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태훈의 유럽인문여행! 예술가의 흔적을 찾아서] 피카소가 존경하고 스페인이 사랑한 화가 프란시스코 고야

    2021년 03월 제 126호

  • 20세기 찬사와 혹평을 동시에 받은 화가, 프란시스코 고야는 자신만의 독특한 화풍을 개척한 스페인 최고의 화가 중 한 명이다. 근대 미술의 혁명가, 광기 어린 미술가, 로맨스를 즐기는 낭만주의 화가 등 고야 앞에 붙는 수식어는 다빈치만큼이나 다양하다. 그의 작품을 본 사람이라면 왜 이런 수식어가 따라붙는지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고야는 광기와 열정으로 아무도 흉내 낼 수 없는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한 화가로도 유명하다. 이처럼 고야의 예술세계를 이해하기 위해서 스페인 마드리드에 있는 프라도미술관으로 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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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랑스 루브르, 이탈리아 우피치, 러시아 에르미타주, 미국 메트로폴리탄 등과 함께 세계 5대 미술관에 속하는 프라도미술관은 고야의 예술적 영혼이 스민 곳이다. 미술관 입구에 서 있는 고야의 동상만 봐도 그가 프라도를 대표하는 화가이자 마드리드 시민들에게 얼마나 존경받는 화가인지를 간접적으로 알 수 있다.

    스페인 문화관광의 1번지로 꼽히는 프라도미술관은 스페인 왕가의 소장품을 중심으로 1819년 페르난도 7세 때 건립되었다. 후안 데 비야누에바에 의해 1819년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건축된 프라도미술관은 약 6000여 점의 그림을 소장하고 있으며, 일반인들에게는 3000여 점의 작품을 선보이고 있다. 1층은 스페인 회화, 플랑드르 회화, 이탈리아 회화, 그리고 고야의 일부 작품과 조각이 전시되어 있고, 2층에는 고야의 유화 114점과 데생 470점이 전시되어 있다. 이 중에서도 고야를 좋아하는 팬이라면 이곳에서 꼭 봐야 할 그림은 <카를로스 4세와 가족>, <옷을 벗은 마하>와 <옷을 입은 마하>, <1808년 5월 3일>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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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드리드(프라도미술관)


    천천히 미술관을 둘러보면 그의 화집에서 봤던 명작들이 소리 없이 우리의 눈과 마음을 단박에 사로잡는다. 한마디로 형언할 수 없는 광기와 열정을 가진 고야는 궁정화가로서 조금은 괴팍하고 전위적인 그림을 그렸다. 고야는 렘브란트와 벨라스케스를 좋아했고, 스페인의 아름다운 대자연과 프랑스 중세의 멋스러움을 사랑했다고 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고야의 본명은 ‘프란시스코 호세 데 고야 이 루시엔테스’로 이름이 아주 길다. 그는 1746년 3월 30일에 사라고사 외곽 지역에서 도금장식업을 하는 아버지와 평범한 집안 출신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성당의 목재나 금속 조각상에 도금하면서 사업을 번창시켰는데, 이때 고야는 아버지의 작업장인 성당과 궁을 왕래하며 스페인 최고의 화가 벨라스케스의 그림과 다양한 조각상을 보면서 미술에 대한 감각을 익혔다. 그 후 열여덟 나이에 유명한 미술 아카데미에 지원했지만, 연이은 낙방으로 좌절과 시련을 겪었다. 스물다섯 살이 되어서야 비로소 아카데미에 공식적으로 입학하면서 제대로 된 미술 교육을 받았다.

    30대에 들어선 고야는 귀족의 단아하고 우아한 궁정 화풍에서 벗어나 점차 사회 문제에 많은 관심을 가지며 ‘일루스트라도스’라는 사회단체에 가입했다. 그러면서 그의 화풍은 궁정 측과 정반대인 세계로 접어들었다. 일루스트라도스는 비효율적이고 부패한 군주제를 소리 높여 비판하는 역사학자, 경제학자, 사회학자, 문학가 등 그 시대를 이끌어가는 진보주의 성향의 단체였다. 고야는 이런 단체의 사람들과 토론하며 사회 밑바닥에서 처참하게 유린당하는 가난한 자들에게 마음을 쏟기 시작했다.

