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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직장인 레시피] 리더의 속도계, 0부터 100까지 필요한 이유가 있다

입력 2020.07.31 10:16   수정 2020.08.01 1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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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더가 되는 순간 그는 조직을 개편하고, 목표를 수정하고, 업무 영역을 확장한다. 조직은 ‘엔진 가동률 100%’로 돌진하게 된다. 리더는 생각한다. ‘나 좋자고 이러는 건 아니잖아. 열심히 일해서 성과를 내면 부서원 모두에게 혜택이 돌아가니까’라고. 하지만 이는 미안하게도 리더만의 생각이다. 사람 마음은 다 똑같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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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려와 여유 없는 전진은 ‘급발진’

의욕, 당연히 좋은 것이다. 무언가를 하고 싶고, 그 하고 싶은 구체적인 목표를 성취하기 위한 자신의 단단한 마음가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의욕을 본격적으로 행동에 옮기는 순간 이에 따르는 부작용은 어쩌면 필연적이다. 특히 승진해 중책을 맡게 되면 그 자리에 오른 리더는 ‘잘하고 싶다’는 열망에 사로잡힌다. 부장이나 임원으로의 승진, 그 영광과 기쁨을 누리는 순간은 생각보다 짧다. 새 자리에 앉자마자 그에게 맡겨진 임무는 그 전의 직책과 직급과는 차원이 다른 크기와 무게로 다가온다.


조직을 맡아 리더가 되는 것, 개인에게는 다시없을 기회다.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성과를 내서 자신의 능력과 존재감을 보여 주고 싶은 것이 사람 마음이다. 더구나 부장급에서 다른 부서로 수평 이동해 똑같은 크기의 조직을 이끄는 책임자가 되는 것과 달리, 차장급에서 부장으로 승진해 더 많은 부서원과 권한이 주어지는 순간 그는 ‘의욕 100%’의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생각에 사로잡히게 된다. 이에 새로운 리더는 조직을 개편하고, 목표를 수정하고, 업무 영역을 확장한다. 자연스럽게 조직은 ‘엔진 가동률 100%’로 돌진하게 된다. 물론 리더는 생각한다. ‘나 좋자고 이러는 건 아니잖아. 열심히 일해서 성과를 내면 부서원 모두에게 혜택이 돌아가니까’라고. 하지만 이는 미안하게도 리더만의 생각이다. 사람 마음은 다 똑같지 않다.

오래전, 학교에서 학생 개개인의 성적은 물론이고 반 전체 성적 또한 수치화하고 서열을 매긴 적 있다.


그것이 담임 선생님에게 어떤 명예 혹은 인센티브로 작용했는지는 자세히 모르지만 담임 선생님이 시험 때마다 이를 꽤 중요시 여겼던 기억이 있다. 해서 반 전체의 평균보다 점수가 낮은 학생을 꾸짖고 심지어 ‘사랑의 매를 하사’하기도 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반 학생들 중에 반 성적을 중요하게 생각한 친구가 몇이나 되었는지 모르겠다.

회사도 똑같다. 부서원 역시 부서 전체의 매출과 성과에 당연히 신경이야 쓰겠지만 그들에게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개인의 업무 성적이다. 일단 나부터 성과를 내야 다음으로 고개를 들어 동료나 부서 전체를 보는 여유가 생긴다. 하지만 부서를 이끄는 리더는 다르다. 그는 부서원의 성과가 모이고 쌓여 하나로 수치화되는 것이 중요하다. 이 과정에서 일 잘하는 직원이 다른 부서원의 몫까지 더 일하게 되고, 못미더운 직원에게는 아예 일을 주지 않거나 허드렛일만 시키기도 한다. 리더는 생각한다.


‘왜 내 마음을 몰라 줄까?’ 혹은 ‘부서가 살아야 부서원이 사는 걸 왜 모를까?’라고. 이런 생각에 집중하고 그것이 의욕이라는 불쏘시개를 만나면 리더는 무리수를 두게 된다.

