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태훈의 유럽인문여행! 예술가의 흔적을 찾아서] 화가들을 매혹시킨 도시, 튀니지 함마메트

    2021년 02월 제 125호

  •  기사의 0번째 이미지


    1914년 4월 3일, 추상화가 파울 클레는 독일 표현주의 작가그룹인 청기사파를 이끈 대표적인 미술가 아우구스트 마케(August Macke), 스위스 베른 출신의 루이 무아예(Louis Moilliet)와 함께 2주간 튀니지로 여행을 떠났다. 3명은 튀니지의 수도 튀니스에 도착하여 운하를 따라 해안 도시, 함마메트에 도착하였다. 파울 클레는 야수파의 강렬한 색채만큼이나 이국적인 함마메트에 금세 매혹되었다. 북아프리카의 강렬한 햇볕, 열정에 휩싸인 도시 분위기, 역동적이면서 순수한 마음을 지닌 함마메트 사람들. 물론 파울 클레도 매혹됐지만, 그 옆에 있던 아우구스트 마케도 함마메트가 가진 화려한 색조와 동양적인 이국적 정취에 빠져들었다.

    이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붓을 통해 함마메트가 가진 매력을 하얀 캔버스에 담기 시작했다. 선과 면 그리고 강력한 색으로 표현된 이들의 작품은 100여 년 지난 지금도 우리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파울 클레가 그린 <함마메트 항구를 향해(View Towards the Port of Hammamet·1914)> <함마메트 모스크(Hammamet with Its Mosque·1914)>와 아우구스트 마케가 그린 <튀니스의 시장(Tunis Market·1914)> 등을 보면 함마메트가 가진 매력에 빠져들게 된다. 클레는 2주 동안 35개의 수채화와 13개의 그림을 그렸고, 마케도 35개의 그림과 70여 개의 스케치를 그렸다. 특히 클레는 튀니지를 다녀온 후로 1930년까지 튀니지를 주제로 20개 이상의 그림을 더 그렸을 만큼 그에게 튀니지는 인생 최고의 여행지였다.

     기사의 1번째 이미지


    우리에게 조금은 낯선 이름 함마메트는 지중해를 품고 있는 낭만적인 도시 풍경을 자랑한다. 케이프본 반도 끝에 있는 이 도시는 튀니지에서 가장 유명한 관광 리조트가 있을 만큼 튀니지 사람들뿐 아니라 유럽인들에게도 사랑받는 휴양지이다. 고운 모래가 수십 킬로미터나 이어진 해변과 아름다운 지중해 그리고 현대식 호텔이 많아 관광지로서 손색이 없을 만큼 다양한 편의성을 제공한다.

    함마메트에는 실제로 2개의 중심지가 있다. 하나는 유구한 역사와 삶의 궤적을 함께한 구시가지 메디나이고, 다른 하나는 현대식 건물이 어깨를 나란히 한 메디나 야스민이다. 보통 이곳을 찾는 여행자들은 구시가지 메디나를 먼저 보고, 나중에 새롭게 단장한 메디나 야스민을 찾는다. 우선 1988년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구시가지 메디나로 가면 아랍식 이슬람 문화를 볼 수 있다. 이곳은 12~16세기경 이슬람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힘과 번영을 누렸던 도시 중 하나였다. 이슬람의 술탄들이 머물던 궁전, 이슬람교도에게 가장 사랑받는 모스크 등 700여 개에 이르는 유적과 유물들이 화려했던 과거의 영화로움을 한눈에 보여준다.

     기사의 2번째 이미지

    아우구스트 마케


    이 중에서도 916년에 건축된 거대한 성벽과 성곽의 흔적이 남아 있는데, 성벽의 길이만 해도 무려 10㎞에 이른다. 과거에 도시 전체를 감싸던 성벽은 유럽과 두 번의 전쟁으로 인해 파괴되었다. 1601년 스페인이 함마메트를 약탈하고 700여 명의 시민을 붙잡아 갔고, 4년 뒤인 1605년에 다시 쳐들어온 스페인을 상대로 함마메트 시민들이 격렬하게 저항해 스페인의 두 번째 전쟁은 실패로 끝났다. 그 후 1660년에는 몰타의 성 요한 기사단이 쳐들어왔고, 1673년에는 튀니지에서 최초로 발생한 내전 때 중심지였고, 1881년에는 프랑스군이 점령했다. 이처럼 함마메트의 성벽은 1000여 년 동안 이민족의 침입과 내란으로 슬픔의 역사를 겪어야 했다. 지금은 지중해를 따라 난 성벽이 아름답지만, 성벽을 사수하려고 안간힘을 썼던 과거의 시민들을 생각하면 마음 한구석에 안타까움이 밀물처럼 스며든다.