    1785년 40세가 되던 해, 고야는 드디어 스페인 최고의 초상화 화가로 명성을 날렸고, 카를로스 4세의 궁정화가가 되었다. 이후에도 고야는 왕족, 재상가, 장관, 일반인 등의 초상화를 그려주면서 상당한 부를 축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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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화상>


    본격적으로 프라도미술관이 소장한 고야의 작품 세계로 한 걸음 더 들어가면 자신을 궁정화가로 뽑아 준 카를로스 4세와 그의 가족을 그린 <카를로스 4세와 가족>을 마주하게 된다. 이 작품은 벨라스케스가 1656년에 자신의 후원자인 국왕 펠리페 4세와 그의 일가를 담은 <라스 메니나스(일명 ‘시녀들’)>와 비교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미술 애호가들을 흥분시킨다. 이 작품은 벨라스케스를 존경한 나머지 고야는 그의 그림 구도에 많은 영향을 받은 듯하다. 그러나 벨라스케스는 <라스 메니나스> 작품 속에 자신의 모습을 과감하게 드러냈지만, 고야는 성격 탓인지 어두운 곳에서 진지한 모습으로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이 두 작품을 천천히 둘러보면 왜 이들이 프라도미술관을 대표하며 스페인의 천재 화가로서 대우받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다음으로 프라도의 가장 큰 자랑거리이자 세인의 관심을 끄는 것은, 단연 매력적이고 관능적인 이미지를 풍기는 여자란 뜻의 ‘마하’와 관련한 고야의 작품이다. <옷을 입은 마하>와 <옷을 벗은 마하>라는 두 개의 작품은 나란히 걸려 있다. 프랑스 루브르미술관의 모나리자 작품처럼 이 작품 앞에는 수많은 관객으로 언제나 북적거린다. 일단 이 그림 앞에 서면 형언할 수 없는 감상이 교차한다. 왼쪽에 <옷을 벗은 마하>와 오른쪽에 <옷을 입은 마하>를 교대로 감상하다 보면 여자의 관능미와 우아함이 동시에 눈과 마음을 파고들기 때문이다. 그 당시 스페인 화풍에서는 여자의 누드는 신화와 종교 속에 등장하는 여신을 이상적인 아름다움으로 그려야 했다. 하지만, 고야는 여신이 아닌 일반 여자를 대상으로 누드화를 그렸고, 종교재판까지 받았다. 훗날 고야의 그림은 프랑스 인상주의 마네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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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08년 5월 3일>


    마지막으로 <1808년 5월 3일> 작품 앞에 서면 고야의 또 다른 예술세계를 만날 수 있다. 이 작품은 1808년 프랑스의 나폴레옹이 스페인을 침략해 마드리드 시민을 학살한 역사적인 사건을 주제로 그린 것이다. 그해 프랑스로부터 민족적 자존심의 상처를 입은 마드리드 시민들은 나폴레옹 군대에 저항하며 조국을 위해 자신들의 목숨을 바쳤다. 암울했던 시대를 지켜보던 고야는 프랑스군이 철수한 후 1814년 2월 페르디난드 7세에게 “프랑스군에 맞서 싸운 우리 동포의 영웅적인 행동을 나의 붓으로 그리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이때 완성된 그림이 바로 고야를 스페인 최고의 화가로 만든 <1808년 5월 3일>이다. 하얀 셔츠를 입고 마치 예수처럼 양팔을 벌린 채 무참하게 나폴레옹의 군인들에게 유린당하는 장면은 화보에서 보는 것보다 훨씬 생동감이 넘친다. 이 작품 이외에도 마드리드 시민들의 저항 의식을 고스란히 담아낸 <전쟁의 참화>는 일제 강점기 시절의 우리의 암울했던 시대를 떠올리게 한다. 고야의 전쟁을 주제로 한 작품들은 스페인 내전의 만행을 묘사한 피카소의 <게르니카>처럼 압축적인 그림을 통해 스페인 시민들의 강한 자주 의식을 표현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고야는 1820년대에 마드리드를 떠나 프랑스의 보르도에 정착했고, 그 도시에서 5년 정도 살다가 1828년 4월 16일 여든둘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이태훈 칼럼니스트]

    [본 기사는 매경LUXMEN 제126호 (2021년 3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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