부서 직제를 개편하고, 업무 영역을 조절하고, 출퇴근 등 근태에도 엄격해지고, 매달 하던 매출 점검도 매주 혹은 매일로 바뀐다. 자연히 야근과 특근이 많아지고 주말에도 회사를 나와야 할 일이 생긴다. 그리고 부장은 차장이나 팀장들을 이른바 ‘죈다’. 위에서부터 압박이 가중되기 때문이다. 여기서의 문제 중 하나는 리더의 목표가 현실을 훌쩍 뛰어넘는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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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서 매출이 20억 원이고 매년 10% 정도 성장한다면 정상적인 매출 목표는 22억 원이지만, 그럼에도 회사는 성장률보다 훨씬 높게 목표를 잡는 관례로 약 25억에서 30억 원으로 매출 목표를 설정한다. 누구나 다 안다. ‘목표는 목표일 뿐’이라는 것을. 하지만 새롭게 부임한 리더는 이 관례를 무시한다. 그는 두 어깨에 의욕을 잔뜩 짊어진 채 부서 목표를 40억 원으로 정하고 부서원들을 닦달한다. 더구나 이 목표로 가는 과정에서 그는 완만한 상승 곡선을 요구하지 않는다. 급격하게 상승하는 목표를 제시하고 부임하자마자 전투태세에 돌입하는 것이다.

가장 좋은 결과는 목표의 완성 혹은 예상치인 25억 원 정도를 달성하는 것이다.


하지만 애초부터 실현 가능성 없는 목표를 설정하고 1970년대 개발 시대의 유물인 ‘하면 된다’는 정신으로 부서원을 몰아치면 자연히 부작용은 튀어나오게 되어 있다. 그저 큰소리 지르고 앞에서 깃발을 휘두르며 ‘전진’을 외치면서 부서를 운영할 수는 없다. 그것은 지극히 ‘무식하고 용감한 상사’라는 별칭을 얻는 지름길이다.

리더는 냉정하고 객관적이며 현실을 파악하는 인지 능력이 뛰어나야 한다. 부서원의 능력을 파악하고, SWOT(Strength, Weakness, Opportunity, Threat) 분석을 통해 부서의 강점은 살리고 약점은 보완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일치단결된 100% 합의는 아니어도 ‘부서원 전체’라 말할 수 있을 만큼 다수 부서원 마음을 얻어야 한다. 또 이러한 ‘자기 인지’를 통해 달성 가능한 목표를 제시하고 솔선수범해야 한다. 사실 이 과정이야말로 ‘개혁’이다. 개혁은 거창한 것이 아니다. 전진하고 진화하고 부서원 모두에게 공통의 이익과 선이 골고루 돌아가게 만드는 것이 개혁이다. 사람을 자주 내보내고, 밤낮없이 일만 하고, 아무도 바라지 않는, 이상적이고 도덕적이면서 돈도 벌어들이는 조직을 만드는 것이 개혁은 아니다.


리더들은 가끔 혼돈한다. 개혁을 통한 조직 혁신, 개혁을 통한 인적 구조 조정, 개혁을 통한 가장 모범적이고 효율적인 부서를 만들겠다는 다짐이 ‘옳은 것’이라고. 이런 개혁은 문서나 PT로 했을 때 귀를 만족시키지만 회사의 최고 경영진은 그 순간 개혁이 몰고 올 부작용을 먼저 생각한다. 그들 역시 작은 조직의 리더부터 시작해 한 회사를 운영하는 최고 경영진의 자리까지 오르는 과정에서 개혁과 그 반작용의 역풍을 수없이 경험했기 때문이다. 부서의 변신에는 순서가 있다. 리더는 먼저 부서원의 합의와 인정이 가능한 선에서 조직을 개편하고, 합리적인 목표를 설정하며, 일의 경중에 따른 순서를 정하고, 마침내 공정하고 능동적이면서도 솔선수범하는 리더십을 발휘하는 것이 올바른 순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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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은 역풍과 부작용을 부른다

우리는 역사에서 개혁의 기치를 내세웠지만 역풍에 휘말려 이상을 실현하지 못하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인물을 수없이 봐 왔다. 조선 개국의 설계도를 완성한 정도전도 그랬고, 세조 때 젊은 피의 대표 주자로 개혁의 기수였던 남이 역시 개혁 역풍의 희생자였다. 여기에 또 한 명의 인물이 추가된다. 바로 조광조다.