    성벽 안으로 한 걸음 더 들어가면 미로처럼 얽히고설킨 골목길과 하얀색으로 칠해진 건물들이 한 편의 영화 세트장처럼 보인다. 집마다 아랍풍의 고풍스러운 디자인과 단순하면서 여백의 미를 충분히 살린 벽과 대문 등, 마치 영화 속에 주인공이 된 것처럼 황홀함에 빠진다. 이것이 바로 함마메트의 매력이다.

     기사의 3번째 이미지


    구시가지 메디나를 헤매다 보면 아랍식 스타일의 재래시장인 수크를 만나게 된다. 메디나 남동쪽에 있는 수크에 들어서면 좁은 길을 따라 채소, 생선, 고기, 향신료 등을 파는 가게들이 들어서 있다. 보는 것만으로도 이곳 사람들이 무엇을 먹고 무엇을 좋아하고 어떻게 사는지를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는 곳이 바로 수크이다. 재래시장을 구경하다 보면 아우구스트 마케가 그린 <튀니지의 시장>이 눈에 그려지고, 모스크를 보면 파울 클레의 <함마메트 모스크>의 그림이 생각난다. 100여 전이나 지금이나 메디나의 풍경은 별반 차이가 없다. 이국적인 골목길, 화려한 카펫, 정교하게 다듬어진 금·은 세공품, 아잔의 구성진 기도 소리 등 그리스도를 믿는 유럽인에게 이슬람의 풍경은 생경했다.

    파울 클레와 아우구스트 마케, 그리고 루이 무아예 3명은 같은 장소에서 각기 다른 표현법으로 그림을 그렸지만, 화려한 색감만큼은 똑같았다. 마치 앙리 마티스의 영향을 받은 것처럼 이슬람 특유의 색감이다. 야수파 화가이자 이들보다 먼저 북아프리카를 여행한 마티스. 그는 1900년 초에 알제리와 모로코를 여행한 후 이슬람의 카펫과 전통 문양에 영감을 받아 강렬한 붉은색이 인상적인 <붉은 조화(Harmony in Red·1908)>와 지중해의 푸른빛을 연상시키는 <대화(Conversation·1908~1912)> 등을 그렸다. 몇 년 후 북아프리카를 찾아온 마케와 클레의 작품에서도 이슬람의 열정적인 색채가 묻어난다. 다만, 수채화로 그리다 보니 이들의 작품이 앙리 마티스의 작품보다는 강렬함이 다소 약하다.

     기사의 4번째 이미지

    파울 클레


    재래시장 수크를 이리저리 배회하다 보면 앙리 마티스의 작품이나 파울 클레 작품에 등장하는 이슬람 특유의 색채를 발견하게 된다. 그것이 카페든 창문이든 상관없이 예술가에게 전해줄 영감이 곳곳에 있다. 아마 파울 클레도 앙리 마티스가 그랬던 것처럼 튀니지를 다니면서 많은 영감을 받았을 것이다. 그는 함마메트를 비롯해 튀니지안의 블루로 유명한 휴양도시, 시드 부 사이드, 이슬람 전통문화가 잘 보존된 카이로우완 등 튀니지의 유서 깊은 도시를 여행하면서 화가로서의 영감을 마음껏 누렸을 것이다. 실제로 1914년 4월 16일 그의 일기에 “색채가 나를 지배하고 있다. 그것은 항상 나를 지배할 것이다. 지금 행복한 시간을 누리는 것은 바로 색채와 내가 하나가 되었기 때문이다”라고 기록할 만큼 푹 빠져 있었다. 그리고 일기장 마지막에 “색과 나는 하나이다. 지금부터 나는 화가다”라고 적었다. 이 말은 튀니지 여행을 계기로 새로운 색채에 눈을 떴고, 음악가가 아닌 화가가 돼 새로운 창조의 세계로 들어간다는 의미이다.

    이처럼 함마메트를 비롯해 튀니지는 클레의 인생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았다. 색과 선 그리고 면을 통해 그림을 압축하는 추상화가로서의 길을 걷게 되는 클레. 함마메트에서 받은 수많은 예술적 영감은 튀니지 여행을 다녀온 후에도 그의 캔버스에 자주 등장한다. 바로 함마메트는 영원히 클레의 그림 속에서 살아 숨 쉬는 그런 예술의 도시로 승화된 것이다. 튀니지 여행을 다녀온 후 추상화가로서 자리매김한 클레. 그의 작품은 강렬한 색채와 기이한 형태, 그리고 환상적인 구성이 돋보인다. 그의 그림은 보이는 붓으로 연주한 음악이고, 그림으로 쓴 한 편의 시와 같다.

    [이태훈 칼럼니스트]

    [본 기사는 매경LUXMEN 제125호 (2021년 2월) 기사입니다]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매일경제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