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태훈의 유럽인문여행! 예술가의 흔적을 찾아서] 색채의 화가로 불린 마르크 샤갈, 이스라엘 예루살렘에서 만나다

    2020년 12월 제 123호

  • 벨라루스 비테프스크, 러시아 모스크바, 프랑스 파리, 독일 베를린, 미국 뉴욕 등 삶의 주거지를 평생 옮겨 다니며 그림을 그려야만 했던 마르크 샤갈. 유대인이라는 꼬리표 때문에 어느 한 곳에서도 정착할 수 없었지만, 그의 작품만은 국경을 초월해 지금까지도 전 세계 수많은 예술가와 팬들에게 사랑받고 있다.

    샤갈은 1887년 7월 7일 벨라루스공화국의 비테프스크라는 유대인 공동체 마을에서 아홉 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스무 살 무렵인 1907년, 샤갈은 러시아제국의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나가 화가가 되기 위해 본격적으로 수업을 받았고, 1910년부터 1914년까지 프랑스 파리에서 유학하며 화가로서의 길을 본격적으로 걷게 되었다. 1915년 다시 고향으로 돌아온 샤갈은 자신의 영원한 뮤즈, 벨라 로젠펠트와 결혼을 하였다. 그러나 1917년 러시아제국이 볼셰비키 혁명으로 무너지고, 사회주의가 등장하자 이념의 갈등이 시작되었다. 처음엔 비테프스크에 새로 설립한 미술학교의 교장도 맡았고, 모스크바에서는 무대미술가로 활동을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순수 예술이 정치적으로 악용되면서 1922년 가족들과 함께 영원히 러시아를 떠나 독일 베를린으로 갔다. 여기서도 유대인의 차별과 박해로 인해 가족들은 다시 프랑스 파리로 이사를 했다가, 1941년 제2차 세계대전 중에 나치의 눈을 피해 미국으로 망명했다. 안타깝게도 1944년 9월 미국 뉴욕에서 사랑하던 아내, 벨라가 전염병으로 사망하자 아내를 잃은 슬픔과 절망으로 인해 더는 그림을 그리지 않았던 샤갈. 몇 년 동안 방황하던 샤갈은 1948년 프랑스로 다시 돌아왔고, 생애 마지막 20여 년 동안은 영원히 파란 하늘과 아름다운 지중해를 끼고 있는 남프랑스에 머물다 사랑하는 아내, 벨라 곁으로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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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색채의 화가로 불리는 샤갈이지만, 그의 작품을 처음 보면 잘 이해되지 않는 요소들이 몇 가지 있다. 하늘을 새처럼 날아다니는 사람, 화염에 휩싸인 마을, 핍박받고 절규하는 유대인들, 사람보다 더 큰 형체의 짐승들. 이처럼 샤갈의 작품은 극도로 부자연스럽고 흉측하고 우스꽝스러운 느낌이다. 하지만 샤갈의 삶을 좀 더 깊숙이 들여다보면 그의 작품은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비테프스크와 사랑하는 아내 벨라 로젠펠트, 그리고 유대교의 한 분파인 하시디즘 등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그중에서도 그의 그림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기 위해서는 비테프스크와 그의 종교관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지금은 벨라루스 비테프스크이지만, 그 당시 이곳은 러시아제국의 변방 도시였고, 마을 주민의 절반이 유대교의 한 분파인 하시디즘을 믿었다. 이 분파를 믿는 유대인들은 사람이 죽으면 영혼이 닭이나 소 같은 동물의 몸으로 들어간다고 생각하였다. 또한 이들은 사람, 소, 닭, 당나귀, 물고기 등의 동물과 나무, 꽃 등 모두 친구가 될 수 있다고 믿었다. 그 결과 샤갈의 그림 속에는 동물이 많이 등장하는데, 이 동물은 단순한 동물이 아니라 하시디즘을 믿는 유대인의 영혼이 형상화된 것이다. 이처럼 그가 믿었던 하시디즘과 비테프스크는 그가 죽을 때까지 그의 예술세계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마침내 샤갈은 고향을 떠나 유대인으로서의 정처 없는 삶이 시작될 무렵인 1931년 2월부터 4월까지 처음으로 영국의 보호 아래 있던 예루살렘을 방문하였다. 이스라엘이 건국되기 전에 예루살렘을 찾은 샤갈은 “청년기 이후 나는 성서에 사로잡혀 있었다. 나에게 성서는 그때나 지금이나 가장 위대한 영혼의 원천이다. 나는 내 삶과 예술에서 성서의 가르침을 따르려고 노력했다”라고 소감을 밝혔다.

