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미영의 영화로 보는 유럽사] (15) 제국주의와 아프리카 침탈 | 영화 <하르툼 공방전>과 수단의 흑역사

    2021년 03월 제 126호

  • 19세기 후반 과학기술이 비약적으로 발달하고 산업혁명이 본격적으로 진행되면서 자본주의는 급성장기에 들어선다. 유럽 각국은 유럽 시장만으로는 한계를 느낄 수밖에 없었다. 쌓여가는 상품을 팔아치우고 싼값에 원재료를 조달하며 자본을 투자할 곳을 찾아 나서야 했다. 여기에다 경제적인 민족주의가 고조되면서 전 세계를 대상으로 한 경쟁에 불이 붙었다. 유럽 강국은 이러한 국내외 상황에 대한 해법을 ‘식민지’에서 찾으려 했고, 1870년대부터 1914년까지 약 40년 동안 침탈을 기본으로 하는 제국주의가 맹위를 떨쳤다. 이 같은 식민지 쟁탈전으로 아프리카와 아시아, 태평양에 흩어져 있는 섬들이 대거 유럽 각국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아프리카는 에티오피아를 제외한 모든 지역이 식민지를 경험한 대표적인 식민지 수탈지역이다. 영국과 프랑스를 양대 축으로 독일, 이탈리아, 포르투갈, 스페인, 벨기에까지 힘깨나 쓰는 유럽 국가들이 대부분 아프리카에 식민지를 뒀다.

     기사의 0번째 이미지
    ▶파쇼다 사건이 발생한 수단

    1898년 7월 프랑스 육군 원정대가 아프리카의 수단 남부 지역에 자국 깃발을 게양하여 영국 육군과 충돌한 사건이 발생한다. 바로 식민지 확장에 열을 올리던 영국의 종단 정책과 프랑스의 횡단 정책이 충돌한 파쇼다 사건이다. 영국은 카이로에서 케이프까지를 완성하여 북쪽 식민지인 이집트와 아프리카의 남부지역을 연결하려 했고, 프랑스 역시 사하라 무역로를 통해 서아프리카 식민 제국과 동쪽에 차지한 땅을 연결하려고 했다.

    그렇다면 파쇼다 사건이 일어난 수단에서는 어떤 일이 있었을까. 당시 수단은 영국의 식민지로 전락한 이집트의 속국, 다시 말해 식민지의 식민지 상태였다. 이집트는 1870년대 중반 이후 수에즈 운하 건설로 짊어진 부채를 감당하지 못해 사실상 영국의 반식민지로 전락했다. 그리고 수단에서는 ‘무함마드 아마드’가 스스로를 이슬람교도의 구세주인 ‘마흐디’로 칭하며 이슬람을 결집하는 독립 운동이 일어난다.

    1881년 마흐디군은 신정정치를 하는 마흐디국을 수립하고 이후 대영제국과 몇 차례의 전투를 벌인다. 그중 유명한 두 개의 전투가 있는데, 하르툼 전투(1884~1885)와 옴두르만 전투(1898)가 그것이다. ‘하르툼 전투’는 영국의 찰스 고든 장군이 참수당하고 원주민들이 세운 마흐디국이 압승한 전투인 반면, ‘옴두르만 전투’는 마흐디국이 반나절 만에 허무하게 무너져 수단이 영국의 식민지로 전락하게 된 전투이다.

     기사의 1번째 이미지
    ▶마흐디국의 승리를 다룬 영화 <하르툼 공방전>

    영화 <하르툼 공방전>(1966)은 인류문명의 발상지인 나일강의 장엄한 모습과 영원불멸을 믿는 신비스러움, 광활한 사막의 장면이 펼쳐지며 시작한다. “1880년대 수단에 신비함과 허영심, 통찰력을 지닌 한 사람(무함마드 아마드)이 자신을 ‘마흐디’라 칭하며 사막에서 부족들을 모아 이집트와 세계에 도전했다”는 자막과 함께.

