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욱 특파원의 일본열도 통신] 아베, 코로나19 늦장 대응으로 곤욕… 개헌 구상 차질

    2020년 05월 제 116호

  • “긴급 상황에서 국가와 국민이 어떤 역할을 맡아 국난을 넘어설 것인지에 대해 헌법에서 어떻게 규정할 것인지는 무겁고 매우 중요한 과제다.”

    코로나19 확진자가 급증하면서 정부가 적극적 대응에 나서야 한다는 의견들이 폭발하던 4월 7일 국회에 출석한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발언이다.

    아베 총리가 이날 출석한 회의는 중의원 운영위원회다. 현직 총리가 국회 운영을 논의하는 운영위원회에 출석한 것은 45년 만의 일이다. 직전 사례는 장관의 발언에 대한 국회의 반발 수습을 위한 것으로 별 대단한 일은 아니었지만 총리가 운영위원회에 출석한 다른 사례들은 모두 역사적 의미가 큰 국정 현안에 대한 보고 차원이었다.

    아베 총리가 해당 위원회에 출석하게 된 것은 4월 8일부터 5월 6일까지 도쿄와 오사카, 후쿠오카 등 7개 광역지자체를 대상으로 긴급 사태 선언을 설명하는 자리였다. 긴급 사태 선언이 뭐 대단한 일일까 싶지만 일본에서는 사상 처음으로 이뤄지는 일이다.

    긴급 사태 선언이 이뤄지는 법적 근거는 지난 2012년 마련된 신종플루대책특별조치법이다. 지난 2009년 신종플루 확산 당시 의료시설·장비 확보를 강제할 수 있는 수단이 부족했다는 인식에서 만들어진 법이다. 일본 정부와 국회에선 3월 이 법안을 개정해 코로나19에 대해서도 긴급 사태를 발령할 수 있도록 했다.

    코로나19로 인한 긴급 사태 발령을 설명하는 자리에서 아베 총리가 난데없는 헌법 개정을 들고 나온 것은 신종플루대책특별조치법이 헌법엔 근거가 없어서다.

     기사의 0번째 이미지

    아베 신조(왼쪽) 일본 총리가 4월 6일 도쿄 총리관저에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대책본부 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2012년 제정 당시부터 긴급 사태 선언이 기본권 제한 등 위헌 요소가 있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았다. 일본 정부와 국회가 해당법의 구속력에 대해서 많은 제한장치를 걸어두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또 지난 3월 코로나19를 긴급 사태 선언 대상 감염병에 포함시키면서도 시행을 위해선 국회 운영위원회 사전 보고를 거쳐야 하는 단서를 붙인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아베 총리는 코로나19 확산으로 인한 긴급 사태 발령을 계기로 사실상 중단된 개헌 논의의 불씨를 살려보고자 한 것이다.

    아베 총리가 재집권에 성공한 지난 2012년 말 이후 개헌에 속도를 내왔다. 몇 년간 논의를 통해 일본 자민당에서는 자체적인 헌법 개정안의 큰 틀도 마련했다. 다만 일본 여론의 반대가 여전히 강경한 것이 사실이라 현재는 야당을 상대로 국회에서 논의라도 해보자는 제안을 하고 있으나 큰 진전은 없는 것이 현실이다.

    자민당에서 마련한 헌법 개정안엔 4개 항목이 포함돼 있다. 한국 등 주변국에서 가장 염려하는 부분은 평화헌법이란 이름을 안겨준 헌법9조(군사력 보유 및 전쟁 등 금지) 개정이다. 9조 개정이 워낙 이슈가 되다 보니 나머지 3개 항목이 관심을 받지 못했지만 이 중 한 가지가 긴급 사태 조항을 추가하자는 것이다. 자민당 헌법 개정안에서는 국가 비상상황에 행정권한을 일시적으로 강화하자는 것과 선거 없이 의원 임기를 연장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 등을 포함하고 있다.

