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IT

"현대차 직원들도 몰랐다"…'20년 봉인' 정몽구 경영비화 풀렸다

입력 2021/07/22 10:07
수정 2021/07/22 15:18
노운 언노운(KNOWN UNKNOWN)
'알려졌지만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
'모터칸' 정몽구 다룬 기업 경영소설
704622 기사의 0번째 이미지 이미지 크게 보기

정몽구 회장(왼쪽 두번째)이 지난 2011년 미국 앨라배마 공장을 방문해 직원들을 격려하는 장면 [사진 출처=현대차그룹]

"이 책의 내용은 사실과 다를 수 있음을 밝혀 둡니다"

'노운 언노운-알려졌지만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 서문 첫 문장이다. 자신을 '모(Mo)'로 소개한 저자의 부담감이 읽혀진다.

이유가 있다. 현재 살아있는 사람을 다룬 실화 소설, 그것도 재계 2위 그룹을 이끌었던 경영인이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정몽구 현대자동차그룹 명예회장이다.

정 명예회장은 대한민국 재계를 대표하는 경영인이다. IMF 외환위기 당시 위기에 빠진 기아를 인수해 성공적으로 회생시키는 것은 물론 글로벌 자동차업체로 육성했다.

2000년 9월 현대차를 비롯해 10개 계열사, 자산 34조400억원에 불과했던 현대차그룹을 2019년말 기준 54개 계열사와 234조7060억원의 자산을 보유한 그룹으로 성장시켰다.


정 명예회장의 저력은 시장을 쫓아 해외로 영역을 넓혀가며 진가를 나타냈다. 글로벌 주요 지역에 현지 공장을 건설하며 전 세계 자동차 업체 중 유례가 없는 빠른 성장을 기록했다. 그룹 명운을 건 그의 도전은 현재 글로벌 자동차산업과 한국 경제의 지형을 바꾼 전환점으로 평가받는다.

정 명예회장은 올해 3월 경영 일선에서 완전히 물러났다. 1970년 현대차 사원으로 입사한 지 51년 만에 자유인이 됐다.

현대차그룹 격동의 20년 '실화탐사 소설'


704622 기사의 1번째 이미지 이미지 크게 보기

노운 언노운 [사진출처=홍익기획]

저자는 정 명예회장을 20여년 가까이 지켜봤다. IMF 외환위기, 기아 인수, 한보철강 당진공장 인수 등 현대차그룹은 물론 한국 경제사에서도 굵직굵직한 사건들을 정 명예회장과 함께 겪었다.

소설이지만 실제 사건을 다룬 부담감 때문일까. 저자는 책 내용이 사실과 다를 수 있다는 문장에 뒤이어 바로 사족을 달았다.

"(이 책은) 팩트(Fact)와 픽션(Fiction)이 결합된 팩션(Faction)"이라고 추가로 밝혔다. 팩션은 실제적 인물과 사건이 창작적 대화와 결합한 '논픽션 소설'을 뜻한다.

저자는 소설 속 인물들과 회사명도 철저하게 익명 처리했다. 현대차그룹 직원 대다수는 이 책이 발간됐다는 사실 조차 모르는 것으로 알려졌다.

소설에서 정 명예회장은 '모터칸'으로 등장한다. 정 명예회장이 동서양을 아우르는 대제국을 건설한 징기스칸을 닮고 싶어했기 때문이다.


현대차는 미래모터스, 기아는 국민모터스로 소개했다.

목차는 난해하다. 제1장은 현룡재전이다. 주역(周易)에 나오는 '현룡재전 이견대인(見龍在田 利見大人)'에서 가져온 글귀다. 세상에 모습을 나타낸 용(현룡)이 밭에 있으니 대인을 만나는 게 이롭다는 뜻이다. 모터칸은 현룡이나 대인으로 묘사된다.

목차에는 혹약재연, 물유본말 사유종시, 혈구지도, 결정정미, 권력번롱 등 주역, 대학, 삼국지 등에서나 볼 수 있는 어려운 사자성어가 계속 나온다.

장풍에 산이 무너지고, 발돋움 한 번에 공중부양하는 '황당무계' 무협지가 연상된다. 덩달아 447페이지에 달하는 책의 무게감에 다음 장을 넘기기 부담되고 두려워진다.

