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장원의 클래식 포레스트] 쇼팽의 심장 안치된 바르샤바, ‘피아노 시인’의 추억과 향수 그리고 회한

    2021년 07월 제 130호

  • 워낙 야행성 체질인데 작년부터 취침시간이 더 늦어졌다. 팬데믹 이전에는 주로 원고를 쓰거나 강의 준비를 하느라 늦게 잠자리에 드는 경우가 많았지만, 요즘에는 특별한 일이 없는데도 이것저것 하다가 새벽녘에야 눕곤 한다. 엊그제는 자정을 훌쩍 넘겨 TV를 켜보니 ‘유로2020’ 축구경기 중계방송을 해주고 있었다. 주지하다시피 유로2020은 코로나19 사태로 한 해 연기되었다. 클래식 음악계에도 지난해 예정대로 열리지 못하고 연기된 행사가 적지 않다. 비근한 사례가 정기적으로 개최되는 각종 경연대회(콩쿠르)들인데, ‘피아노의 시인’ 프레데리크 쇼팽을 기리는 ‘쇼팽 국제 피아노 콩쿠르’가 대표적이다. 수많은 피아노 콩쿠르 중에서도 최고봉으로 각광받는 이 콩쿠르는 폴란드 수도 바르샤바에서 5년마다 열리는 것이 원칙이다. 지난 2015년 제17회 대회 때는 우리나라의 조성진이 한국인 최초로 우승을 거머쥐어 화제를 모았다. 그러나 제18회 대회는 2020년에 열릴 수 없었고, 조성진은 얼결에 ‘쇼팽 콩쿠르 우승자 프리미엄’을 한 해 더 누리고 있다.

    다행히 올해는 연기된 쇼팽 콩쿠르가 열릴 듯하다. 지난 4월 ‘바르샤바 쇼팽 협회’ 관계자는 오는 7월 바르샤바 필하모닉홀에서 1차 예선을 열기 위해 준비 중이라는 소식을 전했다. 아직 팬데믹이 해소되지 않았기에 조심스러운 상황이라면서도, “30여 개국에서 163명의 피아니스트들이 1년 넘게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최근 백신 보급과 함께 각종 공연장의 문이 속속 다시 열리고 있는 유럽의 상황을 감안하면, 적어도 1차 예선 진행은 충분히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이후에도 큰 변고가 없다면 10월에는 80명이 참가하는 본선이 열리고 새로운 우승자가 탄생할 것이다.

    그런데 ‘쇼팽 국제 콩쿠르’는 왜 바르샤바에서 열리는 것일까? 물론 쇼팽이 폴란드 태생이기 때문이라고 간단히 대답할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조금 더 숙고가 필요한 질문이다. 무엇보다 쇼팽에게 있어서 바르샤바가, 폴란드가 어떤 의미였는지에 대해서 신중히 돌아볼 필요가 있다. 쇼팽 콩쿠르를 앞두고 이 부분을 한번 짚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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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르샤바 십자가 성당에 안치된 쇼팽의 심장. 사진 황장원
    ▶쇼팽에 관한 편견을 넘어서

    먼저 쇼팽이 어떤 음악가인지부터 이야기해보자. 잘 알려진 ‘피아노의 시인’이라는 별명은 사실 양가적인 것임에도 상당수 사람들은 그 일면만을 바라보는 경향이 있다. 다시 말해, 우아하고 감상적인 ‘서정시인’의 이미지에 그를 가두어 놓는 것이다. 심지어 그의 음악이 다분히 ‘소녀 취향’이라며 얕잡아보는 사람도 간혹 있다.

    실제로 그는 대단히 섬세하고 예민한 사람이었고, 그의 작품들 가운데 야상곡, 왈츠, 즉흥곡 등이 파리 사교계를 주름잡았던 ‘살롱 음악가’로서의 다소 나이브한 일면을 부각하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런 곡들조차 조금만 파고들면 또 다른 면모를 드러내며 발라드, 스케르초, 소나타 등의 보다 진지하고 스케일 큰 곡들은 그가 거대한 열정과 강렬한 드라마를 펼쳐 보인 ‘서사시인’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아울러 종종 간과되는 점이지만, 그는 피아노 음악사상 가장 놀라운 ‘혁신가’이기도 했다.

