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미영의 영화로 보는 유럽사] (5) 중세 십자군 전쟁 | 영화 <킹덤 오브 헤븐>과 성지 예루살렘의 의미

    2020년 05월 제 116호

  • ‘십자군 전쟁’은 기독교가 이슬람에게 빼앗긴 성지를 되찾기 위해 일으킨 중세 최대 규모의 종교 전쟁이다. 그러나 십자군 전쟁이 발생하게 된 이면의 다양한 이유들과 200년 동안 8차례나 진행된 전쟁 과정을 보면 과연 이 전쟁이 종교 전쟁이었는가에 대한 의문을 품게 된다.

     기사의 0번째 이미지

    킹덤 오브 헤븐(2005)


    ▶십자군 전쟁을 다룬 영화 <킹덤 오브 헤븐> <킹덤 오브 헤븐(Kingdom of Heaven, 2005)>은 수차례의 십자군 전쟁 중 제3차 원정 직전에 벌어진 살라딘의 예루살렘 함락 상황을 다룬 영화이다. 살라딘은 이슬람 군주이자 실존 인물이다. 영화는 자살한 아내로 슬픔에 잠겨있는 프랑스의 대장장이 발리앙에게 십자군 기사 고프리가 찾아오는 것으로 시작한다. 자신이 발리앙의 아버지라는 사실을 밝힌 고프리는 예루살렘으로 함께 떠날 것을 제안하고 발리앙은 처음에 거절하지만 자살한 아내와 사제를 죽인 자신의 구원을 위해 성스러운 도시 예루살렘으로의 여정을 시작한다. 발리앙은 고프리로부터 여러 가지 검술과 전술 등을 배우며 용맹한 전사로 거듭나고, 매복 기습 공격으로 치명적인 부상을 당한 고프리는 아들 발리앙에게 기사 작위와 함께 예루살렘의 평화를 수호할 임무를 물려준다.

    발리앙이 정식 기사가 되어 예루살렘 군사령부로 들어갈 때, 그는 광장에서 아랍족을 학살한 기독교 기사들이 처형되는 장면을 본다. 이들은 국왕 보두앵 4세가 예루살렘을 모든 종교의 성지로 개방하고 이슬람 군주 살라딘과 화친을 유지하려는 정책을 어겨 처벌을 받은 것이다. 그러나 당시 기독교 광신도들은 이교도를 죽이는 건 살인이 아니라 천국으로 가는 길이라고 믿었던 터라 발리앙은 이들이 교황의 명령을 따르다가 죽는다고 중얼거린다. 감독은 이 장면을 통해 종교의 이름으로 저질러지는 만행이 다시 죽음을 몰고 오는 아이러니를 지적한다. 발리앙은 보두앵 4세를 알현하고 충성을 서약한다. 발리앙이 사랑에 빠진 왕의 동생 시빌라 공주는 교회 기사단의 우두머리 기와 이미 정략 결혼한 상태였다. 전쟁광으로 나오는 기는 폭력적인 광신도 기사 레이놀드를 앞세워 무슬림을 공격하지만 보두앵 4세는 현명하게 대처해 이를 막는다.

     기사의 1번째 이미지


    하지만 왕이 병으로 죽음을 맞이하면서 시빌라와 혼인한 기는 왕이 되고 무모하게 일으킨 전쟁에서 대패하면서 포로가 된다. 뒤늦게 참혹한 살육의 현장을 찾아간 군사 고문의 긴 탄식을 통해 감독은 십자군 전쟁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얘기한다. “처음에는 우리가 하느님을 위해 싸운다고 생각했지만, 이제서야 진정 우리가 돈과 땅을 위해 싸웠다는 사실을 깨달았네. 수치스럽군…."

    성 밖 전투에서 군사들이 거의 몰살당한 상태에서 발리앙은 살라딘의 대군에 맞서 성을 지키려 하지만 성벽이 무너지고 만다. 덕을 갖춘 이슬람 지도자 살라딘은 관용을 베풀어 예루살렘의 주민들이 기독교의 땅으로 안전하게 갈 수 있도록 보장하고 예루살렘을 얻는다. 발리앙은 고향에 돌아오지만 성지를 되찾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가는 리처드 왕을 만난다. 영화는 “사자왕 리처드의 3년간에 걸친 십자군 원정은 살라딘과의 불편한 타협으로 끝났다.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도 하늘의 왕국에는 평화가 멀기만 하다”는 자막으로 끝을 맺는다.

