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허연의 인문학산책] 조지 워싱턴은 왜 왕조를 세우지 않았을까

    2021년 02월 제 125호

  • ▶포도밭으로 낙향해버린 대륙군 총사령관

    1782년 5월. 미국독립전쟁이 독립세력의 승리로 마무리되어갈 무렵 대륙군총사령관이었던 조지 워싱턴(1732~1799)은 고민에 빠진다. 왕위에 올라야 한다는 주변의 요구가 빗발쳤기 때문이다. 그때 워싱턴이 발명한 명칭이 ‘Mr. President’다. 이 말은 아무리 후하게 번역을 해도 ‘왕’의 느낌은 없다.

    사연을 좀 더 들여다보자. 1700년대 중반 미국인들에게 공화제에 대한 개념은 거의 없었다. 세계적으로도 없었다. 자연스럽게 당시 독립세력은 새로운 국가의 수장은 왕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자리의 적격자는 당연히 존경받는 총사령관 조지 워싱턴이었다. 당시 세계관으로는 독립국가를 세운 최고 지도자가 자기의 왕조를 세우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유럽의 모든 나라가 그렇듯 나라는 당연히 왕이 다스리는 것으로 알고 있던 시절이고, 입헌군주제라는 민주적인 방법도 있었기 때문에 왕조를 세우는 일은 자연스러운 수순처럼 보였다. 참모들이 계속해서 워싱턴에게 왕위에 오르라는 제안을 하자 참다못한 워싱턴은 참모들에게 호통을 친다.

    “아직 전쟁도 끝나지 않았네. 그런 생각은 집어치우게. 포도가지와 무화과나무 그늘 아래서 삶의 흐름을 서서히 따라 가면서 살고 싶네, 내 선조들 곁에 잠들 때까지.”

    낙향 선언이었다. 호통을 친 워싱턴은 전쟁이 끝나자 자기 말대로 사령관 자리를 반납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평범한 시민으로서 살아간다. 워싱턴은 실제 도무지 권력욕이라고는 없었던 사람이었다. 혼란스러운 미국을 통합해야 한다는 책임감이야 있었겠지만 종신집권을 하고 대를 이어 권력을 세습하는 일은 그에게 맞지 않았다.

    하지만 독립전쟁이 막을 내린 후 아메리카 대륙의 혼란은 오히려 가중됐다. 지역에 따라 프랑스계냐 영국계냐에 따라, 혹은 종교에 따라 미국은 첨예한 갈등을 겪고 있었다. 그러자 생각있는 사람들은 각 주를 통합해서 통치해 줄 중앙정부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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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가 선택한 호칭 ‘Mr. President’

    사람들은 삼고초려 끝에 결국 워싱턴을 불러낸다. 아메리카 연방을 총괄할 헌법을 제정하기로 한 각 주 대표들이 모여 워싱턴을 제헌의회 의장으로 뽑았던 것이다. 내키지는 않았지만 애국심이 강했던 워싱턴은 의장직을 성실히 수행했다. 그리고 얼마 후 1789년 미합중국 전체를 이끌 최초의 리더를 뽑는 선가가 실시되고 조지 워싱턴이 당선된다. 선거인단은 당선인 조지 워싱턴에게 어떤 호칭을 원하느냐고 물었다. 그 자리에서 워싱턴이 원했던 호칭이 바로 ‘Mr. President’였다. 대통령이라는 직책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이런 역사 때문인지 미국 대통령은 정해진 기간에 집단을 대표하는 일종의 사령관으로서의 개념이 강하다. 자신을 선출해준 집단의 구성원들을 젖과 꿀이 흐르는 곳으로 인도할 안내자인 것이다. <컬처 코드>라는 책을 쓴 세계적인 문화인류학자 클로테르 라파유는 미국인이 대통령에게 원하는 코드는 ‘모세’라고 말한다. 모세는 통치자가 아닌 지도자였다.

    같은 해 4월 30일 워싱턴의 취임연설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준다.

    “14일에 수령된 그 통지서보다 더 큰 불안감을 내게 안겨준 사건은 없었습니다. 저는 제가 선택했던 말년의 은신처로부터 소환되었습니다. 조국의 부름을 받았을 때, 나는 이 나라의 자유를 위한 투쟁의 불빛 앞에서 나에게 주어진 의무를 생각했습니다. 그 불빛은 나에게 어떤 금전적인 보상도 바라지 말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따라서 나는 나라로부터 어떤 금전적인 보상도 받지 않겠습니다. 업무에 따르는 비용도 공익에 필요한 경우에만 사용하겠습니다.”

