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IT

더 이상 추격자 전략은 없다…로봇산업 치고나가는 정의선

입력 2022/08/18 17:50
수정 2022/08/19 10:11
로봇시장 3년후 231조원
현대차그룹 미래 먹거리로


통큰 벤처투자로 생태계 선점
'실험실 창업' 전폭 지원
실리콘밸리 스타트업도 투자

美 로봇 AI연구소 수장에
보스턴다이내믹스 창업자
"가장 똑똑한 로봇 만들 것"
직접 인재영입 나서 업계 긴장
◆ 로봇시장 빅뱅 (上)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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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우리 사업의 20%는 로보틱스가 될 것이다."

2019년 10월. 현대차 임직원 타운홀 미팅.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이 그룹의 미래 먹거리로 '로봇'을 제시했다. 당시만 해도 로봇 사업에 대한 현대차의 진정성에 '반신반의'하는 반응이 많았다. 로보틱스는 대규모 자본 투입이 필요하면서도 단기간에 수익화가 어렵기 때문이다. 수많은 대기업이 로봇 기술을 개발해 왔지만 상용화 단계에 이르지 못한 이유다. 회사 수뇌부의 중장기적인 비전과 인내 없이는 로봇 사업을 키우기 어렵다는 뜻이다. 구글도 2013년 보스턴다이내믹스를 인수했지만 기존 사업과 시너지 효과를 찾지 못해 2017년 소프트뱅크에 회사를 매각했다.


2022년 8월. 로보틱스를 미래 성장동력의 핵심 축으로 선언한 정 회장의 비전이 구체화되고 있다. 로봇 분야에서 잇단 현대차그룹의 광폭 행보에 전 세계가 주목하고 있다. 현대차그룹은 2020년 휴머노이드 로봇 분야에서 최고 기술력을 갖춘 것으로 평가받는 보스턴다이내믹스를 8억8000만달러(약 1조1572억원)에 인수한 뒤 완성차업체에서 '최첨단 모빌리티·로보틱스' 기업으로 변신하는 데 성공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정 회장은 이미 향후 그룹 핵심 사업 분야로 도심항공교통(UAM)과 함께 로보틱스를 제시하면서 신사업에 100조원을 투자하겠다는 계획을 밝힌 바 있다.

이번에 보스턴다이내믹스와 '로봇AI연구소(BDAII)' '로봇투자회사(VC)'를 설립하며 미래 로봇시장 선점에 가속도가 붙을 것이라는 게 미국 보스턴 현지 투자업계와 학계의 평가다.

현대차그룹은 보스턴다이내믹스와 함께 보스턴에 설립하는 BDAII에 4억달러(약 5285억원)를 초기 투자한다. 마크 레이버트 보스턴다이내믹스 창업자(전 회장)가 수장을 맡게 될 연구소의 모토는 "가장 어려운 과제에 집중한다"로 정했다. 레이버트 창업자는 "(연구소는) 지속적인 자금 투입과 기술 지원 을 통해 최고의 인재들에게 집중하는 구조로 설계됐다"면서 "그 어떤 것보다 더 똑똑하고 민첩하며 지각력을 갖춘, 사람과 함께 일할 수 있는 첨단 로봇을 만드는 게 우리 임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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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매사추세츠주 케임브리지시 하버드대 공과대학에 위치한 로봇 연구실 `무브랩(Move Lab)`에서 연구진이 돌고래 생체에 부착해 돌고래와 실제 대화가 가능하도록 하는 소프트로봇을 시연하고 있다. [황순민 기자]

연구소에는 로봇공학자뿐 아니라 인공지능(AI), 머신러닝, 컴퓨팅 분야 엘리트 연구원들을 비롯해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 엔지니어들이 대규모로 합류했다.


연구소는 시작부터 미국 초일류대학 연구실과의 협력과 스핀오프(Spinoff)를 염두에 두고 설계됐다. 연구소는 매사추세츠 케임브리지시 '켄들 스퀘어'에 본진을 둔다. 매사추세츠공대(MIT), 하버드대 공과대학과 지근거리에 있다.