그는 조선 중종 시대의 정치가이자 성리학자다. 조광조는 33세에 중종의 신임으로 권력을 장악하고 급진적인 개혁을 추진했다. 그는 조선의 완전한 개조, 즉 새로운 조선 건설을 목표로 했다. 하, 은, 주 시대의 덕치, 요순 치세의 태평, 그리고 공맹과 주자의 학풍이 살아 있는 조선을 만드는 것이 목적이었다. 조광조는 이러한 이상적인 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무엇보다 성리학의 최고 실천가인 ‘철인哲人’이 되어야 한다고 중종에게 귀에 못이 박히게 간언했다. 하지만 조광조의 개혁은 4년 만에 비극적인 종말을 맞는다. 그는 사약을 받았고 그의 이상과 목표 그리고 학문을 따랐던 젊은 유생과 관리들은 모조리 죽거나 귀양을 떠나야 했다.

조선 건국 후 100여 년 만에 등장한 조광조. 그의 개혁이 성공했다면 조광조는 ‘제2의 정도전’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정도전이 이방원에게 죽임을 당하며 그가 꿈꾸던 조선의 기틀이 변질되었듯 조광조 역시 보수파의 반격에 무너지고 말았다.


그를 발탁하고 힘을 실어 주었던 중종 역시 마지막에 조광조를 외면했다. 이는 조광조의 ‘급진 개혁’이 기득권의 거센 반발을 불러왔고, 또한 조광조의 유일한 버팀목이던 중종조차 쉼표 없는 개혁에 극심한 피로도를 느꼈기 때문이다. 중종 시대 4년 동안 불 같은 열정과 냉철한 이성, 완벽한 수신, 고금을 꿰뚫는 이론으로 세상을 뒤흔들었던 조광조. 과연 무엇이 조광조의 조선 개혁의 원대한 꿈을 무너뜨렸을까. 또 조광조는 어째서 자신의 열성적 지지자던 중종의 신임을 하루아침에 상실한 것일까. 그것은 조광조의 급진성, 타협과 배려 없는 원칙주의와, 세력화되지 않은 학자들만의 지지, 그리고 무엇보다 최고 권력자 중종의 변심을 알아채지 못한 탓이다.

중종은 조광조를 수단으로 생각했다. 조광조 역시 군주를 자신의 뜻을 펴기 위한 방편이라 생각했다. 처음 중종과 조광조가 만났을 때 그들에게는 공동의 적과 목표가 있었다.


하지만 그 적이 힘을 잃고 조광조가 그 힘을 대신하면서 목표만이 부각되자 중종은 조광조를 쓰는 목적, 즉 수단으로서의 기능이 과도하다고 생각했다. 이 과정에서 조광조는 강약 조절 없는 이상주의자로서 어떠한 타협도 하지 않았다. 이 점이 조광조 개혁의 실패 원인이다.

조광조는 1482년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조선 개국 공신 조온의 후손이다. 조광조의 학문에 대한 열의는 대단했다. 책을 한번 잡으면 그 자리에서 한 권을 독파할 정도였다.

