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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코로나19·초저금리·고령화 삼중고 시대… 수탁 가능 재산 범위 확대로 신탁이 대세되나

    2020년 04월 제 115호

  • 80대 김 모 회장과 부인 이 모 여사는 자녀가 없어 딸을 입양해서 키워 올해 그 딸이 50대가 됐다.

    현재 딸은 이혼 후 홀로 아들 2명을 키우고 있어 김 회장의 경제적 지원에 의존해왔다. 김 회장은 딸과 외손자들에게 따로 집을 마련해주고 양육비 등 대부분 비용을 부담해줬다. 김 회장 부부는 은퇴 후 막대한 현금성 자산을 보유하고 있으며, 고급 시니어타운에 입주해 생활 중이다.

    그러나 최근 김 회장 부부의 주름살은 깊어만 가고 있다. 김 회장의 건강이 최근 급속도로 악화되면서 딸의 행동이 괴팍하게 변한 것이다. 자신의 두 아들을 데리고 늦은 밤 시니어타운에 찾아와 협박하기 일쑤다. 이유는 돈이다. 그동안 주거비 등 가져간 현금이 수억원에 달하는데 이제는 김 회장 부부의 노후 자금까지 달라는 요구다. 김 회장 부부에게 어느덧 훌쩍 자라 덩치가 산만한 손주들도 이제 귀엽기보다는 무섭다. 최근 딸의 잦은 방문과 이에 따른 실랑이가 이어지면서 시니어타운 관계자들이 딸에게 출입금지 조치까지 내린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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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라마나 영화에 나올 법한 일이지만 KEB하나은행 리빙트러스트센터에 접수된 실제 사례다. 이 센터는 2010년 금융권 최초의 유언대용신탁을 출시하는 등 국내 ‘명가’로 조용히 이름을 알려왔다. 신탁이란 재산을 관리자(은행 등 금융사)에게 맡겨 안전하게 운용하는 제도다.

    이에 따라 하나은행 리빙트러스트센터에선 김 회장에게 유언대용신탁을 설계해줬다. 신탁의 한 종류인 유언대용신탁을 활용하면 살아 있는 동안에는 자신을 수익자로 정해 재산을 관리하고, 사망 후에는 자신이 정한 사람에게 원하는 방법으로 상속하는 게 가능하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는 일부 금액을 안전한 정기예금에 돌리고, 나머지 금액은 매월 이자가 나오는 우량 채권으로 운영해 수익이 날 수 있도록 설정했다.

    또 월별 인출한도를 정해 해당 한도 내에서만 지급되도록 했다. 지급 신청을 할 수 있는 사람을 특정 인물로 제한해 김 회장 딸이 자금 인출을 못하도록 안전장치도 걸었다. 김 회장이 사망할 경우 모든 재산은 부인에게 모두 집행되도록 사후 수익자를 이 여사로 지정했다. 김 회장 사후 법적 문제도 어느 정도 해결된 셈이다.

    그러나 국내에서 이 같은 신탁 활용 사례는 일부 부유층의 전유물로 치부된다. 능력이 되고 여유가 되는 사람들만의 얘기라는 뜻이다. 일본 등 신탁 선진국에선 누구라도 나이가 들면 신탁을 떠올리지만 국내 사정은 그렇지 않다. 세제혜택이 없고 대중 홍보가 불가능하다는 점이 국내 신탁 시장 발전의 발목을 잡고 있다. 실제 신탁 시장을 조율하는 신탁업법 자체가 없다는 점도 아킬레스건이다.

    코로나19 등 글로벌 경기 침체로 인해 제로금리 시대가 도래하고 일본 못지않은 초고령화 시대로 달려가는 국내에서 신탁의 중요성은 날로 커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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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과 반대로 간 한국 신탁

    서울 역삼동 소재 한 은행에서 최근 김 모 씨(82) 유족들이 서로 김 씨 돈을 찾겠다고 싸우는 소동이 벌어졌다. 김 씨를 돌보던 그의 딸이 김 씨 예금에서 돈을 찾아 장례를 치르려 했으나 다른 형제들이 동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은행에선 유언장에 따른 상속 완료 후 예금 지급이 가능하다고 중재했지만 유족 간 싸움은 계속됐다. 일본에서는 많은 노인들이 신탁상품에 가입하고 있어 이런 일이 거의 발생하지 않는다.

    2004년 일본은 신탁업법을 개정해 수탁 가능한 재산 범위를 지식재산권이나 특허권 등으로 확대했다. 또 금융회사가 아닌 로펌 등도 신탁업을 할 수 있도록 영업 범위 제한도 철폐했다. 또 국내 자본시장법에 해당하는 ‘금융상품거래법’을 제정하면서 신탁의 다양성을 확보했다.

    2006년에도 신탁법과 신탁업법을 개정해 세제 혜택이 있는 각종 신탁 상품이 나올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다.