기아 인수 막후 협상 봉인 해제


704622 기사의 2번째 이미지 이미지 크게 보기

손자병법을 읽고 있는 정몽구 명예회장(중간) [사진 출처=현대차그룹]

이야기를 풀어가는 화자는 '제이(J)' 변호사다. 제이 변호사가 1997년 IMF 외환위기 이후 모터칸을 만난 뒤 20년간 교류하고 대화한 내용을 다뤘다. 20년간 봉인됐던 정 명예회장과 현대차그룹의 경영비화를 소설 형식을 빌려 세상에 공개했다.

두려움과 부담은 본문을 읽기 시작한 순간 사라진다. 익명에 실명을 대입하면 정 명예회장과 현대차그룹의 숨겨진 이야기, 한국 자동차산업의 역사가 눈앞에 펼쳐진다.

정 명예회장과 함께 했던 주역들은 현역에서 떠났다. 현재 현대차그룹 내에서도 당시 비화를 알고 있는 임직원들이 사실상 없다는 점을 감안하면 저자의 기록은 소설을 뛰어넘어 다큐멘터리처럼 다가온다.


20년간 정 명예회장을 바로 곁에서 지켜보고 중요한 사실을 세심하게 기억해둔 저자의 능력이 빛을 낸다.

기아 인수 과정도 거두절미 팩트만 전달한 당시 언론보도보다 더 실감 있다. 미래모터스가 4조5000억원에 달하는 누적적자기업인 국민모터스를 1998년 1조2000억원에 인수한 뒤 정상화하는 과정이 세세하게 묘사됐다.

보고 듣고 겪지 않았으면 '실화 소설'에 넣기 어려운 글들도 자주 보인다. 국민모터스에서 밤 근무자가 회사 담장 밖으로 던져버린 부품이 다음날 다시 입고됐다는 내용, 국민모터스 사장이 한국의 주요 성씨 관련 족보를 모두 꿰뚫고 있다는 내용이다.

미국 앨라배마 공장 건설 때 모터칸의 지시로 미국 남부 흑인과 북부 흑인의 다른 정서가 공장 운영에 미치는 영향을 조사하고, 공장 준공식 때 조지 HW 부시 전 대통령을 배려해 VIP 좌석을 연단 아래로 급하게 옮기게 했다는 등 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를 찾아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제왕' 아닌 '인간' 정몽구 매력 탐구


704622 기사의 3번째 이미지 이미지 크게 보기

음성 꽃동네에서 아이돌봄 등 사회봉사 활동을 펼치고 있는 정몽구회장[사진 출처=매일경제DB]

제왕적 총수가 아닌 인간 정몽구의 면모도 살펴볼 수 있다. 소탈하지만 강단 넘치는 정 명예회장의 매력을 알려주는 일화도 있다.

미국 앨라배마 주재원 만찬자리에서 각설이로 분장한 뒤 "작년에 왔던 각설이"로 시작되는 망가짐 공연을 펼치고 직원들과 일일이 한잔 술을 마셨다는 내용이다.

여기까지는 모터칸의 소탈함을 보여주는 미담처럼 보인다. 이야기는 곧장 엉뚱한 방향으로 전개된다.

술자리가 소란스러워지면서 모터칸의 한마디도 듣지 않을 정도로 만찬자리가 무질서하게 끝났다. 모터칸은 전날 소동으로 혼쭐이 날까 잔뜩 겁을 먹은 임원들에게 뜻밖의 지시를 내린다.

불호령을 떨어뜨리는 대신 모든 주재원이 골프를 하도록 지시한다. '골프를 통한 질서 회복운동'이다. 자신에게 솔직하면서 엄격한 룰을 자율 집행하는 운동인 골프를 통해 자신을 돌아보고 룰의 엄정성에 대한 존중심도 기르라는 의도다.

저자는 이 책이 '영웅담'으로 끝나길 원하지 않는다. 기업, 근로자, 국가가 삼위일체가 돼 '보다 자랑스런 사회', '보다 풍요로운 사회'를 만드는 밑거름이 되기를 바란다.

제이 변호사는 "기업가와 근로자가 서로 좋은 기업을 만들기 위해 진지하게 고민해야 하고, 국가가 나서 이러한 환경을 조성해줘야 한다"고 강조한다. 모터칸의 생각과 판단을 제이 변호사 입을 통해 전달했다.

[최기성 매경닷컴 기자]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