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허연의 인문학산책 ⑮ 코코 샤넬 | 그녀에게는 다 계획이 있었다

    2020년 04월 제 115호

  • 가브리엘 샤넬. 우리가 흔히 코코 샤넬이라고 부르는 여인은 인류 패션사에 매력적인 흔적을 남긴 사람이다. 그녀를 생각할 때면 콤플렉스라는 단어가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그녀는 콤플렉스의 화신이었다.

    사실 인간의 행동을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요인이 콤플렉스다. “한 인간의 진실은 다름 아닌 그가 감추고자 하는 것에 있다”고 했던 앙드레 말로의 말처럼 한 인간의 전모는 콤플렉스를 통해 낱낱이 드러나게 되어 있다. 특히 샤넬의 인생이 그랬다. 그녀는 가난, 고아, 여성, 외모, 불임 등 사람이 지닐 수 있는 거의 모든 콤플렉스를 다 지닌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것들을 보기 좋게 뛰어넘는 회복탄력성(resilience)을 지니고 있었다.

    그녀의 개인사는 그 자체로도 매우 흥미롭지만 인생의 굴곡 하나하나를 극복하는 모습에서는 경탄이 흘러나온다. 그녀는 콤플렉스 덩어리였지만 역설적으로 운명의 지배자였다. 샤넬은 불운과 콤플렉스에서 삶의 동력을 얻은 사람이었다. 이렇게 얻은 동력으로 견고하기만 한 관습과 일대 전쟁을 벌였으니 그녀의 회복탄력성은 정말 놀랍다. 샤넬은 영악한 전사였다. “허무에 빠져 있기보다는 실패하는 게 차라리 낫다”고 외친 그녀는 콤플렉스를 뛰어넘어 자신의 생뿐만 아니라 많은 여성들의 생을 해방시켰다. 남자들과 다른 게 있다면 대포나 비행기를 동원하지 않았다는 사실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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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내 삶을 창조했다

    1883년 프랑스 남서부 소뮈르에서 바람둥이였던 떠돌이 장돌뱅이 청년과 시골처녀 사이에서 태어난 샤넬은 12살 때 폐결핵으로 어머니를 잃는다. 샤넬은 고아원에서 바느질을 배운다. 그녀가 고아원 시절 끔찍하게도 싫어했던 바느질은 훗날 그녀의 가장 중요한 자산이 된다. 18살 무렵 고아원을 나온 샤넬은 기능을 살려 봉제공장에서 일을 했다. 하지만 하루 종일 옷감을 자르고 바느질을 하면서 젊은 날을 보내기에는 샤넬의 꿈은 너무 컸다. 그녀는 이때부터 하나씩 하나씩 삶을 꾸며나가기 시작한다.

    “나는 내 삶을 창조했다. 이전까지의 내 삶이 싫었기 때문이다.”

    샤넬은 밤에 아르바이트를 시작한다. 술집에서 그녀는 ‘코코가 누구를 만났나요’라는 노래를 즐겨 불렀다. 이 노래 때문에 손님들은 그녀를 ‘코코’라고 부르기 시작했고 이것이 굳어져 그녀의 예명이 된다. 가수의 꿈이 없었던 그녀는 술집에서 부유한 장교 에티엔 발잔을 만나 그곳을 탈출한다. 영화 <기생충>의 유명한 대사가 생각난다.

    “너는 다 계획이 있구나.”

    발잔의 정부가 되어 파리 근교 별장에 머무르게 된 그녀는 남성용 승마복과 스웨터를 여성용으로 개조하는 멋진 솜씨를 발휘한다. 여성해방과 자유의 아이콘이 된 샤넬 룩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발잔의 도움으로 자신의 첫 번째 상점인 모자가게를 연 샤넬은 더 큰 계획을 실천에 옮긴다. 발잔을 통해 상류층에 진입한 그녀에게 세상은 거대한 실험실이었다. 샤넬은 발잔마저도 냉정하게 버린다. ▶남자 없이 내 패션이 가능했을까?

    27살 무렵 샤넬은 발잔의 친구인 폴로 선수 아서 카펠과 사랑에 빠진다. 발잔에게 이별 선언을 한 샤넬은 카펠의 후원 아래 휴양지 도빌에 스포츠 웨어를 취급하는 상점을 낸다. 이곳에서 그녀는 여인들을 해방시켜 줄 패션 혁명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치마의 길이를 무릎까지 올리고, 여성용 바지를 따로 만들어 여성들의 다리를 해방시켰고, 가방에 어깨끈을 달고, 의상에 패치 포켓을 달아 여성들의 손을 해방시켰다.

    샤넬의 디자인은 당시 여성들이 새롭게 맞닥뜨린 현실과 너무나 잘 일치했다. 1차 대전으로 남자들이 전쟁터로 떠난 사이 여성들은 경영자가 되거나 기술자가 되어 남자들의 일을 해야 했다. 집에만 있는 게 아니라 대중교통을 이용해 출퇴근을 하는 여성들이 늘어났다. 레이스와 장식으로 칠갑한 의상을 입고 의자에만 앉아 있던 여인들의 모습은 사라져가고 있었다.

    샤넬의 이름은 이런 새로운 시대의 조류를 타고 전 유럽에 퍼져나갔다.

