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미영의 영화로 보는 유럽사] (4) 중세 봉건사회와 영토전쟁 | 영화 <브레이브 하트>와 국민 정체성

    2020년 04월 제 11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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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레이브 하트(1995)


    ‘스코틀랜드’ 하면 백파이프, 남성용 치마 킬트, 스카치 위스키 등이 연상된다. 중심도시가 에든버러인 스코틀랜드는 ‘스코트 사람들의 땅’이라는 뜻으로, 영국 안에서도 독특한 문화와 전통을 유지하고 있다. 영국은 잉글랜드를 중심으로 스코틀랜드, 북아일랜드, 웨일스 등 네 지역이 모여 하나의 국왕을 인정하는 연합 국가로, 정식명칭 또한 ‘그레이트브리튼 북아일랜드 연합왕국(United Kingdom of Great Britain and Northern Ireland)’이다.

    이 같은 스코틀랜드에서 2014년 주민투표를 실시한 결과 ‘분리독립에 찬성한다’는 의견이 44.7%로 상당히 높은 수치를 보여 주목을 받았다. 최근에는 영국의 ‘브렉시트(Brexit)’ 결정을 계기로 ‘제2의 분리독립 주민투표’도 거론되고 있다. 스코틀랜드인의 마음속에 흐르는 ‘우리는 잉글랜드와는 다르다’는 DNA는 언제부터 왜 흐르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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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 간 분열의 역사를 보여주는 영화

    영화 <브레이브 하트(Braveheart, 1995)>는 13세기 말 스코틀랜드 민족영웅 윌리엄 월리스의 사랑과 투쟁, 죽음을 그린 영화로,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 두 지역 간 분열의 역사를 잘 보여주는 중세 영화로 꼽힌다.

    영화의 배경은 1284년, 스코틀랜드 왕인 알렉산더 3세가 왕통을 남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자 잉글랜드 왕 에드워드 1세가 스코틀랜드 왕위를 가로챈 역사적 사실에서 출발한다. 스코틀랜드 농민인 윌리엄 월리스는 잉글랜드와 투쟁하던 아버지와 형이 죽은 뒤 삼촌에게 맡겨져 평범한 소시민으로 성장한다. 그 당시 잉글랜드 왕 에드워드 1세는 잉글랜드 영주들에게 초야권(결혼 첫날밤에 신랑 이외의 남자가 신랑보다 먼저 신부와 동침하는 권리)을 미끼로 스코틀랜드로 가도록 유도한다. 이 때문에 비밀 결혼을 선택한 월리스는 아내가 영주에 의해 살해된 것을 계기로 잉글랜드에 대한 독립 투쟁에 돌입한다. 그는 스털링 전투에서 잉글랜드의 대군을 격파하고, 왕의 조카마저 죽이며 요크를 함락시킨다.

    이 과정에서 월리스는 스코틀랜드 귀족 대표 로버트 더 브루스와 친분을 쌓고 잉글랜드와 싸울 수 있도록 귀족들의 동참을 요청한다. 하지만 월리스는 비극적인 최후를 맞는다. 폴커크 전투에 동참하기로 했던 스코틀랜드의 귀족들이 잉글랜드 왕으로부터 뇌물을 받고 배신함에 따라 전투에서 패하고 만다. 설상가상으로 귀족 대표 로버트의 아버지에 의해 붙잡혀 잉글랜드 군에 넘겨지고, 런던으로 끌려간 월리스는 ‘자유’를 외치면서 사형에 처해진다.

    이후 로버트는 잉글랜드 대군과 싸우기로 결심하게 되고, 월리스의 내레이션이 흐르면서 영화는 막을 내린다. “서기 1314년, 스코틀랜드의 용사들은 배넉번 전투에 임하여 열악한 상황에서도 스코틀랜드인답게 싸웠고 그들의 자유를 쟁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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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빈 후드(2010)


    ▶월리스와 에드워드 1세를 바라보는 시각 차이 <브레이브 하트>는 스코틀랜드 독립을 위해 투쟁한 윌리엄 월리스의 일대기를 각색한 영화로 장엄하고 비장한 분위기가 녹아있다. 멜 깁슨 감독의 이 영화는 1996년 최우수작품상과 감독상을 비롯해 아카데미상 5개 부문을 수상한 대작이다. 그러나 남겨진 기록이 빈약해 덧붙여지거나 각색된 내용이 많아 역사적 고증이라는 측면에서 적지 않은 논란을 가져왔다. 특히 잉글랜드에선 역사 왜곡이라며 상영 금지 주장까지 제기했다. 실제 논란이 된 대목으로는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 간 관점의 차이를 보여주는 두 가지 측면을 언급할 수 있다.