    “쇼팽은 피아노 연주뿐 아니라 창작에도 천재였고, 19세기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독창성의 소유자 중 한 명이었다. … 그는 완전히 새로운 피아노 연주법을 발전시켰다. 대담하면서 정교한 화성을 사용했고, 피아노의 울림에 대한 그의 새로운 실험은 피아노 소리에 대한 기존 관념을 통째로 바꾸어 놓았다.” (해롤드 C 숀버그)

    이처럼 ‘위대한’ 쇼팽에게, 바르샤바는 단순한 고향 이상이었다. 바르샤바는 그를 잉태했을 뿐 아니라 그의 천재성에 결정적 자양분을 공급하고 방향성을 결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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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쇼팽 콩쿠르 출전 당시 조성진의 연주가 담긴 음반
    ▶알파와 오메가

    쇼팽은 1810년 3월 1일(2월 22일이라는 설도 있다) 바르샤바 근교의 작은 마을 ‘젤라조바 볼라’에서 태어났다. 당시 폴란드는 러시아,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등 3국에 의해 분할 점령된 상태였고, 바르샤바를 비롯한 동부는 러시아의 통제하에 있었다. 쇼팽의 아버지는 십대 때 폴란드로 이주한 프랑스인 가정교사였고 폴란드인 어머니는 피아노를 잘 쳤다고 한다.

    쇼팽은 평생 단 두 명의 스승을 모셨는데, 유년기의 피아노 선생 아달베르트 지브니와 바르샤바 음악원 교수 요제프 엘스너가 그들이다. 지브니는 바흐, 모차르트, 하이든에 대한 애정과 존경을 심어주었고, 엘스너는 작곡법에 더하여 역사, 문학 등의 교양을 쌓도록 지도했다. 무엇보다 두 스승은 어린 쇼팽을 어떤 틀에 가두지 않고 특유의 비상한 재능을 마음껏 발휘하도록 권장했다. 덕분에 쇼팽은 고전적 토대 위에서 스스로 발전해나가며 그 누구도 따를 수 없는 독창성을 함양할 수 있었다. 일례로 그의 최고걸작 가운데 하나인 ‘24개의 전주곡(Op.28)’은 바흐 음악에 대한 오마주에서 발아했고, 연주기술의 연마라는 본연의 목적에 다채로운 시적 표현을 접목시켜 피아노 연주사에 새 장을 열었던 두 개의 ‘연습곡집(Op.10 & 25)’의 씨앗도 바르샤바 시절에 이미 뿌려졌다.

    쇼팽은 스무 살 때 출사표를 던지고 보다 넓은 세상을 향해 떠난다. 그의 경이로운 천재성과 원대한 포부를 담아내기에 바르샤바는 음악환경이 일천한 유럽의 변방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고국을 떠나기 전에 그는 바르샤바 음악원 홀에서 고별 연주회를 가졌다. 자신의 ‘e단조 피아노 협주곡(제1번)’ 등을 연주했던 이 공연에는 그의 이루지 못한 첫사랑, 음악원 동기생이자 성악가인 콘스탄차 그와트코프스카도 찬조출연을 해주었다. 두 곡뿐인 그의 피아노 협주곡, 특히 그 느린 악장들은 공히 그녀와 관련이 있고 청년 쇼팽이기에 가능했던 순수한 시정의 극치를 보여주는 동시에 훗날 보다 성숙한 서정성과 선율양식을 예고한다.

    바르샤바를 떠난 쇼팽은 먼저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으로 향했다. 그런데 빈에 도착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바르샤바에서 혁명이 일어났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러시아의 압제에 폴란드 군대와 민중이 들고 일어난 ‘11월 봉기’였다. 쇼팽은 고향에 있는 가족과 친구들 걱정으로 발을 동동 굴렀지만, 결국 귀국하는 대신 빈에 남기로 한다. 하지만 빈에서의 활동은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몇 달 뒤 쇼팽은 빈을 떠나 남은 생애의 근거지가 될 파리로 향한다. 그런데 독일 슈투트가르트에 이르렀을 때, 바르샤바가 러시아 황제가 파견한 대군에게 함락되어 무참히 짓밟히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진다. 이 무렵 그가 느꼈던 걱정과 분노, 절망이 투영된 곡들로 유명한 ‘혁명 연습곡’, 투쟁과 평화, 격정과 기도가 교차하는 ‘스케르초 제1번’, 폴란드 민족시인들에 의한 가곡 등이 있다.

    그 후 러시아의 폴란드 합병으로 조국을 상실한 그의 가슴속 깊은 곳에는 언제나 바르샤바를 향한 애틋한 추억과 가없는 향수, 안타까운 회한이 자리하고 있었다. 폴란드 민속무곡에 기초한 마주르카는 그의 일기장을 대신했고, 궁정무곡에서 유래한 폴로네즈는 민족적 고뇌, 자부심, 이상의 상징으로 형상화되었다. 그의 유언은 자신의 심장을 바르샤바로 가져가 달라는 것이었다.

    [황장원(음악 칼럼니스트, 대원문화재단 전문위원)]

    [본 기사는 매경LUXMEN 제130호 (2021년 7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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