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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s&Biz] 아마존에 쫓기던 가전매장, 아마존을 안으로 들이다

입력 2021/09/09 04:05
수정 2021/09/09 08:48
The Heart of Business / 위베르 졸리

美가전점 베스트 바이의 CEO
경쟁사 아마존매장 입점 시켜

첫날 'CEO 견습생' 명찰 착용
직원용 조끼입고 현장서 대화

구조조정·원가절감하기보단
직원 동기부여에 사활 걸어

당시 삼성전자 신종균 사장
'매장안매장' 아이디어 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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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베르 졸리는 암울했다. 2012년 9월 미국 최대 가전 양판점 '베스트 바이'의 최고책임자(CEO)가 되고 보니 회사는 6개월째 심각한 상황이었다. 온라인 메가스토어 아마존의 파죽지세에 오프라인 소매업체의 실적은 뚝뚝 떨어지고 있었고, 주가는 이미 바닥. 직전 CEO는 성 비위가 들통나 쫓겨났다. 창업자이자 이사회 의장이었던 딕 슐츠는 그를 감춰주다 이사회에서 잘렸다. 설상가상으로 최대주주 오너인 슐츠는 나머지 지분을 모두 사들여 회사를 상장폐지시켜 버리겠다며 사모펀드 투자자들을 만나고 다닌다. 얼굴이 썩은 좀비가 '베스트 바이'의 파란색 직원 유니폼 입고 있는 삽화가 블룸버그 비즈니스위크 잡지의 표지를 장식했다. 언론은 냉정했다.


지난 5월 출간된 'The Heart of Business'는 위베르 졸리 전 베스트 바이 CEO가 '좀비 같던' 회사를 살려 지금은 오프라인 유통업계의 공룡으로 키워낸 얘기를 담았다.

프랑스에서 태어난 졸리는 지금도 영어에 프랑스식 억양을 고수한다. 가전제품 판매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프랑스인이 망해 가는 미국 대기업 '베스트 바이'의 CEO가 됐다니, 처음부터 기대는 낮았다. 하지만 그를 아는 사람들은 생각이 달랐다. 그야말로 베스트 바이를 바꿔놓을 적임자라고 생각했다. 졸리는 HEC 파리대학에서 경영학을, 파리 정치학연구소에서 공공 행정학을 전공하고 세계적인 컨설팅 업체 맥킨지에서 경영컨설턴트 생활을 10여 년 한 후 이 경험을 바탕으로 실제 경영에 뛰어들었다. 주로 뭔가 잘 안 풀리는 회사에 들어가 기사회생시키는 게 그의 주특기. 지금은 휼렛패커드에 인수된 EDS로 자리를 옮겨 회사 회생을 주도했고, 1999년에는 미디어그룹 비방디로 옮겨 비방디유니버설게임스 CEO를 지내면서 구조조정과 온라인게임 부문 성장을 이끌었다. 이후엔 호텔·외식 등 레저 관련 업무를 하는 칼슨그룹에 합류해서 4년 만에 매출을 2배 이상 키우는 마법 같은 경영 능력도 보여줬다.

자신감에 가득 찬 그는 미국 북부 미네소타주 베스트 바이 본사로 출근하기 전 '미스터리 쇼핑'에 나선다.


직함을 감춘 채 아무 매장에나 들어가 뭐라도 사보기로 한 것.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베스트 바이는 미국 전역에 1000여 개가 넘는 점포를 갖고 있는 초대형 소매점이었다. 졸리는 근처 점포에 들어가 LG 폴더폰을 하나 집어 들었다. 베스트 바이의 상징인 파란 조끼 직원들이 당장 달려와 더 비싼 폰을 권할 줄 알았는데, 웬걸 직원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카운터 뒤에서 수다 떨기 바쁜 직원들에게 다가가 뭘 물어봐도 대답은 시큰둥했다. 써보고 맘에 안 들면 반품할 수 있다는 말만 돌아왔다. 가전 양판업에 대해 하나도 모르는 사람이라도 그 상황이 뭔가 잘못됐다는 건 금세 눈치챌 수 있었다.

