 것이라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 지난 8월 25일(현지시간) 월스트리트저널(WSJ) 등 외신은 업계 소식통을 인용해 웨스턴디지털이 최근 200억달러(약 23조원)에 달하는 키옥시아홀딩스와의 합병 논의를 본격화했다고 보도했다. 이르면 10월 중순 합의가 이뤄질 것이며 합병회사는 웨스턴디지털 최고경영자(CEO)인 데이비드 게클러가 운영할 것이라는 정황도 함께 소개했다. 다만 국내 반도체 업계에선 거래 성사 가능성을 두고 조금 더 신중하게 지켜봐야 한다는 반응이 나오고 있다. WSJ의 보도에는 구체적인 거래 대상이나 거래 방식에 대한 정보가 없고, 최근 반도체 업계 M&A는 각국 정부의 승인 등 예측하기 어려운 변수가 개입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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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K하이닉스가 지난해 미국 인텔의 낸드 사업부문을 10조3000억원에 인수하는 계약을 체결했다.


    업계에선 WSJ가 거론한 200억달러의 거래 금액을 토대로 미국 사모투자펀드(PEF) 운용사인 베인캐피털이 구성한 컨소시엄이 보유한 50%대의 지분이 거래 대상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지난해 8월 기준 키옥시아홀딩스의 지분은 일본 업체인 도시바와 호야가 각각 40.6%, 3.1%를 보유하고 있으며 베인캐피털 컨소시엄이 56.2%의 지분율을 기록하고 있다. 앞서 지난 3월에는 웨스턴디지털과 마이크론이 키옥시아에 대한 인수를 검토하고 있다는 외신 보도가 나오면서 키옥시아의 가치를 300억달러 수준으로 추정한 바 있다. SK하이닉스 역시 베인캐피털 컨소시엄에 참여하고 있지만 이번 M&A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맡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SK하이닉스는 약 4조원을 투자해 해당 컨소시엄에 참여하고 있다. 주요 출자자(LP)로 약 2조7000억원, 전환사채(CB)로 1조3000억원가량을 투자했다. SK하이닉스는 재무적 투자자(FI) 자격으로 펀드에 출자만 했기 때문에 투자금 회수 외에 이번 거래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기는 어려운 것으로 알려졌다.

    키옥시아가 당초 계획대로 도쿄증권거래소에 기업공개(IPO)를 추진할 것이라는 전망도 있다. WSJ 역시 기사에서 키옥시아가 기업공개와 M&A 중 어떤 선택을 할지는 알 수 없다고 부연한 바 있다. 지난 4월 SK하이닉스는 콘퍼런스 콜에서 “웨스턴디지털 등이 키옥시아를 인수한다는 보도를 하기도 했지만 베인캐피털이나 키옥시아 측에서 전해 들은 내용은 올해 하반기에 상장을 추진하겠다는 것”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계약이 체결된다 해도 이후 거래가 온전히 성사되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는 시각도 있다. 중국 정부가 웨스턴디지털의 키옥시아 인수 또한 반대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낸드플래시 시장이 과점 체제로 개편되는 것은 중국 정부 입장에서는 부담이다. 점유율 3위인 웨스턴디지털과 2위 키옥시아가 합병에 성공할 경우 단순 합산으로도 낸드플래시 시장에서 33%에 달하는 점유율을 확보하게 된다. 이는 1위인 삼성전자와 맞먹는 수준이다. 시장조사업체 트렌드포스에 따르면 지난 2분기 낸드플래시 시장에서 삼성전자의 점유율은 34%였으며 키옥시아와 웨스턴디지털은 각각 18.3%, 14.7%의 점유율을 기록했다. SK하이닉스의 점유율은 12.3%였다.

    최근에는 미국과 영국은 물론 유럽연합 등도 자국 반도체 산업 보호를 위해 M&A에 대한 견제에 나서고 있다. 매그나칩반도체 인수 거래가 대표적인 사례다. 이 밖에도 영국 경쟁당국은 최근 엔비디아의 ARM 인수에 대해 독점의 우려가 있다며 2단계 심층 조사에 나서겠다고 밝히기도 했다. 올해 초 미국 연방거래위원회(FTC)는 해당 거래 당사자들에게 자료 제출을 요청한 것으로 알려졌다. 또 지난 3월 이탈리아 정부는 기술 안보를 이유로 밀라노 소재 반도체 기업인 LPE가 중국 선전투자홀딩스에 매각되는 것을 거부한 바 있다. 업계에선 최근 중국과 미국, 유럽연합(EU) 등의 반독점 심사기구가 반독점 관련법뿐 아니라 산업정책적 영향까지 고려하는 경향이 강해졌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한 국내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최근 몇 년간 자국보호주의가 강해지면서 각국 정부가 글로벌 M&A 거래에 대해 자국의 이익에 반하느냐를 상세히 검토하는 경향이 강해졌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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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요 인수 대상 업체들 몸값 천정부지

    이처럼 각국 정부의 반대로 대규모 반도체 M&A 거래가 잇따라 무산되면서 국내 업체들의 M&A 전략에도 비상등이 켜졌다. 200조원이 넘는 유동성을 기반으로 3년 내에 적극적으로 M&A 기회를 모색하겠다고 밝힌 삼성전자는 최근 이재용 부회장이 복귀하면서 대규모 M&A에 대한 기대감이 높아졌지만 동시에 각국 정부의 ‘인수 불허 리스크’도 커진 상태다. 반도체 부족 현상으로 인해 주요 인수 대상 업체들의 몸값도 천정부지로 치솟고 있다는 점도 걸림돌이다. 최근 일부 외신에서는 삼성전자가 자동차용 반도체 사업 강화를 위해 인수를 검토했던 NXP의 몸값이 50조원대에서 80조원으로 급증하고 반독점 심사 리스크까지 부각되면서 인수를 포기했다는 관측이 나오기도 했다. 매각설이 돌았던 글로벌파운드리도 기업공개 방침을 밝히며 몸값 높이기에 나선 상태다. 지난 8월 24일 삼성이 밝힌 3년간 240조원 규모의 투자 계획에서 국내 투자분인 180조원을 제외한 해외 투자액은 약 60조원으로 추정된다. 이 중 미국 파운드리 증설에 투입될 20조원을 제외하면 M&A에 투자할 수 있는 가용자원은 최대 40조원에 그칠 것으로 분석된다.

    공정거래위원회 출신의 이석준 율촌 미국변호사는 “주요국의 기업결합 심사 기준은 대동소이하며 자국 시장의 경쟁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면 거래를 승인해줘야 하는 것이 원칙”이라면서도 “최근에는 중국과 미국 등을 중심으로 자국 산업 보호를 위해 산업정책적인 요소를 고려하는 경향이 강해졌다”고 설명했다.

    [박재영 매일경제 산업부 기자]

    [본 기사는 매경LUXMEN 제133호 (2021년 10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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