    샤갈은 예루살렘에서 제일 먼저 ‘통곡의 벽’이라 불리는 서쪽의 벽을 찾았는데, 유대인들에게 이 벽은 약속의 땅이자 예루살렘을 상징하는 성스러운 장소이다.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예루살렘은 구약성서를 비롯해 페르시아제국, 로마제국, 오스만제국, 십자군 등 인류사에서 아주 중요한 역사의 현장이다. 셈족어로 ‘아름답고 자비로운 신들이 머무는 터전’이라는 뜻이고, 아랍인들은 거룩한 도시라는 뜻의 ‘쿠드스’, 로마인들은 ‘일리아 카토도리나’라고 불렀다. 해발 600~700m에 있는 이 도시는 2000여 년 동안 유대인이 약 550년, 그리스도인이 약 400년, 이슬람교도가 약 1200년을 다스렸을 만큼 이민족의 역사로 점철된 비운의 도시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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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샤갈은 여느 유대인들처럼 토라를 들고 통곡의 벽에 손을 짚고 진심으로 기도도 올렸다. 불혹의 나이를 넘긴 샤갈이지만, 통곡의 벽 앞에서 유대인으로서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한참 동안 이곳에 머물며 유대인들의 모습을 스케치하였다. 그리고 다시 프랑스 파리로 돌아온 샤갈은 1932년에 <서쪽의 벽>이라는 작품을 비롯해 <고독>(1933) <토라를 들고 있는 랍비>(1933) <흰 십자가>(1938) <순교자>(1940) 등을 차례로 발표하였다. 그리고 미국으로 망명을 떠난 뒤에도 유럽에서 독일 나치에게 시달리는 유대인들을 생각하며 <박해>(1941) <황색 십자가>(1943) 등을 그렸다. 이 중에서도 ‘박해’라는 작품은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는 우리가 생각하던 모습과 달리 유대인이 기도할 때 입는 탈릿을 입었고, 유대인 공동체 마을은 불에 타는 등 전쟁의 참화를 온통 푸른색으로 그렸다. 샤갈은 이 그림에 대해 “나는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하늘과 땅 사이에서 태어났고, 이 세상은 거대한 사막이고, 그 안에서 내 영혼은 횃불처럼 떠다니고 있다. 그런데도 나는 내가 오래전부터 간직한 꿈을 실현한다는 의미에서 이 그림들을 그렸다. 나는 사람들이 이 그림들을 보면서 마음의 평화를 얻고 영적인 깨달음과 종교적인 감정, 인생의 의미를 찾을 수 있도록 이 그림들을 미술관에 걸어두고 싶었다”라고 설명하였다. 이처럼 예루살렘은 샤갈에게 의미 있는 도시이자 영감을 준 예술의 원천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으로 600만 명의 유대인이 희생된 후 1948년 팔레스타인에 아랍인과 유대인의 개별국가를 각각 건설한다는 UN의 결정에 따라 이스라엘이 건국되었다. 1951년 이스라엘은 건국을 기념하기 위해 자신들의 종교적 정체성을 많이 그렸던 샤갈의 작품을 예루살렘, 하이파, 텔아비브 등 여러 곳에서 대규모의 전시회를 열었다. 이때 샤갈은 20여 년 만에 다시 예루살렘을 찾았고, 1957년에는 그의 삽화가 들어간 성경책이 출판되면서 또다시 방문하였다. 1962년에는 예루살렘 히브리 의과 대학의 회당을 장식하는 12개의 스테인드글라스를 제작하였고, <토라를 들고 있는 랍비>(1968)와 <십자가에서 내려지심>(1968~1976) 등 끊임없이 유대인과 유대교를 주제로 그림을 그렸다. 그리고 90세가 되던 1977년 10월 샤갈은 예루살렘을 마지막으로 방문했다.

    [이태훈 칼럼니스트]

    [본 기사는 매경LUXMEN 제123호 (2020년 12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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