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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직장인 레시피] 최악의 조건을 물려받은 리더의 선택

입력 2020.05.21 11:07   수정 2020.05.22 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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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에 이런 조직을 물려받는다면? 자기 살겠다고 훌쩍 떠나 버린 리더, 사분오열된 조직원, 매출 등 사업성에서 회사가 존폐를 검토할 정도로 존재 가치를 상실한 부서, 미래에 대한 비전과 현실에 대한 냉철한 자기 분석을 망각한 조직. 이런 부서의 리더가 된다는 것은 한마디로 가시밭길을 걸어야 한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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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보다 좋은 상황이 온다’는 믿음

리더가 되었을 때의 상황은 천차만별이다. 전임 리더가 탁월한 지도력으로 모든 조건을 완벽하게 갖추어 놓고 후임자에게 물려주는 경우도 있고 이와 정반대일 때도 있다. 전임자가 세종대왕급 리더라 ‘풍족과 평화’를 100점 수준으로 올려 놓은 상황에서 리더 자리를 물려받았다면 그는 천운을 타고난 것이다. 전임자가 완벽한 리더십으로 조직을 원 팀으로 만들어 놓고, 매출이나 새로운 사업에서도 회사가 필요로 하는 조직으로 만들어 놓고 영전하는 경우도 있다.


이 때는 전임자의 유산을 잘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새 리더는 역할을 다하는 셈이다. 물론 위대한 전임자의 그림자에서 평생 벗어날 수 없고 사사건건 그와 비교되는 불편함은 있겠지만, 그래도 행운아인 셈이다. 하지만 인생이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는 것처럼 회사도 마찬가지다. 자기 살겠다고 훌쩍 떠나 버린 리더, 사분오열된 조직원, 매출 등 사업성에서 회사가 존폐를 검토하는 부서, 미래 비전과 현실에 대한 냉철한 자기 분석을 상실한 조직이 되어 버린 경우도 있다. 이런 부서의 리더가 된다는 것은 한마디로 가시밭길을 걸어야 한다는 말이다.

이 경우 선택은 두 가지다. 첫째, 자기 살길을 찾아 열심히 상사 좇아 다니면서 탈출을 모색하는 이기적 리더가 되는 것이다. 이 경우 어쩌면 단 한 개의 낙하산을 자신이 메고 추락하는 조직에서 탈출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탈출한 리더에게는 두 번의 기회는 주어지지 않는다. 조직은 의외로 냉정하다. 회사에서 단 한 번의 예외라도 ‘인간적’이라는 조건은 없다. 아마도 그 리더는 조직을 공중분해시키고 조직원 대부분을 실업 급여를 타야 하는 신세로 만들어야 그 낙하산을 손에 쥘 수 있을 것이다.


둘째, ‘그래도 해보는 것’이다. 최악의 상황에서 최상의 상태로 단박에 만들 수는 없다. 하지만 그 어떤 조직도 ‘관성의 법칙’은 통용된다. 이는 타성에 젖은 패배주의로 나타날 수도 있지만 조직의 숨은 곳 어디든 ‘만회와 성공의 DNA’가 있기 때문이다.

나락으로 추락한 조직을 물려받았을 때 리더가 취할 수 있는 행동의 우선은 솔직함이다. 냉철하게 현실을 분석하고 숨김없이 이런 상황을 조직원 모두와 공유해야 한다. 쓸데없는 희망 고문을 하거나, 막연한 기대감을 갖게 하는 것은 옳은 방법이 아니다. 현실을 파악하고 ‘액션 플랜’의 순서를 마련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또 필요한 것은 지나친 패배주의에 사로잡혀 의욕과 용감함을 잃어버리는 어리석은 행동을 하지 말아야 한다. ‘어렵고 힘들지만’ 그럼에도 ‘어떤 방법’을 동원하면 ‘지금보다는 더 좋은 상황이 온다’는 믿음과 확신을 주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행동해야 한다.