    첫째는 윌리엄 월리스가 영화와 달리 농민이 아닌 지방 귀족 출신이었다는 사실이다. 중세 시대에는 왕국 내의 많은 귀족들이 봉건영주로서 왕과 권력을 나누어 가졌다. 왕은 전국 토지에 대해 명목상의 지배권은 있었지만 실제로는 자신의 직할령에서만 지배권을 갖고 있었고 각 지방은 영주가 실질적인 지배를 하였다. 영주는 국왕에게 군사적 의무 등을 이행하는 대신 하사 받은 봉토 내에서는 간섭을 받지 않고 독자적인 재판권도 행사할 수 있었다. 농민의 대다수를 차지한 농노는 이주의 자유 없이 장원에 종속되어 영주에게 조세와 공납, 소작료, 인두세, 가옥세, 결혼세 등을 바치고 준노예처럼 일하며 장원을 지탱했다. 이러한 중세 봉건제 하에서는 왕이나 영주가 영토를 지키고 확장하기 위해 수많은 영토전쟁을 치러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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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잔 다르크(1999)


    이러한 시대 상황을 감안할 때 윌리엄 월리스가 귀족 출신이었다면 그의 투쟁은 자유와 독립을 향한 스코틀랜드 민중의 저항이라기보다 왕과 귀족들 간의 영토전쟁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는 점이다. 실제로 영화 속에서 농노들은 전쟁터에 나와 “귀족들이 타협을 하면 우린 집으로 가는 거고 아니면 싸워야 한다”고 수군거린다. 또한 엄청난 규모의 잉글랜드 병사들을 보고 놀라 “이 싸움에 이긴들 귀족들 땅만 늘릴 것이고 그러면 더 힘들어질 텐데 뭐 때문에 목숨 걸고 싸워야 하나. 난 귀족들을 위해 죽고 싶지 않다”며 술렁거리는 모습이 나온다.

    논란이 되는 두 번째는 영화 속에 악인으로 등장하는 에드워드 1세가 잉글랜드에서는 국력을 강화한 명군(名君)으로 존경받는다는 사실이다. 이 같은 유능한 왕이 스코틀랜드인에게는 무시무시한 폭군으로 묘사되고 있는 점이다. 그가 영화 속에서 행사한 것으로 묘사한 초야권도 일각에서는 역사적 근거가 없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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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잔 다르크(1999)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 간 지역감정의 역사

    스코틀랜드인 월리스와 잉글랜드 왕 에드워드 1세를 바라보는 시각이 이처럼 상반되는 두 지역 간 감정은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의 단순한 지역 구분은 로마제국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영국을 지배했던 로마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켈트인을 북쪽으로 몰아내고 방어를 위한 성을 쌓았는데, 이것이 그 후 두 지역의 경계로 굳어졌다. 4세기 후반, 앵글로색슨족 등 게르만족이 침략해 오자 로마 군대가 철수하고, 켈트족은 앵글로색슨족에 의해 웨일스와 스코틀랜드 지방으로 무자비하게 쫓겨나게 된다. 영국의 지역감정은 상당 부분 이때부터 시작되고, 잉글랜드는 앵글로색슨 계통, 웨일즈와 스코틀랜드는 켈트계로 나뉘어 각각 통합 왕국으로 발전해간다.

    이후 11세기 후반 스코틀랜드가 잉글랜드의 정복왕 윌리엄의 군대에 패한 뒤 두 나라 사이에 갈등이 계속된다. 이윽고 1296년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1세가 스코틀랜드를 직접 통치하려고 공격을 감행하고 치열한 전투가 이루어진다. <브레이브 하트>에서 볼 수 있듯이, 스코틀랜드의 민족 정체성은 잉글랜드 침입에 대한 치열한 저항에서 강화되었다. 월리스가 처형당한 후 스코틀랜드의 귀족 대표 로버트는 배넉번 전투에서 승리하여 독립하고 로버트 1세로 왕위에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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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더 킹:헨리 5세 (2019)


    ▶국민 정체성을 둘러싼 영국의 사례와 우리의 과제

    약 300년을 유지하던 스코틀랜드 독립은 1603년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6세가 잉글랜드 왕위를 계승하면서 점차 변화하다가 1707년 잉글랜드의 앤 여왕 때 두 나라가 하나의 통치체제를 완성한다. 18세기 초까지 잉글랜드와 끊임없이 갈등을 빚어온 스코틀랜드 사람들은 18세기와 19세기를 거치면서 ‘대브리튼(Great Britain)’ 국민이라는 의식을 형성해간다. 19세기 영국 왕실의 전통과 의례는 더욱 중요해졌고 영국의 어느 지역에서나 대브리튼 국민이라는 의식은 확고해졌다. 이런 점에서 민족주의를 실체가 없는 정치적인 ‘상상의 공동체’라고 언급한 앤더슨(Anderson B)의 주장은 일리가 있는 듯하다. 그는 국민 정체성이 어떤 실체라기보다는 상징과 관습을 통해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대영제국의 해체가 진행되면서 스코틀랜드의 분리주의 운동 또한 세력을 얻기 시작했고, 브렉시트와 함께 가시화된 국민 정체성의 위기는 ‘하나의 영국’이 붕괴할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영국은 어떠한 상징과 이미지 속에서 구심력을 찾을 것인지 자못 궁금하다.

    이러한 문제는 우리에게도 적지 않은 시사점을 준다. 우선 70년간 이질적인 제도 속에서 서로 반목하며 독자적인 정체성을 형성해온 남한과 북한이 주변 열강의 견제를 어떻게 뚫고 통합에 이를 것인가. 또한 빠르게 다문화 사회로 가는 오늘날 우리 현실 속에서 국민 정체성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 우리 사회는 과연 해법을 찾아낼 만큼 지혜와 힘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인가. 우리에게 던져진 과제의 무게감이 묵직하게 느껴진다.

    [이미영 칼럼니스트]

    [본 기사는 매경LUXMEN 제115호 (2020년 4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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