     기사의 2번째 이미지

    글래디에이터-템플 기사단(2007)


    ▶관용의 상징 살라딘 vs 협상의 상징 발리앙 <킹덤 오브 헤븐>은 기독교 입장에서 이슬람 세계를 그린 기존의 할리우드 영화와는 달리 기독교인과 아랍인에 대한 시각이 비교적 공정하고 균형이 잡혀있다. 십자군 전쟁의 추악한 속살을 드러내면서도 양심을 지키려는 인물로 살라딘과 발리앙을 부각시킨다.

    살라딘은 13세기 단테의 <신곡>에서조차 ‘림보’에 살고 있는 영웅으로 그려지는 이슬람 군주이다. 단테는 저승세계로의 순례여행을 주제로 한 <신곡>에서 기독교가 성립되기 이전에 태어나 세례를 받지 못했거나 그리스도를 몰라 어쩔 수 없이 영혼이 지옥에 머무는 곳으로 림보를 설정하고 이곳에 호메로스, 호라티우스, 아리스토텔레스, 소크라테스 등과 같은 위대한 인물과 살라딘의 영혼이 함께 머무는 것으로 묘사했다. 그만큼 살라딘은 십자군을 격파하고 예루살렘을 탈환한 이슬람 지도자임에도 불구하고 존경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이 영화에서도 살라딘은 관용과 용기, 지략을 겸비한 훌륭한 전략가로 등장한다.

    발리앙 역시 가족이나 시빌라 공주와의 관계에서 각색이 이루어지긴 했지만 십자군 전쟁 당시 군사적 능력과 협상 능력이 뛰어났던 실존인물이다. 발리앙이 수성전을 준비하면서 연단에 올라 사람들을 향해 외친 연설은 21세기 우리들에게 던지는 메시지로 읽힌다. “이제 예루살렘의 수호는 우리 손에 달렸다… 우리들은 (태어나지 않아) 저지르지도 않은 공격 때문에, 그 때에 태어나지도 않았던 자들의 공격을 받는 것이다. 예루살렘은 무엇인가? 그대들의 성지는 로마인들이 무너뜨린 유대인들의 성지 위에 지어졌고, 무슬림의 성지는 그대들의 성지 위에 지어졌다. 무엇이 더 신성한가. 벽? 모스크? 성묘? 그 누가 이 땅을 가질 권리를 갖고 있는가? 모두가 갖고 있다!… 우리가 이 도시를 지키는 것은 그런 돌덩이를 위한 것이 아니라, 이 성벽 안에 사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그는 성벽이 무너진 후 성지가 아닌 성벽 안의 사람들을 위해 살라딘과 협상했고 그들을 모두 지켜냈다.

     기사의 3번째 이미지

    더 킹덤 앳 로즈 엔드(2008)


    ▶Nothing & Everything!

    영화에서 ‘킹덤 오브 헤븐’이 의미하는 지역인 예루살렘은 유대교와 그리스도교, 이슬람교의 성지이며 서구 역사에서 매우 중요하고 신성시되는 곳이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이 지역은 각 종교의 이름으로 옛날부터 분쟁이 끊이지 않았다. 로마 시대는 그리스인과 유대인, 중세에는 무슬림과 기독교인, 근대 시대에는 대영제국과 오스만 제국, 현대 시대에는 아랍인과 유대인들이 서로 싸우는 지역이다.

    영화에서 발리앙은 예루살렘의 의미를 처음에는 자신과 아내의 구원을 위해, 아버지에게 기사작위를 받은 후에는 성지 수호와 평화유지에 두지만, 결국 신은 성지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신에 대한 믿음을 품고 있는 자신의 가슴 속에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런 발리앙이 협상을 마치고 살라딘에게 묻는다. 당신에게 예루살렘이 갖는 의미는 무엇이냐고. 살라딘 역시 성지(聖地)가 허상이라는 것을 알기에 “Nothing”이라고 대답한다. 그러나 그는 예루살렘이 “Everything”이라고 덧붙임으로써 아무 것도 아닌 것에 모든 것을 걸기도 한다는 점을 일깨운다. 실상은 Nothing이지만 현실에서는 Everything이 되는 아이러니.