    독립을 주장하는 원주민 마흐디군의 위세가 커지면서 이집트는 영국 힉스 장군의 지휘를 받는 원정군을 투입하지만 창칼로 무장한 마흐디군에 의해 전멸당하고 만다. 당시 수단 문제에 개입하기를 원치 않았던 영국은 수에즈 운하를 보유하고 있는 이집트에 대한 최소한의 의무로서 하르툼시에 있는 이집트인을 철수시키기로 결정하고 고든 장군을 파견한다. 그는 독실한 기독교 신앙인으로 별난 기질이 있긴 하지만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는 유능한 장군이었다. 중국에서 태평천국운동을 진압해 ‘중국의 마흐디’란 별명을 얻었고 수단 총독으로 있을 때 노예제도를 폐지해 수단 내에서도 평가가 괜찮은 편이었다.

    그러나 고든 장군이 하르툼에 도착했을 때 그 지역에 이집트인과 유럽인이 생각보다 많았고, 이미 주변 여러 지역이 포위당해 있었다. 현실적으로는 하르툼 지역을 버리고 그곳을 떠나는 것이 가장 적절한 방안이었지만, 고든 장군은 영국 정부의 명령을 어긴 채 지원군을 요청하며 도시에 방어 태세를 갖추었다. 그리고 2000명 이상의 민간인을 나일 강 하류로 대피시키지만 하르툼은 이내 마흐디군에게 포위당하고 만다. 마흐디는 수단 부족들의 지지를 얻어 외부연락을 차단하기 위해 하르툼과 카이로 사이의 전신선을 끊었고, 하르툼 요새 안에서는 굶주림과 병마가 창궐하여 많은 수단인이 죽어갔다. 고든이 고립되자 영국은 여론에 떠밀려 가넷 우즐리 경을 원정군으로 파견하지만 구원군이 도착하기 직전 고든 장군은 참수당하고 하르툼은 313일간의 포위전 끝에 함락된다.

     기사의 2번째 이미지
    ▶고든 장군은 수단인의 구원자인가, 변형된 정복자인가

    영화는 고든 장군의 동상을 보여주며 “이후 15년간 수단인들은 역병과 기아에 시달리고 영국은 수치와 전쟁에 시달리게 됐다”고 언급한다. 또한 “고든은 그가 사랑하는 수단에 묻혔고 고든과 같은 자를 위한 자리가 없는 세상은 모래흙으로 돌아갈 세상에 불과하다”는 내레이션으로 끝을 맺는다. 감독이 고든 장군을 수단인의 구원자처럼 묘사했다는 느낌이 드는 대목이다.

    그렇다면 감독의 생각처럼 고든 장군은 수단인의 구원자였을까, 아니면 또 다른 유형의 정복자에 불과했을까. 판단을 위해서는 그가 영국 정부의 명령을 어기면서까지 수단인의 독립 주도세력인 마흐디군과 대치하며 하르툼 공방전을 펼친 이유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마흐디군은 당시 수단에서 일어난 이슬람 민족주의 저항운동의 핵심세력이었다. 고든은 구세주로 추앙받는 무함마드 아마드(마흐디)처럼 자신도 기독교인으로 기적을 일으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

    온정적 제국주의자 고든 장군과 수단 독립을 내걸고 맞서는 마흐디군, 마흐디의 저주를 받으면서까지 고든을 지지할 수밖에 없었던 하르툼 족장들, 그리고 생존을 위해 양쪽 사이에서 우왕좌왕하는 일반 수단 국민들. 식민지마다 예외 없이 비슷하게 전개되는 역사 속 실존 인물들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누구의 시각에서 보느냐에 따라 고든에 대한 평가는 달라질 수밖에 없다. 다만 고든의 경우 수단인을 지배의 도구로만 보지 않고 상대적으로 따뜻하게 대한 정복자라는 점에서 약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기사의 3번째 이미지
    ▶하르툼 공방전이 옴두르만 전투로 이어지다

    하르툼 전투 이후 무함마드 아마드는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하고 후계자인 압달라히 이븐 무함마드가 마흐디국을 13년간 통치한다. 이집트의 수단 재정복에 대한 야심과 유럽 열강의 아프리카 식민화가 가열되는 가운데 영국은 13년 만에 고든 참수에 대한 복수를 한다며 대규모로 수단을 침공한다. 영국·이집트군 총사령관인 키치너 장군은 영국의 아프리카 종단 정책을 수행하기 위해 수단 지방의 반란을 막으면서 철도를 부설하고 1898년 9월 옴두르만 전투에서 마흐디로부터 항복을 받아낸다. 이 전투에서 마흐디군은 1만 명 이상 살해된 반면 영국 측 사망자는 48명에 불과했다.