당연히 리더의 희생정신과 솔선수범이 필요하다. 그래야 ‘무엇을 해야 할지’를 파악하지 못한 조직원에게 ‘액션 플랜의 방법론’을 제시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상황과 여건, 작은 결과에 대한 공유가 필요하다. 0점에서 시작한 조직에게 당장 필요한 것은 100점이 아니라, 상승 그래프다. 0점이 5점이 되고 그 다음은 10점이 되고, 20점으로 올라가는 상승 그래프. 그래야 조직원 모두 자신들의 방법과 행동이 ‘옳은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최상의 조건에서 리더가 된 ‘운빨 최고 리더’들은 사실 많다. 조조의 후계자인 조비, 강희제의 후계자들, 로마의 초창기 황제들, 세종대왕의 후계자 그리고 스티브 잡스의 후계자인 팀 쿡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창업보다 힘든 것이 수성이라고 했다. 그들 역시 위대한 전임자의 그림자를 벗어나기 위해, 그의 흉내를 내는 것이라는 냉혹한 평가를 벗기 위해 피와 땀, 눈물의 노력을 했다.


반대로 최악의 조건에서 조직을 물려받은 ‘운빨 제로 리더’들도 많다. 1, 2차 세계대전에서 폭망한 독일의 재건 책임을 물려받은 아데나워 수상, 1980년대 도산 위기에 빠진 크라이슬러를 극적으로 회생시킨 경영의 신 리 아이아코카 회장, GE를 세계적인 기업으로 이끌며 고속 성장을 주도한 잭 웰치, 망해 가는 일본의 JAL을 회생시킨 이나모리 가즈오 회장 등이다.

그중에서도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파시즘 독일의 확장세에 불안해하는 국민에게 불굴의 용기를 주며 전쟁 내각을 이끈 웨스턴 처칠이 있다. 그는 1940년 영국 제61대 총리로 취임해 히틀러의 파상적 공격을 막아 낸 영국의 위대한 리더다. 처칠이 수상이 되었을 당시 영국과 유럽의 상황은 최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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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함은 무엇보다 강한 무기다

제1차 세계대전의 패전국으로 전락한 독일은 경제 재건과 전쟁 보상금으로 허덕이고 있었다. 하지만 독일은 히틀러의 등장으로 군비를 급속도로 증강하며 유럽의 복병으로 떠올랐다. 한편 비록 제1차 세계대전의 승전국이지만 영국과 프랑스의 사정은 여의치 않았다. 소련은 볼셰비키 혁명으로 공산주의 국가가 되었고 미국은 1929년 경제 공황으로 유럽에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그나마 영국과 프랑스는 그동안 구축해 놓은 식민지 경영을 통해 조금씩 국력을 증대하며 경제 재건에 힘쓰고 있었다. 하지만 유럽의 정세는 점차 위험 국면으로 빠져들었다.

전체주의, 게르만 민족주의, 무력 증강, 반공산주의와 반유대인, 군비 증강을 내세운 히틀러는 패전국으로 실의에 빠져 있던 독일 국민, 특히 젊은이들을 자극하며 그 세를 확장했다. 히틀러는 정권을 장악하자 야망을 숨기지 않았다. 오스트리아, 체코, 폴란드 등에 대한 군사적 점령을 시도했다. 당시 히틀러의 대외 명분은 소련 공산주의의 서쪽 팽창 저지와 게르만 민족의 통일이었다. 히틀러는 오스트리아, 폴란드, 체코 등지의 일정 지역에 대한 독일 합병을 주장했다. 일테면 체코 서쪽의 주데텐란트의 주민 중 무려 300만 명이 게르만 혈통이라고 선전하며 이는 독일과의 합병의 근거라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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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영국 총리, 즉 처칠의 전임자는 네빌 체임벌린 수상이었다. 영국 제60대 총리 네빌 체임벌린은 1937년 5월28일에 총리가 되었다. 그에게는 영국 재건과 독일 확장 저지, 그리고 무엇보다 유럽에서 전쟁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게 만들어야 할 의무가 있었다.