    자민당에서는 재해가 터질 때면 재해에 대비하기 위해 긴급 사태 조항이 포함된 헌법 개정을 주장해왔다. 이번엔 코로나19를 이유로 세계적 대유행 전염병에 대한 대응을 위해 긴급 사태 조항을 포함한 개정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물 들어올 때 노 젓는’ 식이다. 아베 총리와 자민당에선 이번엔 각국이 강제 조치를 쏟아내고 있는 데다 대응에 따라 확산속도를 늦출 수 있다는 점 때문에 기존에 비해서도 개헌 논의 시작에 우호적 환경이 조성됐다고 보고 있다.

    여론의 움직임도 강제적 수단을 확보할 필요가 있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기사의 1번째 이미지

    일본에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확산하는 가운데 4월 4일 오후 도쿄도(東京都) 신주쿠(新宿)구의 한 파친코점에 임시 휴업 안내판이 설치돼 있다.


    긴급 사태 발령 후 일본 정부와 지자체들의 행보에서 강제 조치 등에 제약이 많다는 사실이 새롭게 확인됐기 때문이다.

    일본은 긴급 사태 발령에도 이동 제한 등 유럽과 미국식의 도시 봉쇄는 불가능하다. 기본권 제한이 가능한 것은 의료 관련 분야에 제한된다. 의료물품·설비를 국가가 사들일 수 있고 또 의료시설 건설 및 장비 보관에 필요한 경우 부동산에 대해 소유자 동의 없는 수용도 가능하다. 사람의 이동을 제한할 수 없다보니 확산방지책으로 등장한 것이 사람들이 모이는 상황을 최소화하자는 것이다. 직장에 재택근무를 요청하거나 각 시설 등에 임시 휴업을 요청하는 식이다. 말은 요청이지만 요청에 응하지 않을 경우 지시를 통해 문을 닫도록 할 수도 있다.

    긴급 사태에서 취할 수 있는 확산방지책의 핵심이 휴업 요청이란 얘기다. 다만 이번엔 긴급 사태 선언 후 휴업 요청이 이뤄지기까지 수일간의 공백이 있었다.

    긴급 사태 선언이 이뤄진 것은 4월 8일이지만 도쿄도가 휴업 요청 시행에 나선 것은 11일, 오사카에서는 13일에서야 이뤄졌다. 긴급 사태 선언 후 각 지자체가 휴업 요청을 할 수 있도록 돼 있지만 이 과정에서 중앙 정부와 협의가 필요하다는 단서조항이 발목을 잡았다. 확산을 막겠다며 가급적 많은 업종에 휴업을 요청하겠다는 도쿄도의 행보에 중앙 정부에서 브레이크를 걸었다. 더 큰 혼란을 막기 위해 기본 생활이 유지될 수 있어야 하고 경제 충격을 최소화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일례로 미장원에 대해선 아베 총리까지 나서 “미장원은 안정적 생활을 위해 필요하다”며 제동을 걸었다. 선술집에 대해선 규제를 하면 음식점까지 대상이 될 수 있다며 정부에서 강력 반대했다. 결국 마음이 급한 도쿄도가 백기를 들었다.

    이 과정에서 시간만 흘러갔다는 인식이 퍼지면서 긴급 사태 선언과 관련한 절차 재검토가 필요하다는 여론이 커지고 있고, 이를 개헌 논의로 확대해 나간다는 게 아베 총리 구상인 셈이다.

    다만 아베 총리의 예상대로 흘러갈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일본 사회에 여전히 전쟁을 불러온 전체주의, 군국주의 등에 대한 거부감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한국이라면 이제는 일상이 된 확진자 동선 공개도 쉽지 않은 것이 일본의 현실이다. 우리 입장에서야 답답할 수 있지만 일본 사회에선 우선 순위가 다르다. 국가권력의 폭주를 막기 위한 마지막 안전장치를 쉽게 풀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제2야당인 국민민주당의 다마키 유이치로 대표가 서구식 이동제한을 검토하자는 발언을 했다 집중포화를 맞기도 했다. 코로나19 이후 나온 아베 총리의 개헌 발언 역시 자민당 내부의 신중론에 밀리고 있다. 다만 코로나19가 진정된 후엔 다시 개헌 논의에 불을 붙이려는 시도가 거세질 것으로 전망된다. 일본 사회의 포스트 코로나19를 주의 깊게 지켜봐야 할 이유다.

    [정욱 특파원]

    [본 기사는 매경LUXMEN 제116호 (2020년 5월) 기사입니다]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매일경제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