현대차그룹이 BDAII 산하에 설립을 추진 중인 로봇 투자 전문 벤처캐피털(VC)은 MIT, 하버드 연구소의 '실험실 창업'에 자금을 투입할 것으로 전망된다. 보스턴다이내믹스 역시 레이버트 창업자의 MIT 연구실인 '레그랩'에서 시작해 세계 최고의 로봇 회사로 성장했다. 투자 펀드는 미국이 로봇 산업을 키우기 위해 집중 육성 중인 보스턴, 피츠버그, 실리콘밸리 로봇 클러스터에서 생겨나고 있는 스타트업들에 인재 네트워킹과 투자를 이어갈 것으로 예상된다. 현대차그룹은 2020년 미국 듀크대 출신 엔지니어들이 보스턴에 창업한 로봇 스타트업 '리얼타임 로보틱스'에 투자하기도 했는데, 이 같은 사례가 앞으로 더 많이 나올 수 있다는 얘기다.

VC가 조성할 펀드는 리스크(위험)가 크고 불가능에 가깝지만, 인류를 위해 꼭 필요한 기술 분야에 도전하는 '터프테크' 기업에도 관심을 기울일 것으로 보인다. 정 회장은 "세계 최고의 기술기업을 찾아내고 육성하고, 우리 미래 세대가 세계 시장을 주도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야 한다"고 언급했다.


현대차의 '로봇굴기' 움직임은 벌써부터 세계 최고 수준의 로봇 연구소와 로보틱스 스타트업들이 밀집된 보스턴에 작지 않은 파동을 만들고 있다. 로봇 업계 최고 스타인 레이버트 회장이 "최고의 인재들과 AI, 로봇공학의 미래와 변화를 함께 만들겠다"며 직접 인재 영입에 나서면서 입소문이 퍼졌다. 여기에 아이로봇 창업자로 로봇 연구·창업의 대가인 로드니 브룩스가 BDAII에 합류한다는 이야기가 나오면서 현지 로봇 관계자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미국 전기전자기술자협회(IEEE)는 "현대차의 움직임은 로봇공학 미래에 대한 엄청난 투자"라고 평가했다.

현대차그룹은 전 세계 로봇시장이 기술 혁신과 자동화 로봇 수요로 급성장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현대차그룹에 따르면 2020년 444억달러(약 58조원) 수준이었던 전 세계 로봇시장은 2025년 1772억달러(약 231조원)로 성장할 것으로 전망된다. 특히 로봇 기술은 자율주행차, UAM, 스마트팩토리 구축 등에서 현대차그룹의 기존 사업과 시너지가 예상된다. 로봇 기술은 자율주행을 비롯한 미래 모빌리티 산업 전반과 밀접하게 관련돼 있다. 현재 그룹 주력 사업인 제조·생산·물류·건설 분야에서도 시너지가 날 수 있다. 로봇의 센싱(인지) 기술은 자율주행차와 UAM 등에 기본적으로 요구되며, AI를 활용한 대응·판단 기술이나 외부 환경 변화에 따라 정밀하게 구동시키는 제어 기술도 향후 완전한 자율주행차 구현에 필수적인 요소다. 업계에서는 현대차가 우선 기존 사업(자동차 제조)과 시너지를 낼 수 있는 분야에 집중하면서도 장기적으로는 로봇을 하나의 독립적인 산업으로 내세울 것으로 전망한다. 개인들이 일상에서 사용할 수 있는 휴머노이드(인간형) 로봇시장이 최종 목표가 될 수 있다.

현대차의 공격적인 투자 뒤에는 오너의 결단이 결정적으로 작용했다는 평가다. 정 회장은 지난해 6월 보스턴을 직접 방문해 현지 로봇 석학들과 만나 토론하고 로봇 사업에 대한 현안을 살핀 것으로 알려졌다. '치타 로봇'을 개발해 스타 연구자 반열에 오른 김상배 MIT 교수는 "현대차가 자동차 회사 아이덴티티를 넘어 첨단 AI, 로봇 회사로 변신하는 것으로 보인다"면서 "특히 로봇 사업은 기존 한국 대기업들의 '빠른 추격자' 성공 방정식에서 벗어나 '선구자(퍼스트무버)'로 시장을 창출해야 하기 때문에 장기적 관점에서 투자와 인내가 필요한데, 현대차가 오너의 결단 측면에서 빅테크 사이에서도 가장 두드러지는 행보를 보이고 있다"고 평가했다.

[보스턴 = 황순민 기자 / 서울 = 원호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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