체임벌린은 사실 유능한 관료이며 정치가였다. 그는 1931년부터 37년까지 램지 맥도널드 내각에서 재무장관으로서 개혁과 긴축 재정, 금융 개혁, 프랑스, 미국 등과의 긴밀한 공조를 통해 영국 경제를 회복시킨 공이 있었다. 이 성과로 체임벌린은 스탠리 볼드윈을 이어 총리가 되었다. 그의 당면 과제는 독일이었다. 히틀러는 이탈리아의 무솔리니와 연대해 유럽을 다시 전쟁의 공포로 몰아갔다. 체임벌린은 독일의 전쟁 욕망을 막기 위해 외교 유화책을 시도했다. 물론 당대에는 이 같은 체임벌린의 정책이 ‘틀렸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체임벌린으로서는 선택지가 많지 않았다. 당시 영국은 군사력을 재건하지 못했고 사회 분위기 역시 1차 세계대전에서 막대한 사상자를 냈기에 전쟁에 대한 공포심이 가득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체임벌린은 히틀러에게 ‘속았다’는 평가를 받았다.


1940년 급작스런 체임벌린의 죽음으로 그의 ‘진심’과 당시 상황에 대한 ‘진실’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했지만, 훗날 『BBC 히스토리 매거진』에서 평가한 20세기 영국 총리 중에서 앤서니 이든과 함께 가장 낮은 점수를 받기도 했다. 후에 체임벌린에 대한 재평가와 옹호론도 있었고 그렇게 되야 할 이유도 분명 있다.

체임벌린은 히틀러에게 ‘평화’를 약속받고자 했다. 1938년 오스트리아를 전격 합병한 히틀러. 이에 체임벌린과 프랑스 총리 에두아르 달라디에는 히틀러와의 회담을 서둘렀다. 히틀러는 체코 주데텐란트를 합병하기 위해 움직였다. 그러자 체임벌린은 독일의 베르히테스가덴의 히틀러 별장을 찾았다. 이곳에서 체임벌린은 히틀러와 ‘향후 사전 협의 없이 군사적 행동을 취하지 않겠다’와 ‘주데텐란트 주민 투표 결과에 따라 합병 여부를 판단하겠다’는 데 합의했다. 물론 주데텐란트 주민 중 독일인 구성이 50%를 넘는 지역은 독일에 넘겨 주겠다는 문서도 준비했다. 체코는 반대했지만 영국과 프랑스는 평화가 더 급했다. 하지만 히틀러는 약속을 깼다. 히틀러는 주데텐란트를 점령하고 체코인들의 철수 기한을 정했다. 협의는 깨졌고 전쟁은 다가왔다.


프랑스는 1938년 9월24일 동원령을 내렸고 체코와 영국 역시 9월27일에 비상사태를 선포했다.

체임벌린은 희망을 끈을 놓지 않았다. 9월29일 체임벌린의 제안으로 체임벌린, 히틀러, 프랑스 달라디에, 이탈리아 무솔리니가 뮌헨에서 회동했다. 그리고 체임벌린은 히틀러와 ‘평화 보장을 위한 협의를 통해 서로의 의견 차를 해소하겠다’는 서류에 서명했다. 1938년 9월30일 뮌헨 협정이 이루어진 것이다. 체임벌린은 런던으로 돌아왔다. 영국민은 평화를 가져온 그를 환영했다. 체임벌린은 “이제 전쟁은 사라졌다. 우리 시대의 평화를 지켜 냈다”고 역설했다. 하지만 이는 히틀러의 속임수였다. 히틀러는 영국과 유럽이 평화에 젖어 있을 때 군비를 증강하고 유럽에서의 군사 작전을 구체화했다. 1939년 히틀러는 체코를 점령하고 9월에는 폴란드를 침공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시작이다. 체임벌린의 평화 협정은 휴지가 되었다. 내각은 총사퇴하고 전쟁 내각이 꾸려졌다. 즉, 영국의 가장 위기 순간에 가장 위대한 리더십이 필요했다. 전쟁 내각 수장이 바로 웨스턴 처칠이다.


이때가 1940년, 처칠의 나이 65세였다. 직장인이면 은퇴할 시기에 처칠은 망망대해에 떠 있는 영국호의 선장이 되었다.

히틀러의 군대는 파죽지세였다. 폴란드, 체코, 네덜란드를 함락하고 곧바로 프랑스를 침공했다. 프랑스는 총 한 번 제대로 쏴 보지도 못하고 히틀러에 무릎을 꿇었다. 프랑스 함락과 덩케르크의 비극을 지켜본 영국은 공포에 휩싸였다.