    이에 반해 국내 신탁제도는 일본과 반대로 갔다. 1961년 일본 신탁법을 참고해 신탁법·신탁업법이 처음 시행됐지만 2009년 신탁업법이 폐지되면서 자본시장법에 흡수됐다. 2012년 신탁 재산 확대 등의 내용을 담은 신탁법 개정안이 시행됐으나 규제 중심의 자본시장법이 그대로 있어 아무런 실효성이 없었다.

    신탁 내용을 정리하는 일반법인 신탁법에선 수탁 재산 범위에 제한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실제 시행·규제를 담당하는 특별법인 자본시장법이 신탁 재산 범위를 열거된 재산으로 한정하면서 탄소배출권 등의 새로운 신탁업 수요 창출이 불가능한 상황이다. 현행 자본시장법 103조에 따르면 신탁업자는 금전, 증권, 금전채권, 동산, 부동산, 부동산 관련 권리(전세권·부동산임차권 등), 무체재산권(지식재산권 포함) 등 7가지 외 재산은 수탁할 수 없다고 못 박고 있다. 고동원 성균관대 교수는 “신탁법은 신탁 재산에 대한 제한이 없는 반면 자본시장법은 열거주의를 택하고 있어 다양한 신탁 상품이 나오기 힘든 구조”라며 “신탁 때문에 자본시장법을 개정하는 것은 힘드니 신탁업법을 분리해 신탁 시장을 활성화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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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탁법은 유명무실하고, 신탁업법은 자본시장법에 흡수돼 있어 소비자 입장에선 신탁에 대해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

    신탁 업계에 따르면 국내 고령자들이 신탁을 이용하지 않는 이유로 가입 절차가 번거롭고 다른 상품에 비해 혜택이 없는 데다 신탁상품 자체가 낯설다는 점이 꼽힌다. 일반인 입장에선 신탁상품은 광고·홍보도 없고, 상품 가입을 위해서는 반드시 금융사에 직접 찾아가야 한다는 불편함이 있다.

    특히 다른 상품과 합쳐 규모의 경제를 이루는 ‘합동운용’도 법에서 금지하고 있다. 또 신탁업자를 은행·증권·보험·부동산신탁사로 제한하고 있다. 선진국에서는 로펌 등 다양한 기관에서 신탁 출시가 가능하다. 그러다 보니 국내 신탁제도의 모태가 된 일본 신탁 시장과 격차가 갈수록 벌어지고 있다. 일본신탁협회·한국금융투자협회에 따르면 지난해 9월 기준 일본 신탁 규모는 1224조1000억엔(약 1경3308조원)으로 우리나라 신탁(905조원)의 14.7배에 달한다. 작년 한국과 일본의 국내총생산(GDP) 차를 고려해도 약 4.7배 차다.

    신탁 시장은 상대적으로 작은데 한국의 고령화는 일본을 추월할 것이란 분석도 있다. 2019년 통계청의 ‘세계와 한국의 인구 현황 및 전망’에 따르면 2045년 한국의 65세 이상 고령 인구 비율은 37%로 일본을 넘어서게 된다.

    한국의 노년 부양비(생산연령인구 100명당 고령 인구 비율)는 2020년 22명에서 2065년 88.1명까지 증가할 것으로 예상된다. 속절없이 고령화가 진행되고 있는데 노후 부담은 날로 커지고 있는 상황이다.

    이 같은 상황은 재산 승계 등 ‘부의 자연스러운 이전’과 노후 대비를 위한 ‘종합 자산 관리 수단’ 성격을 갖고 있는 신탁의 중요성이 부각되는 계기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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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외에선 부의 자연스러운 이전 이끌며 대중화

    한국에선 일반인들의 신탁에 대한 이미지가 그다지 좋지 못하다. 사기성 금융 사고에 신탁이 활용된 전례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신탁의 대표적인 흑역사로는 동양증권 기업어음(CP) 사건과 KT ENS 대출 사기 사건이 대표적이다. 2013년 금융 시장을 뒤흔들었던 ‘동양 사태’는 특정금전신탁에서 시작됐다.

    당시 동양증권은 투자자가 접근하기 어려운 CP를 특정금전신탁으로 포장해 대량으로 판매했다. 특정금전신탁을 이용해 증권사가 CP를 쪼개서 사고 파는 게 가능했기 때문이다. KT ENS는 2014년 태양광 발전 프로젝트 파이낸싱에 참여하면서 자산유동화기업어음을 발행해 자금을 모집했다. 이 기업어음을 넣은 특정금전신탁을 은행들이 개인투자자들에게 판매했다. 이후 KT ENS가 1조8000억원 규모 사기 대출에 연루되면서 투자자들이 큰 손해를 입었다.

    반면 해외에선 신탁이 대중화돼 있고 긍정적인 이미지다. 신탁업이 본격적으로 꽃을 피운 미국에선 어릴 때부터 신탁을 접하기 때문에 누구나 신탁상품을 친숙하게 생각한다. 미국 인기 드라마 <가십걸>에서는 “부모 간섭 없고, 돈을 잘 쓰는 ‘트러스트 펀드 베이비(trust fund baby)’들과 안 놀아?”라는 대사가 나온다. 트러스트 펀드 베이비는 부모 또는 조부모가 물려주는 신탁을 갖고 태어난 세대를 뜻한다.

