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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s&Biz] 이단아들이 만든 인덱스펀드, 금융史를 바꿨다

입력 2021/11/25 04:03
Trillions / 로빈 위글스워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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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 게티이미지뱅크]

"와인·알파벳·바퀴에 못지않는 인류 최고의 발명품은 바로 인덱스펀드다."

폴 볼커 전 미국 연방준비제도 의장은 금융가들이 만들어 낸 것 중 유일하게 쓸모 있는 혁신은 현금입출금기(ATM)뿐이라고 혹평했지만 미국 최초의 노벨 경제학자 폴 새뮤얼슨은 구텐베르그의 활자에 맞먹는 발명품으로 '인덱스펀드'를 꼽았다. 그렇다. 1976년 인덱스펀드 출현은 인류의 역사, 아니 적어도 금융의 역사를 바꿔놨다.

일단 펀드매니저를 따르는 액티브 투자(뮤추얼펀드) 대신 지수를 추종하는 패시브 투자(인덱스펀드)가 등장하면서 수수료를 크게 줄인 소위 시장 파괴형 반값 상품이 등장했다. 투자자들의 상품 선정 기준을 높은 수익률에서 낮은 비용으로 바꿔버린 것이다.


금융구조 자체가 저비용 추구 쪽으로 이동하자 시장의 권력은 자연스레 펀드매니저에서 투자자로 이전되기 시작했다. 혁신 상품 하나가 시장 구조의 혁명을 이끌고, 이어 투자의 민주화를 가져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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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신 뒤에는 늘 이단아들이 있다. 금융도 예외는 아니다. 기존 체제에 순응하지 않고, 시장에 짱돌을 던진 반항아들 덕분에 오늘날 투자 지형도는 과거와 전혀 달라졌다. 저자 로빈 위글스워스는 'Trillions'에 패시브 투자 시대의 혁신가 32명의 이야기를 1970년대부터 시대 순으로 차분히 담아냈다. 종목 분석에 뛰어난 애널리스트나 관록의 펀드매니저 등을 소개한 액티브 투자 관련 서적은 흔하지만 패시브 투자 대가들을 추적한 책은 이게 처음이 아닌가 싶다. 금융공학 전공자나 서학개미가 아니더라도 상장지수펀드(ETF) 투자에 관심 있는 독자들이라면 한 번쯤 들어봤을 만한 '오마하의 현인' 워런 버핏, 뱅가드 창업자 잭 보글, ETF의 창시자 네이트 모스트 등이 이야기를 더욱 흥미진진하게 만든다.

패시브 투자의 첫 번째 이단아는 버핏이다. 이야기는 2007년 여름 뉴욕 현대미술관 빌딩 15층 오피스에서 시작한다.


뉴욕의 이름난 헤지펀드 프로테제 파트너스의 공동창업자 테드 세이데스는 투자의 귀재 워런 버핏 버크셔해서웨이 회장의 팬이었다. 버핏은 제아무리 유능한 헤지펀드 매니저라도 주가지수를 따라가는 인덱스펀드 수익률을 못 당한다는 얘기를 하고 다녔는데, 이를 들은 뉴욕의 세이데스가 오마하 시골에 있는 버핏에게 결투를 신청한다. 2008년 1월 1일에 시작한 10년짜리 내기. 액티브 투자와 패시브 투자의 자존심을 건 대결이었다. 세이데스는 5개 헤지펀드에 나눠 투자하고 버핏은 뱅가드의 인덱스펀드에 투자해 수익률이 높은 쪽이 이기는 게임이다. 그로부터 10년 후인 2018년 12월 29일 결론은 버핏의 압승이었다. 버핏의 인덱스펀드는 연평균 7.1% 수익을 낸 반면, 프로테제 파트너스의 헤지펀드 수익률은 2.2%에 머물렀다.

여기서 버핏이 선택한 뱅가드의 인덱스펀드. 이 회사를 만든 잭 보글이 두 번째 이단아다. 보글은 평소 버핏과 연락하는 사이도 아니었는데, 2017년 보글이 88세가 되던 해 버핏은 전세기로 보글을 모셔 온다. 보글을 버크셔해서웨이 연례 주주총회에 불러 세운 것. "오늘 그분이 여기에 오셨는지 모르겠지만, 제 생각에 이분은 미국의 어떤 사람보다 투자자들을 위해 가장 많은 일을 한 사람입니다.


만약 지금 여기 계신다면 한번 일어서 주시겠습니까?" 군중의 환호 속에 잠시 방청석에서 일어나 손을 흔들어준 키작은 노인이 바로 보글이다. 보글은 1976년 8월 세계 최초의 공모형 인덱스펀드를 내놓고 펀드매니저들의 뒤통수를 쳤다. "펀드매니저들의 펀드를 사지 말아라. 어차피 시장을 이길 수는 없다. 물론 우리도 시장을 이기지는 못한다. 하지만 우리는 수수료가 싸다." 뱅가드의 광고 메시지는 강력했다. 수수료를 중시하던 업계 관행에 정면 도전하면서 보글은 시장에서 이단아가 됐지만 시장의 판도를 바꿔놓는 데는 성공했다.

이렇게 대단한 보글마저 땅을 치고 후회하게 만든 이단아가 또 있다. ETF의 아버지 네이트 모스트다. 모스트는 UCLA에서 물리학을 전공하고 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 해군 잠수함에서 음향 관련 엔지니어이자 물리학자로 활동했다. 이후 아시아 지역을 돌며 음향 장비 사업을 했고 1960년대 원자재 트레이더로 일하다가 미국증권거래소에 들어간다. 거기서 뱅가드의 보글을 만난다. 모스트는 보글이 한창 S&P500 인덱스펀드로 인기를 끌던 1991년 이 펀드를 주식시장에서 언제라도 거래될 수 있도록 상장을 시키자는 아이디어를 낸다. 이른바 최초의 ETF인 셈이다. 하지만 보글은 누가 아침에 펀드를 사서 저녁에 팔겠느냐며 거절한다. 모스트는 보글에게 거절당한 아이디어를 스테이트 스트리트 글로벌 어드바이저스(SSGA)에 팔았다.

보글보다 먼저 인덱스펀드를 만든 존 맥큐온, '팩터 투자' 기법을 만들어 낸 데이비드 부스, 래리 클로츠, 진 신쿼필드 등의 이단아들 이야기가 줄줄이 이어진다. 특히 요즘처럼 자고 나면 몇십 배가 뛰어버리는 밈주식(온라인 커뮤니티 등에서 인기를 끄는 특정 종목)이나 개미연합군 레딧 시대에 패시브 투자의 효용을 높이기 위한 이단아들의 노력은 반드시 찾아 읽어 볼 만하다.

[한예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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