그는 다음 날 첫 출근을 하자마자 입고 갔던 양복 재킷을 벗어던졌다. 그 대신 매장 직원용 파란색 조끼를 입었다. 그의 명찰에 찍힌 직함은 'CEO'가 아니라 'CEO 견습생(CEO in training)'. 그날부터 며칠간 매장에서 직원들과 함께 손님을 맞고, 점심시간 샌드위치를 나눠 먹으며 바닥부터 문제를 깨닫기 시작한다. 능력 있는 직원들은 이러다가 회사가 망하는 거 아닌가 동요하고 있었고, 가전제품이 좋아서 취직했던 직원들마저 회사에 등을 돌리고 있었다. 졸리는 당장 회사를 턴어라운드시켜야겠다고 마음먹는다. 이사회에서 원하는 '롱텀 플랜'은 잊어버리고 '숏텀 플랜'을 짜기로 한다. 아무리 작은 거라도 빠르게 변화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로 한 것이다. 인력 구조조정을 하고 돈 안 되는 점포를 폐쇄해 원가를 절감하자는 게 아니다. 직원들에게 일하고 싶다는 에너지를 불어넣게 하는 일이었다.


그 후 그가 어떻게 회사를 살려냈는지는 책 속에 상세하게 소개됐지만, 한국 독자들에겐 특히 여섯째 장에 소개되는 '삼성(Samsung)'과 관련된 일화가 감동적이다. 'CEO 견습생' 1주 차 졸리를 만나기 위해 미네소타까지 비행기를 타고 날아온 판매사 사장이 있었는데, 그가 바로 삼성전자의 J. K. Shin. 당시 삼성전자 IM부문장을 맡고 있던 신종균 사장이다. 신 사장은 졸리 CEO를 만나 베스트 바이 매장 내에 조그만 삼성 매장을 열어 달라고 한다. 이른바 매장 안 매장(store-in-store) 전략이다. 당시 갤럭시폰으로 애플을 따라잡겠다고 마음먹었던 신 사장은 베스트 바이 매장 안에 삼성 갤럭시 매장을 따로 만들면, 폰을 경험해 보기 위해 매장에 들어올 고객들이 분명히 있을 것이라고 졸리 CEO를 설득한다. 기존 베스트 바이 매장은 폰, 냉장고, 세탁기 등 기기들을 한데 모아놓고 고객들한테 알아서 사라는 식이었는데, 백화점처럼 삼성만의 브랜드 매장을 내달라고 한 것. 졸리 CEO는 신 사장의 제안을 매력적으로 받아들여 대형 브랜드들의 제휴 매장을 만들기 시작한다.

2013년 삼성을 시작으로 2014년엔 소니·LG, 2017년 인텔·델·다이슨 등 전자기기 브랜드들과 제휴를 늘려 가면서 베스트 바이의 매출과 수익은 빠르게 턴어라운드한다. 급기야 스마트 스피커, 태블릿 등을 판매하던 아마존마저 베스트 바이 안에 입점하겠다고 한다. 졸리는 한때 베스트 바이의 생존을 위협하던 아마존을 경쟁자에서 협력사로 만들어버린 전략이 삼성에서 시작됐다고 고백한다.

이 책의 제목 'The Heart of Business'를 번역한다면 '경영의 진심' 정도가 적당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졸리가 책 속에서 소개하는 스토리들은 거액 연봉 '슈퍼 히어로' CEO의 회사 턴어라운드 이야기가 아니다. 그 대신 그는 가전제품 양판점 직원이라도 일의 목적은 '고귀한 것'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CEO는 그 고귀한 목적을 찾아주는 사람이고, 그 목적을 찾았을 때 회사는 달라질 수 있다는 얘기다. 종교 지도자 같은 소리지만 "일이란 모름지기 의미와 성취가 있어야 한다"는 게 그의 철학. 그는 현재 퇴임하고 하버드대 경영대학원에서 학생들을 가르친다. CEO 시절에도 언론 인터뷰가 거의 없던 그가 책 속에 경영의 진심을 담았다.

[한예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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