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장원의 클래식 포레스트] 한여름에 브람스를 만나다… 휴가지에서 탄생한 브람스 걸작들을 찾아서

    2021년 08월 제 131호

  • 얼마 전 한 공연장의 여름 페스티벌을 위한 프로그램노트를 쓰면서 오랜만에 브람스의 실내악곡들을 찬찬히 들어보는 시간을 가졌다. 북독일의 항구도시 함부르크 출신인 요하네스 브람스(Johannes Brahms, 1833~1897)는 ‘베토벤의 후계자’로 일컬어질 정도로 위대한 작곡가이다. 그런데 누군가 브람스의 이름을 각별한 어조로 읊조린다면, 그 이유는 그의 업적보다는 개인사 때문일 공산이 크다. 브람스는 베토벤처럼 평생을 독신으로 살았는데, 그것이 베토벤의 경우와는 달리 다분히 자발적 선택에 의한 것이었다. 그가 사랑했던 여인들 가운데 자신의 멘토였던 로베르트 슈만의 아내 클라라 슈만과의 오묘한 관계는 아주 유명하다. 클라라와의 일화들 덕에 그는 많은 사람들의 뇌리에 이런 이미지로 각인되었다. ‘이룰 수 없는 사랑으로 번민하며 일생을 깊은 고독과 우수 속에서 살다 간, 너무나도 진중했던 사나이.’ 또 사람들은 그에게 ‘가을 작곡가’라는 별명을 붙여놓고, 가을이면 일종의 통과의례처럼 그의 음악을 꺼내 듣는다. 고독과 우수, 그리고 가을. 얼마나 그럴싸한 조합인가! 실제로 그가 남긴 곡들 중 상당수가 낙엽 지는 가을 풍경에 썩 어울린다.

    하지만 브람스의 음악이 그저 ‘가을’이기만 한 걸까? 그가 한창 나이에 남긴 작품들을 들어보면 가을보다는 봄이나 여름을 떠올리게 하는 곡도 적지 않다. 이를테면 화창한 ‘세레나데 제1번’이나 싱그러운 ‘현악 6중주’ 두 곡, 열정적인 ‘피아노 협주곡 제1번’과 같은 곡들에 대해서까지 가을 운운하는 건 난센스가 아닐까. 한여름에 브람스 음악에 귀를 기울이다가 이런 해묵은 상념이 떠올랐다. 그리고 언젠가 다녀왔던 여행의 추억 속으로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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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푀르차흐의 브람스 기념비. 트레이드마크인 수염을 기르기 직전의 모습이다.
    ▶푀르차흐에서 마주친 폭풍우

    몇 해 전 여름, 유럽으로 여행을 떠난 김에 브람스의 휴가지들을 돌아본 적이 있다. 브람스는 평상시에는 비엔나를 비롯한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도시들에서 피아노 연주, 지휘, 공연 기획, 악보 편집 등 다양한 일을 하면서 분망한 나날을 보내다가, 휴가 시즌이 되면 한적하고 경치 좋은 휴양지에 거처를 정해두고 수개월씩 머물면서 휴식을 취하는 한편 작곡에도 매진했다. 64세까지 살았던 그의 휴가지들은 독일과 오스트리아, 그리고 스위스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지역에 흩어져 있는데, 필자는 여건상 그가 가장 자주 찾았던 리히텐탈과 바트이슐을 포함하여 다섯 군데를 골랐다. 독일 서부에서 스위스를 거쳐 오스트리아 동부에 이르는 꽤 긴 여정이었다. 그 여행에서 마주쳤던 정경들과 경험들은 내게 브람스 음악에 대한 새로운 개안의 계기로 작용했다.

    여기서 다섯 군데를 전부 돌아볼 수는 없으니, 브람스의 전성기와 관련된 두 곳으로 시야를 좁혀보자. 먼저 오스트리아 남부의 ‘푀르차흐(Portsch ach am Worthersee)’. 푀르차흐는 클라겐푸르트 서쪽에 펼쳐진 뵈르트 호숫가에 자리한 휴양지로, 드넓은 호수 주위로 알프스 동쪽 자락의 산세가 어우러져 장쾌하면서도 아늑한 풍광을 연출하는 마을이다. 브람스는 이곳에서 1877년부터 1879년까지 세 번의 여름휴가를 보냈는데, 당시 그는 무려 20여 년 동안 산고를 겪었던 야심작 ‘교향곡 제1번’을 발표한 직후 바야흐로 작곡가로서 전성기에 진입한 참이었다.