    카펠이 교통사고로 갑작스럽게 사망한 뒤 샤넬은 영국의 부호 웨스트민스터 공작과 사랑에 빠진다. 샤넬은 웨스트민스터 공작과 지내면서 영국 귀족 스포츠 패션의 매력을 자신의 의상에 녹여내기 시작했다. 샤넬 특유의 스웨터와 카디건, 배기팬츠 스타일은 그렇게 탄생했다. 그녀는 어떤 남자를 만나 사랑에 빠지든 쾌락이나 감정의 늪에서 허덕이지만은 않았다. 그녀는 남자를 통해 무엇인가를 배우고 창조했다. 사랑을 통해 좁아지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통해 넓어졌다.

    “나는 사랑하는 남자와 사랑하는 패션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나는 의상을 택했다. 물론 내 인생에서 남자들이 없었다면 나의 ‘샤넬’이 가능했을지 가끔 의문이 들기는 하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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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냥 ‘샤넬 N˚5’로 해줘요.”

    ‘행동하는 여자의 옷’ 도빌룩을 전 유럽대륙에 유행 시킨 샤넬은 훗날 그녀를 대부호로 만들어준 향수 사업에 진출하게 된다. 물론 여기에도 한 명의 남자가 등장한다. 러시아 황제 니콜라스 2세의 조카로, 망명한 러시아 부호 드미트리 파블로비치 대공이다. 향수에 관심이 많았던 그녀는 파블로비치의 주선으로 궁정 전속 조향사 출신인 에르네스트 보를 만나 자신의 첫 향수를 만들어 달라고 의뢰했다. 1921년 이렇게 ‘샤넬 N˚5’가 탄생한다.

    ‘샤넬 N˚5’는 디자이너의 이름이 들어간 사상 첫 번째 향수였는데 이름을 짓게 된 사연이 있다. 에르네스트 보는 1번부터 24번까지 번호를 매겨 향수 샘플을 만들어 왔다. 냄새를 맡아 본 샤넬은 5번째 향수를 선택했다. 향수의 이름을 짓는 일이 남았다. 페트로비치와 에르네스트 보가 귀족적이고 낭만적인 이름을 고민하고 있을 때 샤넬이 말한다.

    “그냥 ‘샤넬 N˚5’로 해줘요.”

    샤넬의 주얼리 사업도 페트로비치를 만나 러시아 귀족 문화에 눈을 뜨면서 얻어낸 아이디어였다. 샤넬은 귀족적인 주얼리에 실용성을 집어넣었다. 남편의 경제적 능력을 과시하던 여성의 귀금속 장신구를 여성의 아름다움을 완성시켜주는 도구로 변화시켰다. 샤넬은 과감하게 인조 보석을 도입했다. 인조 보석을 장신구에 도입하자 여성의 액세서리는 ‘가성비’를 장착하고 무한정 다양해질 수 있었다. ▶샤넬의 콤플렉스가 샤넬을 가능하게 했다

    샤넬 인생의 가장 큰 위기이자 실수는 2차 대전 때 일어난다. 파리가 독일군의 손에 들어간 1940년대 샤넬은 13살 연하의 독일군 장교 한스 귄터 폰 딩클라게와 동거를 한다. 샤넬이 딩클라게와 진정한 사랑을 나눈 것인지 아니면 독일군 점령 하에서 살아남기 위해 그렇게 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진실을 그녀만이 알 뿐.

    어쨌든 ‘다 계획이 있는’ 이 여인은 엄혹한 상황에서도 뭔가를 한다. 자신의 옛 애인인 웨스트민스터 공작의 친구로 평소 안면이 있던 윈스턴 처칠에게 모종의 공작을 시도한 것이다. 샤넬은 1943년 처칠이 스페인을 방문했을 때 스페인으로 가서 처칠과의 접촉을 시도한다. 패전을 눈앞에 둔 독일군의 지시에 따른 것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계획은 처칠과 독일 수뇌부를 연결시켜 정전협정 비슷한 것을 이끌어 내려는 것이었는데 잘 되지는 않는다. 스파이 행위와 다를 바 없는 이 행위는 샤넬에게 큰 오점이 된다.

    파리가 해방된 후 점령군에 협력한 혐의로 구금되어 있던 샤넬은 스위스로 망명을 떠난다. 파리에서 고초를 겪고 있는 샤넬을 도와준 것이 다름 아닌 처칠이었다는 설이 유력하다. 망명 생활을 하던 샤넬은 1954년 귀국해 새 컬렉션을 발표한다. 그녀가 따가운 눈길에도 귀국을 결심한 건 크리스찬 디올의 등장 때문이었다. 실용보다 아름다움을 강조한 디올의 디자인이 패션의 수도 파리를 장악한 걸 보고 자극을 받은 것이다. 새롭게 선보인 샤넬 룩은 파리에서는 예전과 다를 바 없다는 혹평을 받았지만, 미국에서는 모던한 스타일의 재탄생이라며 박수를 받았다. 그 이후로도 샤넬은 열정적인 활동을 이어가다 1971년 88세로 생을 마친다.

    다시 콤플렉스 이야기로 돌아가서 끝을 맺자.

    샤넬이 말년에 이르자 많은 전기 작가와 출판업자들이 그녀의 자서전 출판 경쟁을 벌였다고 한다. 그러나 결국 자서전은 그녀 생전에 출판되지 못했다. 그녀가 자신의 과거를 너무 미화하고 싶어 했기 때문이다. 얼마나 족쇄 같은 콤플렉스였으면 죽는 날까지 숨기고 싶었을까. 하지만 코코 샤넬을 만든 건 바로 그 콤플렉스였다. 그 콤플렉스가 패션사와 여성사에 그녀의 이름을 새겨 넣게 만들었으니까.

    [허연 매일경제 문화전문기자·시인 ]

    [본 기사는 매경LUXMEN 제115호 (2020년 4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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