어느 날 조광조에게 위대한 스승이 나타난다. 아버지 조원강이 부임한 임지에 마침 무오사화로 유배 중인 김굉필이 있었다. 김굉필은 사림파의 영수 김종직의 직계로, 당대 최고의 학문이었다. 조광조는 17세에 김굉필 문하에 들어간다. 조광조의 학문은 일취월장한다. 조광조는 항상 의관을 정제하고 언행도 바르게 하였고 공부에 열정을 다했다. 조광조는 스승의 가르침을 잊지 않았다. 그가 김굉필과 김종직의 문하를 찾아 다니며 공부하는 집요함 때문에 사람들은 그를 “미친 사람 같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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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광조는 1510년 성균관에 들어간다. 조광조의 학문과 인품은 성균관 유생 중에서도 단연 발군이었다.


당시 성균관 추천으로 관리를 발탁하는 제도가 있었는데 조광조가 추천을 받는다. 성균관 유생 200여 명은 만장일치로 조광조를 추천하지만 조광조의 관리 등용은 좌절된다. 간관 이언호가 반대했다. 이언호는 “조광조는 학문이 뛰어나 지금 관리로 등용된다면 오히려 그의 학문의 깊이가 완성되지 못할 것입니다. 학문에 정진해 훗날 국가의 인재로 쓰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라며 반대했다. 그만큼 조광조는 성균관은 물론이고 조정 관료들이 주목하는 당대 최고의 인재였다.

조광조는 알성시 문과에 급제하면서 중중과 첫 대면을 한다. 중종은 과거 시험을 직접 주관하는 등 젊은 인재를 발탁하려는 의지가 강했다. 중종은 “지금과 같은 어려운 시기에 어떻게 공자의 사상이 녹아 있는 이상적인 국가를 만들 수 있겠는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조광조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임금은 진심으로 백성을 감화시키는 정책을 펴야 하고 또한 조정의 대신을 믿고 함께 국사를 처리하면 위대한 업적을 남길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임금이 덕치로써 나라를 다스리고 솔선수범을 보여야 할 것입니다.


” 중종은 조광조 이름 석 자를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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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리학의 나라를 꿈꾸던 이상주의자

사간원 정언에 임명되고 이틀 뒤 조광조는 상소 한 장으로 조정을 뒤집어 놓는다. 상소는 “나를 파직하던가 아니면 사간원, 사헌부의 모든 대간을 파직하라”는 내용이었다. 조광조의 상소에는 중종과 반정 공신간의 권력 싸움이라는 정치적인 배경이 있었다. 중종은 1506년 반정에 의해 왕위에 올랐다. 반정의 핵심인 박원종, 성희안, 유순정은 정권을 장악한다. 그들의 첫 번째 숙청 대상은 공교롭게도 중종의 장인. 중종의 장인 좌의정 신수근은 반정군 가담 요청을 거부해 죽임을 당하고 만다. 그리고 중종이 왕위에 오른 지 7일 만에 반정 공신들은 중종의 비 단경왕후 신 씨 폐위를 주장한다. 명목은 연산군의 측근이던 신수근의 딸이 왕비에 앉을 수 없다는 것. 반정 공신들은 두 가지 목적이 있었다. 단경 왕후가 반격을 시도할 수 있다는 것과 중종의 기세를 꺾어 놓으려는 속셈이었다. 중종은 왕비를 지킬 수 없었다. 단경왕후는 폐위되어 궁궐에서 쫓겨났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그 무섭던 박원종, 성희안, 유순정도 세상을 떠났다.


중종에게도 군주로서의 힘과 권위가 생기기 시작했다.

단경왕후가 폐위된 지 9년이 지난 1515년, 순창군수 김정, 담양부사 박상이 ‘단경 왕후 복위 상소’를 올렸다. 조정은 들끓었다. 이때 사간원과 사헌부 대간들이 “김정과 박상을 파직하고 죄를 물어야 합니다”는 상소를 올렸다. 반정 공신들의 세가 예전 같지는 않지만 아직도 조정은 이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사간원, 사헌부 대간들의 상소 역시 그들을 의식한 것이다.