다음 차례는 영국이었다. 히틀러는 처칠에게 굴욕적인 강화 조약을 제안했다. 영국민은 분열했다. 평화파와 전쟁파, 양측의 대립과 반목이 계속되었다. 처칠은 1940년 5월10일, 의회에서 연설을 시작했다. 영국민을 비롯해 독일, 대서양 건너 미국까지도 처칠의 연설에 주목했다. 역사적인 연설이었다.

“오늘 비극적인 사실을 말하려 합니다. 유럽은 히틀러에게 굴복 당했습니다. 다음은 영국입니다. 하지만 저는 국민들에게 해 줄 것이 없습니다. 오히려 국민들에게 요구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영국민의 피와 땀 그리고 눈물입니다. 앞으로 기나긴 투쟁과 고난한 시련이 우리를 기다릴 것입니다.


우리의 확고한 정책은 기만적 강화 조약이 아닌 전쟁입니다. 수많은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전쟁을 하는 목적은 승리입니다. 파시즘에 굴복 당하지 않는 자유민의 승리입니다. 어떤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반드시 승리해야 우리는 생존할 수 있습니다. 나는 확신합니다. 우리의 단결된 힘이 기필코 승리를 쟁취할 수 있을 것이라고.”

처칠은 너무나 정직하게 현실을 국민들에게 말했다. 일말의 기대감, 막연한 희망 대신 처칠은 냉정하게 지금 이 순간 가장 필요한 것은 바로 ‘애국심과 단결’이라고. 연설 이후 영국민은 단결했다. 그리고 처칠은 몸소 이 단결된 힘을 하나로 모으는 최전선에 나섰다. 우선 왕실과 정부 요인을 외국으로 피신시키려는 계획을 백지화했다. 대영박물관의 수많은 보물과 문화재를 캐나다로 옮기려는 계획도 취소했다. 왕부터 군인, 노인 등 모든 영국민이 동등한 입장에서 독일의 공습에 노출된 것이다. 그것은 영국민에게 공포와 위협 대신 용기와 단결의 힘을 주었다.

처칠은 섬세한 지도자였다.


그는 하루 종일, 일주일 내내 일을 했다. 수많은 보고를 받고 고독한 결단을 내리는 과정에서 그의 참모들은 일에 빠져 사는 나이든 총리의 모습에서 용기를 얻었다. 그는 런던동물원의 동물을 어떻게 하면 공습에서 지킬 수 있는지 등 모든 일에 관여했다. 그리고 영국민에게 용기를 불어넣는 데 몰두했다. 공습 사이렌이 울리면 처칠은 지하 방공호 대신 노구를 이끌고 지붕에 올라가 공습과 피해를 직접 점검했다.

그렇게 5년의 시간이 흐른 뒤 드디어 처칠은 영국과 연합군의 승리를 선언할 수 있었다.

종전 후 총선에서 처칠 내각은 패했다. 전후 새로운 질서를, 새로운 내각에게 맡기고 싶은 영국민의 선택이었다. 하지만 처칠에게 쉼은 주어지지 않았다. 1951년 총선에서 처칠은 77세로 승리, 다시 총리가 되었다. 처칠은 이후 5년간 총리로서 영국에 마지막 봉사를 하고 1955년 물러난 뒤 1965년 91세에 세상을 떠났다. 영국에서 가장 위대한 인간이 죽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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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점은 극복하고, 꿈은 위대하게

처칠은 단점이 많은 사람이었다. 외모도 썩 호감 가는 인상이 아니다.


키는 170cm가 채 되지 않았고, 뚱뚱한 체구에 얼굴은 실례지만 불독과 비슷했다. 게다가 어릴 때부터 엄격한 부모의 영향으로 항상 고독했고 병치레가 잦았다. 13세 때 폐렴을 앓고 평생 재발해 고통받았다. 심장 발작도 일으키곤 했다. 처칠은 명연설가로도 유명하지만 사실 그는 말더듬이였다. 그는 이를 고치기 위해 독서를 선택했다. 책을 소리 내어 읽으면서 버릇을 고쳤다.