    미국 호주 일본 등에서 신탁이 활발한 이유는 세 가지다. 신탁 계약으로 재산을 맡겨두면 향후 파산이나 압류 등 법적 분쟁에서 자유롭다. 예를 들어 신탁 계약자와 관리자가 파산해도 신탁 재산은 보호된다.

    일본에서는 최근 들어 ‘셀프장례신탁’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1만원에서 1억원까지 현금으로만 설정할 수 있는 이 신탁은 자신이 사망했을 때 장례비용 등에 사용할 수 있도록 가족을 사후수익자로 지정할 수 있다. 유산분할 협의 과정 없이 사후수익자에게 금전을 곧바로 지급하므로 유족들이 고인의 자산으로 장례를 치를 수 있다는 장점이 부각되고 있다. 일본은 일찌감치 초고령사회로 진입하다보니 유언대용신탁도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

    일본에서는 ‘후견제도지원신탁’도 대중화돼 있다. 이 신탁은 계약 체결부터 변경·해지까지의 결정이 가정법원 지시에 따라 이뤄져 법정후견인이 마음대로 자금을 인출·유용하는 부작용을 막고 있다. 일본신탁협회에 따르면 2012년에 도입된 이 신탁은 2018년 9월까지 수탁 건수가 2만1000건에 달했다. 2015년 대비 4배 급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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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탁 1000조 시대 여는

    다양한 국내 신탁

    최근 국내에선 ‘해외 금리 연계 파생결합펀드(DLF) 사태’로 신탁 시장 활성화에 대한 목소리가 높아졌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은행권 DLF에 가입한 투자자 3243명 중 개인 투자자가 3004명(92.6%)으로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했다. 연령별로는 60대 이상이 1462명으로 개인 투자자의 약 절반(48.4%)을 차지했다. 파생상품 투자 경험이 전무한 가입자의 투자금이 1431억원(21.8%)이나 됐다. 고령자들이 신탁 대신 위험 상품에 몰리면서 금융 당국은 부랴부랴 신탁 시장 활성화 대책을 내놨다. 금융위원회는 우선 수탁이 가능한 재산 범위를 확대한다는 방침이다. 현재는 금전·부동산 등 ‘적극재산’만 수탁이 가능하지만, 앞으로는 부채 성격의 자산인 ‘소극재산’과 담보권 등도 수탁이 가능하게 범위를 넓힌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부채를 포함해 예금, 대출, 부동산 등 재산 모두에 대한 효과적인 관리가 가능해진다. 이와 함께 진입 규제 정비에도 나선다. 금융위는 특정 부문별로 금융회사 인가를 내어주는 ‘스몰 라이선스’를 활용해 전문신탁업을 별도로 신설할 계획이다.

    또 장기적으로 신탁업법 제정까지 검토되고 있다. 신탁 시장 규모는 더 커질 전망이다. 작년 말 금융회사에 맡겨진 신탁재산은 전년 말보다 95조1000억원(10.9%) 증가한 968조6000억원으로 사상 최대였다. 그동안의 증가 추세라면 올해 2분기 중에는 1000조원 선을 넘을 것으로 보인다.

    이에 따라 은행을 중심으로 국내 신탁 시장도 경제 규모에 맞게 더욱 커질 것이란 기대감이 부풀고 있다. 최근 하나은행은 100세 시대 안전하고 투명한 종합자산관리를 위해 ‘100년 안심 행복신탁’을 출시했다. 안전한 노후를 위해 ▲노후케어 기능 ▲상속 기능 ▲생활비 지급 기능 ▲안심지급 기능 등 4가지 핵심 기능이 포함된 종합적 생활관리형 신탁상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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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후케어 기능이 개시되면 지급청구대리인이 미리 지정한 생활비 한도 안에서 생활비를 청구할 수 있다. 생활비 외에도 병원비, 간병비, 요양비 용도에 한해서는 증빙서류를 제출하고 지급 청구가 가능하다.

    안심지급 기능은 미리 지정한 한도 이상의 금액을 지급 청구하거나 중도해지 신청하는 경우 지급청구 대리인의 동의가 있어야만 지급을 할 수 있는 기능이다. 이를 통해 고령층의 금융사기 피해를 줄일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신한은행의 ‘신한내리사랑증여신탁’도 눈여겨볼 만하다. 이 상품은 유언대용신탁으로 재산 운영 방안이나 상속의 형태를 위탁자가 지정할 수 있는 맞춤형 상품이다.

    KB국민은행은 치매와 노후를 대비할 수 있는 ‘KB성년후견제도 지원신탁’을 내놨다. 이 상품은 치매가 발병했을 때를 대비한 상품이다. 추후 치매에 걸려 후견인이 필요하면 위탁자가 은행에 치료 자금으로 미리 맡겨 놓았던 금전을 지급한다.

    [문일호 매일경제 금융부 기자]

    [본 기사는 매경LUXMEN 제115호 (2020년 4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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