이때 조광조가 상소를 올린다. 조광조는 “박상과 김정의 말이 설사 그르다 해도 그들의 안을 채택하지 않으면 그만인데 어찌 이들에게 죄를 주라 합니까. 대간의 임무는 언로를 여는 것, 조정에는 다양한 의견이 활발하게 제 목소리를 내야 합니다. 재상들이 박상과 김정에게 죄를 묻자고 하여도 대간들은 재상의 주장을 언로를 막은 것으로 여겨야 하는데, 지금의 상황은 대간들이 그 직분을 저버린 것입니다. 저를 파직하든 아니면 저들을 모두 파직해야 할 것 입니다”라고 주장했다. 조정은 이 문제로 3개월간 논쟁을 벌였다.


결과는 조광조의 승리였다. 조광조의 원칙론을 훈구파도 반대할 수 없어 결국 대간들은 전부 교체되었다. 중종은 조광조를 눈여겨보기 시작했다. 논리정연하고 강직한 성품, 원칙론을 내세워 정국과 여론을 끌고 가는 힘이 중종의 마음에 든 것이다. 중종은 훈구파를 대신할 세력을 찾고 있었다. 그동안 반정 공신들의 꼭두각시 노릇이나 하던 왕에서 ‘통치하는 군주’가 되고자 한 것이다. 그러기 위해 치열한 권력 투쟁을 감내할 수 있는 인물이 필요했다. 그 적임자로 중종은 조광조를 선택했다.

조광조는 사림 유학의 중심이 된다. 홍문관 부제학 조광조는 중종의 신임을 바탕으로 영향력을 확대한다. 조광조는 대사헌이 된다. 사간원의 말직으로 시작해 불과 3년 만에 권력의 핵심이 된 것이다. 중종은 그에게 개혁을 맡겼다.

조광조는 개혁을 시작한다. 과거가 시문에 치중하고 성리학의 경전을 도외시했다는 명분으로 천거에 의한 인재 발탁을 담당할 현량과를 설치한다.


조광조는 120명의 신진 사림 학자를 천거한다. 중종은 1차로 28명을 뽑아 모두 홍문관, 사간원, 사헌부와 승정원 등에 발탁된다. 단박에 조광조는 언로와 중종의 측근을 장악한다.

조광조의 개혁 바람은 거셌다. 그는 성균관을 보강해 사림의 교두보로 삼고 지방 자치를 꾀해 훈구파의 뿌리를 흔든다. 또한 백성이 성리학의 의리를 깨우쳐야 한다는 신념으로 성리학 이론서를 만드는 등 성리학에 의해 운영되는 국가의 틀을 설계한다. 토지 국유화를 통해 균전제와 토지 소유 상한제인 한전제를 실시했다. 이는 훈구파의 세력 근거지인 노비와 토지를 빼앗아 그들의 세력을 약화시키려는 의도였다. 조광조는 중종의 개인 교사로서 중종에게 ‘철인군주주의哲人君主主義’를 설파했다. 그는 중종에게도 무례할 정도로 다그쳤다. 중종은 서서히 지쳐 갔다. 밤낮으로 자신을 가르치고 잔소리를 해대는 조광조의 존재가 버거워진 것이다. 조광조의 급진 개혁에 반대 여론이 형성됐다. 하지만 조광조는 굽히거나 타협하지 않았다.조광조를 아끼고 지지했던 안당과 정광필조차 조광조에게 타협과 배려의 정치를 당부할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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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속적인 개혁은 피로감을 생산한다

조광조는 개혁의 마지막 칼을 빼어 들었다. 그것은 ‘중종 반정’으로 작위를 받은 공신들에 대한 숙청이었다.