처칠을 가장 괴롭힌 것은 우울증이었다. 그가 스스로 “나는 평생을 검정개(black dog; 우울증)와 같이 살았다”고 말할 정도로 우울증은 심각했다. 총리 때도 처칠은 밤낮없이 일에 몰두하고 잠자리에 들어서도 심한 우울증으로 베개를 껴안고 소리 내어 울었다고 한다. 일국의 총리가 침대에서 소리 내어 우는 모습을 상상하기 힘들겠지만 그만큼 인간 처칠은 많은 단점의 소유자였다.

처칠은 이런 단점을 극복했고 그 극복의 근본은 굽히지 않는 용기였다.


그는 90 평생에 무려 55년을 의회에서 정치를 했고, 31년은 장관직을 수행했다. 또한 9년은 총리로 재임했고 15번의 전쟁에 참전한 불굴의 투사다. 은퇴 시기에 총리를 맡아 전시 내각을 이끌었고, 또 77세의 노구를 이끌고 영국민에게 봉사를 선서한 것은 만용과 노욕이 아닌 리더로서 정확한 소명의식이 있기에 가능했다. 그는 비난이나 평판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가 가장 지키려 한 것은 국민의 지지와 선거에서의 많은 표가 아닌 원칙과 높은 목표의식 그리고 말을 앞서는 행동이었다.

그는 솔직했다. 전쟁 상황이 비록 절망적이라도 그는 국민을 속이지 않았고 오히려 진실을 토대로 더욱 강한 용기를 요구했다. 또한 처칠은 결단을 주저하거나 자신의 책임을 남에게 돌리지 않았다. 그가 해군 장관에서 물러난 제1차 세계대전 전투 패배도 사실은 처칠만의 책임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진 것은 사실이다’는 원칙 아래 장관직을 사퇴했다. 변명이나 책임 전가를 하지 않았다. 오히려 최전선 대대장으로 근무를 자원해 전쟁의 참상을 몸소 겪으면서 리더로서의 자질을 키웠다.


우울증 못지않게 처칠을 괴롭힌 것은 돈이었다. 그는 돈에 있어서 개념이 없었다. 오죽했으면 거의 무보수인 하원 의원을 하면서도 매체에 기고를 하고 책을 펴내며 그 돈으로 생활했다. 평생 빚에 쫓긴 처칠은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대저택을 경매에 내놓기도 했다. 이를 보고 안타깝게 여긴 한 독지가가 저택을 사서 처칠을 살게 할 정도였다. 그가 빚에서 벗어난 것은 노벨문학상을 받고 인세를 받으면서다. 그 정도로 처칠은 돈에 시달렸지만 정적들도 인정할 정도로 청렴한 정치인이었다. 처칠은 단점과 약점을 개의치 않았고 그 앞에 굴복하지 않았다. 그에게 신체적 결함은 사소한 문제였다. 오히려 단점을 인정, 미래에 대한 비전을 정확하고도 자신감 있게 정할 수 있었고 그 목표를 향해 노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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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에서 유머는 희망과 신뢰를 준다

처칠은 유머를 적재적소에 사용한 노련한 정치가였다. 대륙이 히틀러에게 점령 당하고 영국만이 버티고 있던 상황에서 영국의 마지막 희망은 미국의 참전이었다. 당시 미국 루즈벨트 대통령은 참전 결정을 미루고 있었다. 처칠은 워싱턴으로 루즈벨트 대통령을 만나러 갔다.


하지만 협상은 지지부진했고 루즈벨트는 결단을 못 하고 있었다.

하루는 숙소에서 처칠이 목욕을 하고 있었다. 처칠의 방으로 찾아온 루즈벨트는 목욕실 문을 벌컥 열었고 그만 알몸의 처칠과 딱 마주치고 말았다. 당황한 루즈벨트에게 처칠은 당당하게 수건을 치우고 이렇게 말했다. “대통령 각하, 영국은 미국에게 아무 것도 숨기는 것이 없습니다.” 루즈벨트는 처칠의 이런 솔직한 모습에 반했다.