    조지 워싱턴이라는 대인배는 은퇴도 아름다웠다. 1796년 9월 17일 조지 워싱턴은 대선 불출마 선언을 한다. 재선을 하는 동안 큰 지지를 얻고 있었고 사실 당시 미국 헌법에는 대통령의 연임 제한규정이 없었기 때문에 워싱턴은 마음먹기에 따라 종신 대통령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워싱턴은 너무나 겸허하게 권좌에서 내려온다. 그는 권력무상을 잘 아는, 겸손하고 신중했으며 의지가 굳은 인물이었다.

    “나는 내 부족함을 인식하는 분별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워싱턴이 불출마를 하면서 했던 연설은 미국 정치사를 논할 때 두고두고 이야깃거리가 된다.

    “미국 행정부를 관리할 한 명의 시민을 새로 선출할 때입니다. 하지만 저는 선출대상이 되는 것을 사양하기로 했습니다. 저는 저의 부족함을 인식할 수 있는 분별력을 갖고 있습니다. 저는 많은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그 실수가 무엇이었든, 창조주께서 그 악영향을 극소화하시고, 내 조국은 이를 너그럽게 보아주었습니다. 이제 나의 무능함으로 생겨난 흠집들이 망각 속으로 사라지기를 바랍니다. 나도 그곳에서 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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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지 워싱턴은 미국의 초대 대통령으로, 8년의 임기를 원만하게 보냈고 230년이 넘은 현재까지도 미국 정치에서 지켜지고 있는 평화로운 권력이양(Peaceful Transition)이 무엇인지 몸소 보여주며 이를 미국의 정치적 전통으로 만들었다는 점에서 지금도 많은 미국인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미국이 건국 이래 독재자나 쿠데타 없이 민주주의를 지속적으로 펼 수 있었던 것은 워싱턴의 공이 매우 컸다고 봐도 과언이 아닌 셈이다. 워싱턴은 따뜻하고 큰 인물이었다.

    1799년 67세로 세상을 떠난 그의 유언장에는 “나의 시중을 든 윌리엄을 노예 신분에서 즉각 해방시킨 다음 연금을 지급하고, 아내가 사망하면 나머지 노예들도 모두 해방시켜 달라”는 대목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제 막 신대륙에서 첫 걸음마를 시작한 미국에게 워싱턴과 같은 리더가 없었다면 어떻게 됐을까. 만약 그가 없었다면 지금의 미국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더 나아가 대통령제라는 정치체제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한국의 대통령은 무서운 아버지이자 제사장?

    군주제의 강력한 대안으로 등장한 대통령에 대한 인식은 시대와 국가에 따라 매우 복잡하고 다양하다.

    2008년 국보1호 숭례문에 불을 낸 채 방화범은 ‘임금’이 내 말을 들어주지 않아 남대문의 불을 냈다고 말했다. 구속 당시 그는 “임금이 국민을 버렸다. 진정을 세 번이나 해도 안 들어줬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그의 머릿속에서 대통령은 전지전능한 국부(國父)이자 왕이었던 것이다. 어이없기는 하지만 그 사건은 한국인들의 인식 속에 대통령이라는 개념이 어떻게 자리 잡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한국에서 대통령은 제사장 아닌 제사장 노릇을 하고 있다. 법에 정해진 기간에 한 나라를 이끌고 나가는 리더라기보다는 무한권력과 무한책임을 동시에 지닌 유교사회의 그릇된 아버지 모습으로 서 있는 것이다. 대통령제를 시작한 지 60년이 지났지만 아직 우리의 뇌리에는 대통령제에 대한 제대로 된 개념이 만들어지지 않았다.

    유교적 전통이 남아 있는 우리나라에서 대통령과 국민의 관계는 수직적이다. 한국의 대통령에게는 무서운 아버지 모습과 메시아 모습이 혼재해 있다.

    이제 우리는 대통령이 제한적 존재(Marginal Presence)이며 그가 가진 권력은 검증되고 감시 받아야 하는 공적 책무라는 걸 알아야 한다.

    [허연 매일경제 문화스포츠부 선임기자·시인]

    [본 기사는 매경LUXMEN 제125호 (2021년 2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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