     기사의 4번째 이미지

    더 킹덤 앳 로즈 엔드(2008)


    사실 유대교와 기독교, 이슬람교는 아브라함으로부터 유래해 뿌리가 같은 종교인 셈이다. 같은 하느님을 믿고, 구약성서를 공유한다. 하지만 기독교가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로 보며 삼위일체 유일신임을 믿는 반면, 유대교에서는 예수를 랍비의 한 사람으로, 이슬람교에서는 위대한 선지자의 한 사람으로 존경한다. 그리고 이슬람교는 아브라함의 적자를 본처가 낳은 이삭이 아니라 몸종이 낳은 맏아들 이스마엘로 보며 이스마엘의 자손인 무하마드를 참 선지자로 믿는다. 중요한 것은 세 종교는 결국 한 분의 유일신을 믿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각자의 종교를 내세워 전쟁을 벌이고 자신의 신만이 절대적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기사의 5번째 이미지
    ▶ 여기를 누르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인간의 탐욕과 폭력, 그리고 십자군 전쟁

    십자군 전쟁은 1096년 1차로 구성된 십자군을 시작으로 약 200년간 8차례에 걸쳐 이루어졌다. 성지 탈환이라는 명목상의 목적이 달성된 것은 1차 십자군 원정 때뿐이고 나머지 원정에서는 타락과 실패만 거듭했다. 십자군 원정의 명분은 박해받는 기독교도를 위해 성지를 탈환하는 데 있었지만 사실 불순한 목적이 숨어있었다.

    11세기 비잔티움(동로마) 제국은 내부의 분열과 외세의 침입으로 어려운 상황에 처해있었고 튀르크족에게 예루살렘과 아나톨리아 지역을 잃게 되었다. 알렉시우스 동로마 황제는 서유럽 교황 우르바누스 2세에게 소수 병력의 지원을 요청했지만, 기독교 유럽을 통일하고 수장이 되려는 우르바누스 2세는 공격적 성격의 군대를 파병한다.

    십자군 제창으로 유명 무명의 기사들이 대거 몰려들었고 농민들도 적극 호응했다. 이들 중에는 순수한 신앙심으로 원정에 가담한 이도 있으나, 주로 상속받을 토지와 재산이 없는 차남 이하의 기사들로 구성된 봉건 영주와 하급기사들이 새로운 영토 지배의 야망에서, 상인들은 경제적 이익에 대한 욕망에서, 농노 상태에 있던 농민은 봉건사회의 중압으로부터 벗어나려는 희망에서 저마다 원정에 가담했다.

    1차 원정에서 십자군은 1099년 예루살렘 입성에 성공했지만, 6주간 계속된 전투에서 피비린내 나는 학살을 자행했다. 영화에서 보두앵 4세가 죽은 뒤 한 구호 기사단원이 앞으로의 일을 걱정하면서 “백 년 전의 일에 대한 응보가 일어날 겁니다. 무슬림들은 절대 잊지 않을 겁니다… 잊어서도 안 되고”라고 하는 말은 십자군들의 당시의 끔찍한 만행을 연상시킨다. 이후에도 유럽은 여러 차례 십자군 운동을 일으키지만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다.

    8차례 십자군 원정 중 4차 원정은 성지 탈환이라는 명분과 관련 없는 가장 추악한 전쟁으로 기록된다. 같은 기독교 국가인 비잔틴 제국의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해 고대 로마 때부터 전해 내려온 예술품, 유물, 성물 등 눈에 띄는 모든 것을 파괴하고 약탈하며 방화했다. 심지어 수도원의 묘역에 있는 황제의 관까지 끄집어내 부장품들을 약탈했다고 한다. 십자군 전쟁 중에 유럽에서 ‘소년 십자군’ 모집에 응한 소년들을 선주가 몽땅 알렉산드리아 노예로 팔아넘기는 잔혹한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십자군 전쟁의 복잡한 동기와 200년간 진행된 전쟁의 참상을 보면 신의 이름으로 벌어지는 인간의 탐욕과 폭력성이 얼마나 무시무시한지 소름이 돋는다. 영화에서는 하늘의 왕국(Kingdom of Heaven)이 예루살렘을 의미하지만, 그 곳은 성지라는 물리적 공간이 아닌 모든 종교가 평화롭게 공존하도록 노력하는 양심적인 머리와 가슴 속에 있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예루살렘은 오늘날에도 성지를 탈환하기 위한 전쟁이 계속되고 있다.

    속죄를 받기 위해 예루살렘에 간다는 발리앙에게 죽음을 앞둔 고프리가 당부한 말이 가슴을 울린다. 예루살렘은 신분의 차별 없이 누구나 자기 능력을 펼칠 수 있는 구원의 땅이고 기독교와 이슬람의 공존이 가능한 세계라고. 양심이 살아있는 하늘의 왕국을 만들라고. 과연 이러한 당부는 언제쯤 실현될 수 있을까.

    [이미영 칼럼니스트]

    [본 기사는 매경LUXMEN 제116호 (2020년 5월) 기사입니다]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매일경제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