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민우의 명품 와인 이야기] 美 시애틀 와인의 개척자, 킬세다 크릭

    2021년 05월 제 128호

  • 나를 포함해 우리나라의 와인 전문가들은 국산 와인에 대한 마음의 빚을 조금씩 가지고 있다. 그 이유는 와인이 빠르게 대중화되고 있는 반면, 여전히 수입 와인에 거의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는 현실에 대한 아쉬움이 기본이다. 와인은 원료인 포도가 자라는 지역의 정체성이 강한 상품이다. 부르고뉴 와인이나 바롤로, 바로사, 내파밸리 등이 적혀 있는 와인의 이름은 포도가 자라는 지역의 명칭에서 가져오는 것이 일반적이다. 1년에 단 한 번이라도 고향의 이름이 적힌 와인을 마실 수 있다면 와인 애호가에게는 큰 즐거움이 될 것이다. 그리고 좋은 품질의 국산 와인을 선보이는 것은 와인 전문가들의 책임일지 모른다.

    변명을 하자면, 와인 산업은 마치 자동차나 반도체처럼 기반이 되는 인프라스트럭처를 필요로 하는 산업이며 인프라를 건설하는 일은 짧게는 수십 년, 길게는 100년 이상이 걸린다.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의 기후는 와인을 만드는 데에 적합하지 않다. 무엇보다 수확 직전에 내리는 많은 비는 와인의 원료인 경쟁력 있는 포도를 재배하는 데에 치명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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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애틀이 자리한 미국의 워싱턴주는 세계적인 와인 생산지 중 하나이다. 시애틀에는 비가 많이 내리는 것으로 유명하지만, 워싱턴주를 동서로 나누는 캐스케이드 산맥을 넘어가면 프랑스 보르도가 부럽지 않은 최고의 환경을 자랑하는 컬럼비아 밸리가 펼쳐진다. 컬럼비아 밸리는 한때 정부 보조금으로 싸구려 와인을 생산하던 곳이었으나, 1970년대 월터 클로어(Walter Clore) 박사와 그의 제자들이 잠재력을 발견하고 세계적인 포도품종을 재배하면서 유명한 와인 생산지로 변화하였다. 이곳에서 생산되는 대표적인 와인인 ‘컬럼비아 크레스트’는 좋은 품질에 비해 가격이 저렴해 우리나라에서도 인기가 높다.

    2008년 처음으로 컬럼비아 밸리를 방문하기 위해 잠시 시애틀에 들렀을 당시 비가 많이 오는 시애틀 인근에서도 포도를 재배하고 와인을 만든다는 사실에 매우 놀랐다. 와이너리에 방문하여 물어보았더니 기후를 극복하기 위해 레드 와인은 만들지 않고, 스파클링 와인만 만든다는 말이 인상적이었다. 레드 와인을 만들기 위해서는 일조량이 매우 중요하지만, 스파클링 와인을 만드는 데에는 그만큼 중요하지 않다. 프랑스 최고의 스파클링을 만드는 샴페인 지역도 프랑스에서 추운 지역에 위치하고 있다.

    생각해보니, LVMH에서 만드는 세계 최고급 디저트 와인인 ‘샤토 디켐’을 만드는 데에는 포도 수확철에 생기는 보트리티스라는 곰팡이가 꼭 필요하지만, 보통의 와인용 포도를 수확하는 데에는 치명적인 위협이 된다. 어쩌면 우리나라 기후와 토양에 맞는 와인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1974년, 공식적으로는 1978년, 알렉스 골리친이 설립한 ‘킬세다 크릭(Quilceda Creek)’의 카베르네 소비뇽은 워싱턴주에서 만들어지는 와인 중 최고의 와인으로 꼽힌다. 이 와인의 2002, 2003, 2005, 2007, 2013, 2014년산은 로버트 파커로부터 100점 만점에 100점의 평가를 받았다(2002, 2005, 2007, 2014년은 이후 재조정). 그리고 세계적인 와인만 등재되는 와인스펙테이터 올해의 와인에 2013년에는 10등으로, 2015년에는 2등으로 선정되기도 하였다. 킬세다 크릭 와이너리 역시 시애틀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해 있지만, 와인을 만드는 데 사용되는 포도는 모두 동쪽 컬럼비아 밸리에서 재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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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렉스 골리친이 이곳에서 와인을 만들게 된 동기는 재미있게도 자신들이 마실 와인을 생산하기 위해서였다. 그의 가족은 원래 러시아 왕가의 포도밭과 양조장을 관리하던 귀족으로 러시아 혁명을 피해 파리로, 다시 미국으로 이주하였다. 처음 미국에서 자리 잡은 곳은 샌프란시스코로 알렉스 골리친의 외삼촌인 안드레 첼리체프가 내파밸리의 와인 메이커로 일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안드레 첼리체프는 오늘날 내파밸리 와인의 성공을 이끈 전설의 와인 메이커로 로버트 몬다비와 함게 내파밸리 와인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인물이다.

    하지만 알렉스 골리친은 외삼촌처럼 와인 생산에서 일하지는 않고, 제지업계의 엔지니어로 일을 하였으며 시애틀로 이주하게 된 이유도 이곳의 스콧 페이퍼라는 회사에 취업을 하였기 때문이었다. 1974년부터 1977년까지 알렉스 골리친은 가족과 친구들을 위해서만 와인을 만들었으며, 처음으로 자기 와인을 판매한 것은 1979년부터였다. 심지어 회사를 그만두고 와인을 만드는 데에 전념한 것은 1994년부터였다.

    워싱턴주의 와이너리들이 완벽한 기후를 가진 포도밭에서 카베르네 소비뇽과 메를로, 시라, 세미용 등 다양한 포도를 실험하고 있는 데 비해 킬세다 크릭에서는 카베르네 소비뇽 단 하나의 포도로만 와인을 만든다. 알렉스 골리친에 따르면, 그에 대한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고, 단 한 번도 다른 포도를 재배할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다고 하였다. 어쩌면 내파밸리의 상징과 같은 외삼촌의 영향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킬세다 크릭의 카베르네 소비뇽은 내파밸리 와인들과는 매우 다른 맛을 보여준다. 최고급 내파밸리 와인은 보통 비단 장갑을 낀 강철주먹으로 표현되는데, 부드러우면서도 매우 진한 와인을 상징한다. 그에 비해 킬세다 크릭 카베르네 소비뇽은 부드럽고 우아하며, 어릴 때 마셔도 부담이 없다. 잘 디캔팅한 후에 눈을 감고 마시면, 종종 유럽 와인인지 알기 어려울 정도이다.

    [이민우 와인칼럼니스트]

    [본 기사는 매경LUXMEN 제128호 (2021년 5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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