    하르툼 전투에서 참패했던 영국이 옴두르만 전투에서 대승을 거둘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여러 가지 요인이 있겠지만 맥심기관총이라는 무기의 역할이 컸다. 하이람 맥심이 개발한 이 총은 방아쇠만 당기면 총알이 드르륵 나가는 완전 자동화된 방식으로 이전의 원샷 원킬의 기관총과는 질적으로 달랐다. 한 사람 한 사람 조준할 필요도 없고 그 사람이 쓰러지는 모습을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단지 조준하고 방아쇠만 당기면 됐다.

    윈스턴 처칠은 젊은 시절 참전했던 이 전투에 대해 저서인 <강의 전쟁: 수단 정복>에서 “불과 다섯 시간 만에 야만인을 싹 쓸어버린 현대문명의 가장 위대한 승리”라고 강조했다. 참으로 어이없는 표현이지만 말 그대로 학살에 가까운 전투였다. 옴두르만 전투에서 신앙의 힘으로 침략자를 물리치려던 수단군은 추풍낙엽처럼 죽어나갔고 최대 공신은 맥심기관총이었다. 이후 영국은 이집트와 공동주권으로 수단의 신민 통치에 들어갔다. 이러한 식민지배는 수단이 독립한 1956년까지 이어진다.

     기사의 4번째 이미지
    ▶여전히 남아있는 제국주의의 깊은 상처

    수단의 역사는 제국주의가 팽창한 과정과 인류에 끼친 폐해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다. 제국주의는 대외 팽창을 통한 자국 이익의 극대화에 초점을 맞췄기 때문에 침략이나 전쟁의 명분은 그때그때 달랐다. 1880년대 영국에 중요했던 것은 이집트와 식민지 인도 제국을 잇는 수에즈 운하였다. 따라서 효용가치가 크지 않았던 수단 내 반란에는 관심이 없었고 군대도 보내지 않았다. 다만 수에즈 운하를 소유하고 있는 이집트와의 관계를 고려해 이집트인의 철수를 돕도록 고든 장군을 보낸다. 그러나 고든 장군이 고립되고 마흐디군의 공격을 받게 되자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군대를 보내지만 전투에서 패배한다. 13년이 지난 후 종단정책으로 수단의 중요성이 커지자 다시 수단을 침공한다. 영국이 수단에서 전투를 하느냐, 마느냐의 결정적 기준은 오직 영국의 국익과 명예뿐이었고, 수단 내부 상황은 철저히 무시했다.

    자국의 이해를 관철하기 위한 식민통치 방식 탓에 수단은 1956년 독립 후에도 1955~1972년과 1983~2005년, 두 차례에 걸쳐 피비린내 나는 내전을 겪어야 했다. 북부와 남부는 종교와 인종이 판이해 섞일 수 없는 구조를 가졌기 때문이다. 결국 2011년 남수단은 수단에서 분리 독립국가가 됐지만 영화 <울지마 톤즈>의 이태석 신부가 헌신적인 봉사 활동을 펼쳤던 데서 보여준 것처럼 아직도 빈곤과 기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 같은 비극의 씨앗은 1899년 옴두르만 전투로 수단이 쑥대밭이 되고 영국과 이집트 양국의 공동통치령이 되는 데서 시작됐다. 수십 년 동안 영국의 통치를 빠르게 받아들인 북수단지역과 저항이 컸던 남부 사이에는 개발 격차가 크게 확대됐다. 특히 사막지대인 북부 지역에는 이슬람교를 믿고 아랍어를 사용하는 아랍계가 많이 거주하였고, 초원과 밀림지대인 남수단에는 영어를 사용하고 기독교와 토속신앙을 믿는 아프리카 본토 흑인이 많이 거주하였다. 그러나 통치자에게 남북 주민 간 차이는 아무런 변수가 되지 못했다.

    오늘날 수단과 남수단의 갈등과 분쟁은 제국주의에 뿌리를 두고 있는 만큼 그 원인은 영국이 제공했지만 해결의 몫은 오롯이 수단인에게 남아있다. 역사는 그 책임을 어떻게 물어야 할까.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매일경제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