    브람스는 한 편지에서 푀르차흐를 “많은 선율이 떠다니므로 그것들을 밟지 않으려면 매우 조심해야 하는 곳”이라고 묘사했는데, 실제로 그가 여기서 쓴 곡들은 선율이 유독 아름답고 풍부하다. 첫 번째 여름에 전작과 달리 3개월여 만에 완성한 ‘교향곡 제2번’은 밝고 유창한 선율미와 목가적 분위기로 가득하고, 두 번째 여름에 생애 첫 이탈리아 여행을 다녀와서 작곡한 ‘바이올린 협주곡’은 웅대한 기상과 뜨거운 열정, 여유로운 노래를 통해서 드러나는 아취 깊은 서정을 한데 아우르고 있다. 세 번째 여름에 완성한 ‘바이올린 소나타 제1번’은 한결 차분하고 온화하며, 그 자신의 가곡 ‘비의 노래’에서 유래한 애잔하면서도 감미로운 서정미가 감도는 곡이다.

    필자는 푀르차흐에서 조금 별난 경험을 했다. 원래는 아직도 남아 있는 브람스의 거처들을 둘러본 다음 느긋하게 산책도 하고 잠시 뒷산에도 올라가볼 심산이었지만, 무심한 자연이 훼방을 놓았다. 브람스 음악을 귀에 꽂고 호숫가의 ‘브람스 산책로’를 따라서 걷기 시작한 지 10분이나 지났을까? 서쪽에서부터 뇌성이 들려오고 호수 위로 먹구름이 몰려오는 게 보였다. 이내 세찬 비바람이 휘몰아쳤고 필자는 부랴부랴 발길을 돌려 역으로 피신했다. 아쉬움을 안고 올라탄 기차 안에서 바라본 호수 위 풍경이 기가 막혔다. 평화롭던 수면은 성난 바다처럼 일렁였고 한가롭게 떠있던 요트들은 거의 뒤집어질 듯 위태롭게 요동쳤다. 유럽까지 와서, 그것도 휴양지에서 폭풍우를 만나다니…. 어이가 없었지만 한편으론 ‘이런 게 인생 아닌가’ 싶기도 했다. 그리고 앞서 언급한 곡들에 포함된 어둡고 격렬한 장면들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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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툰 호수를 달리는 유람선
    ▶툰의 눈부신 풍광과 저물녘

    다음 휴가지는 스위스의 ‘툰(Thun)’이다. 툰은 베른에서 30㎞ 남쪽에 위치한 알프스의 휴양도시이다. 툰 호수에서 흘러나와 베른까지 도달하는 아레 강(江)이 시내를 관류하고 있고, 구도심에는 중세부터 전해 내려오는 고풍스러운 건물들이 늘어서 있다. 시 동쪽으로 툰 호수가 시원스레 펼쳐져 있고, 그 주위에는 베르너 오버란트와 융프라우로 이어지는 알프스의 영봉들이 병풍처럼 둘러서서 눈부신 절경을 연출하고 있다. 이 멋진 곳에서 브람스는 1886년부터 1888년까지 여름휴가를 보냈다.

    당시 브람스는 ‘교향곡 제4번’을 발표한 후 전성기의 막바지를 향해가고 있었다. 툰에서의 첫 번째 여름에 탄생한 ‘바이올린 소나타 제2번’은 힘차고 장려하며, ‘첼로 소나타 제2번’은 정열적이면서도 여유롭다. 두 번째 여름의 산물인 ‘바이올린과 첼로를 위한 협주곡(2중 협주곡)’은 장엄하고 치밀하며, 그의 마지막 관현악 작품으로서 폭발적 열정과 냉철한 지성, 중후한 감성을 두루 갖춘 그의 독자적 관현악 세계의 한 극점을 가리키고 있다. 반면에 가까운 지인들의 부음과 병고 소식을 접한 마지막 여름에 완성한 ‘바이올린 소나타 제3번’은 보다 비극적이고 처연하여 그의 만년의 양식을 예고하고 있다.

    그중 한 곡을 귀에 꽂고 호숫가를 따라 난 산책로를 걸었다. 브람스의 거처는 터만 남아 있었지만, 대신 음악이 눈앞의 풍광과 어우러져 한층 입체적이고 더욱 생생하게 펼쳐지는 경험을 했다. 사실 내가 음악을 테마로 여행을 다니면서 가장 기대하는 것이 바로 그런 것이었다.

    그가 머물렀던 장소와 보냈던 시간을 더듬으며 그 음악을 보다 가까이 느끼고 나아가 그 내면에 조금 더 다가서는 것. 그리고 그 여름에 나는 브람스를 더 이상 ‘가을 작곡가’라는 선입견에만 가두어 둘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한편 모두에 언급한 ‘여름 페스티벌’은 8월 중순에 진행될 롯데콘서트홀의 ‘클래식 레볼루션 2021’이다. 열두 번의 공연을 통해서 브람스와 올해 탄생 100주년을 맞은 아르헨티나 작곡가 아스토르 피아졸라의 명작들을 폭넓게 만나볼 수 있다. 무엇보다 음악을 통해서나마 ‘브람스의 여름’을 여행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다.

    [황장원(음악 칼럼니스트, 대원문화재단 전문위원)]

    [본 기사는 매경LUXMEN 제131호 (2021년 8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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