처칠이 정치에 입문한 선거에서 상대 후보는 처칠의 게으름을 공격했다. “처칠은 아침에 일찍 일어나지 못하는 게으른 사람입니다.” 그러자 처칠은 이렇게 반박했다. “글쎄요. 저처럼 11살 연하의 아름다운 아내와 같이 산다면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일이 힘들지 않겠습니까.” 연설을 들은 대중들은 처칠의 재치 있는 유머와 여유 있는 모습에 감동받아 처칠의 손을 들어 주었다.

잦은 당적 변경, 고집스럽고 분노 조절을 못 하는 불 같은 성격 때문에 처칠은 정적이 많기로 유명했다. 하지만 인신공격 발언에는 그 순간 발끈 화를 내면서도 마음에 담아 두지 않았다.


그것이 바로 정치라고 생각했다. 하루는 의회에서 상대 당 여성 의원이 처칠에게 독설을 퍼부었다. “만약 당신과 결혼한다면 난 차라리 독약을 마시겠다.” 그러자 처칠이 답했다. “저 역시 의원님의 남편이라면 그 독약을 마셔 버리겠다.” 그만큼 처칠은 살벌한 정치 판에서도 유머를 잊지 않았다. 하루는 노부인이 처칠에게 바지 지퍼가 열렸다고 말했다. 그러자 처칠은 점잖게 답변했다. “부인,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이미 죽은 새는 새장 문이 열려도 밖으로 나올 수가 없으니까요.”

히틀러의 위력이 유럽에 퍼져 나갈 때 히틀러는 베를린 동물원의 사자가 양과 같이 사이 좋게 한 우리에 있다는 것을 말하며 위장된 평화를 선전했다. 모두 다 이런 말에 현혹될 때 처칠은 유머 섞인 한마디로 히틀러의 속내를 만천하에 드러냈다. “베를린 동물원에 분명히 사자와 양은 같이 있지요. 그런데 사육사가 하는 일은 매일 아침마다 새 양을 우리에 넣는 것이라더군요.” 핵심을 정확히 지적하는 말이었다.


처칠은 유머의 위력을 잘 아는 정치가였다. 한 번은 연단 위에 오르다 넘어지자 청중들이 일제히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자 처칠은 “여러분이 웃을 수 있다면 나는 한 번 더 넘어질 수 있다”고 말했다. 또 그는 중절모에 시가를 물고 한 손으로 ‘V’자를 그리는 포즈를 즐겨 했다. 승리의 ‘V’자를 의식적으로 내보이며 영국민에게 전쟁에서 이길 수 있다는 신념과 용기를 준 것이다.

리더의 유머는 조직을 여유 있게 만든다. 주변을 긍정의 에너지로 가득 차게 하는 마력을 지닌 것이 바로 유머다. 이를 위해서는 반대 의견도 경청하는 리더십이 필요하다. 머리를 울리며 가슴을 파고드는 유머는 그야말로 반대를 인정하는 진정한 여유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리더는 결정을 내리는 과정에서 흥분된 마음을 가라앉히고 좀 더 차분하게 사안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여유를 가져야 한다.

처칠과 히틀러의 리더십 차이는 바로 유머에서 극명하게 드러났다.


처칠에 비해 히틀러의 조직은 자생적 힘과 창조적 생산성에서 부족함이 많았다. 반면 처칠은 긍정의 힘을 주는 리더십, 겸손과 솔선수범의 리더십, 그리고 눈높이를 같이하는 공생의 리더십으로 조직을 이끌었다.

회사도 마찬가지다. 만들어진 권위를 추구하는 리더가 이끄는 조직은 외견상 단단해 보이지만 그 권위에서 책임과 영감을 발견할 수 없을 때 리더는 더 이상 조직을 이끌 동력을 상실한다. 우리는 종종 계급과 권한만 내세우는 리더의 답답함과 마주친다. 처칠의 위대함은 여기에 있다. 일 중독 처칠은 관리들을 심하게 다루었지만 어느 누구도 ‘처칠의 독재’에 반기를 들지 않았다. 그것은 그의 리더십의 목표점이 자유, 공생 그리고 개인이 아닌 조직의 승리를 위한 것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글 박기종(커리어 코칭 칼럼니스트) 사진 픽사베이]

[본 기사는 매일경제 Citylife 제730호 (20.05.26)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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