정국 공신 이전에도 조선 역사에서 공신은 많았다. 조선 개국 공신 52명, 태종의 공신 75명, 세조의 공신 87명이었다. 하지만 중종에게 작위를 받은 정국 공신은 무려 105명이었다. 1등 공신 이하 정국 공신 대부분은 1등 공신의 자제와 친척 등으로 아무런 공이 없는 이름뿐인 공신들이었다. 조광조는 이들을 노비와 토지를 하사 받고 권한을 행사하며 조선의 재산을 축내는 존재로 여겼다. 1519년 조광조는 “공신 105명 중 2등 공신 이하 76명은 가짜 공신이므로 이들의 공신 훈작을 삭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동안 조광조에 무조건 지지를 보내던 중종도 주저했다. 공신들의 반발도 걱정이었지만 무엇보다 정국 공신들의 존재는 중종이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정통성의 증거’이기 때문이었다. 고민하던 중종은 결국 조광조의 주장을 받아들였다. 그러면서도 중종의 마음은 차츰 조광조에게 서 멀어지기 시작했다. 이른바 ‘개혁 피로 증후군’의 시작이었다.


공신 세력은 경악했다. 자신들의 영역을 빼앗아 가는 것을 대의와 명분에서 저항할 수 없어 지켜보았던 그들은 조광조의 개혁이 이제 마지막 숨통을 조여 오는 것이라 판단했다. 그들은 반격을 시도했다. 그 중심은 홍경주, 심정, 남곤이다. 이들은 중종의 안팎을 가리지 않고 조광조를 흔들었다. 홍경주의 딸은 중종 후궁 희빈. 희빈은 중종에게 나뭇잎 하나를 보였다. 그 나뭇잎에는 선명하게 ‘주초위왕走肖爲王’이란 글자가 있었다. 이는 ‘조 씨가 왕이 된다’는 뜻. 희빈은 물론이고 심정과 손을 잡은 경빈도 가세했다. “지금 시중에서는 온통 조광조 이야기뿐입니다. 조광조가 국정을 좌지우지하고 백성들의 마음도 조광조에게 기울어 장차 조광조가 왕이 될 것이라는 소문이 돌고 있습니다.”중종은 흔들렸다.

조광조의 공신 삭제가 시행된 지 삼일 째인 1519년 11월15일, 경복궁 신무문이 조용히 열렸다. 그 문으로 홍경주, 남곤, 심정이 들어가 중종을 찾았다. 그들은 조광조의 숙청을 주장했고 중종은 이를 허락했다.


그날 밤 조광조를 비롯한 사림파에 대한 대대적인 체포가 이루어졌다. ‘붕당을 형성해 국정을 문란케 했다’는 죄명이었다. 대사헌 조광조, 참찬 이자, 형조 판서 김정, 대사성 김식, 부제학 김구, 도승지 유인숙, 승지 박세희 등 모두 현량과에 의해 발탁된 사림파의 핵심들이었다. 강경 훈구파는 이들을 단번에 죽일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영의정 정광필, 우의정 안당과 남곤 등은 조광조를 유배 보내자고 주장했다. 옥에 갇힌 조광조는 중종과의 면담을 신청했다. 하지만 중종은 조광조의 면담을 거절하고 그를 화순으로 유배 보냈다. 조광조는 자신을 찾아오는 선비들을 만나 학문과 정국을 토론하면서 복권되어 개혁을 계속해 나가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하지만 훈구파는 조광조의 죽음을 계획했다. 중종은 그해 12월 조광조에게 사약을 내렸다. 이제 모든 것이 끝났음을 깨달은 조광조는 개혁에 대한 굳은 의지와 잘사는 조선 건설의 꿈을 내려놓았다. 그의 나이 38세였다.


조광조의 개혁은 실패했다. 실패의 원인은 여럿이겠지만 조광조의 원칙주의, 타협과 배려 없이 하나의 잣대로 세상과 사람 그리고 사상을 평가하는 것이 개혁 지속력에 걸림돌로 작용했다. 또한 조광조는 사림을 제외한 조선의 모든 당파를 적으로 돌렸다. 게다가 조광조의 가장 강력한 후원자인 중종마저도 조광조를 버릴 수밖에 없는 지경으로 몰아간 것은 최대의 패착이다. 중종이 조광조를 발탁한 목적은 훈구파를 견제하면서 그를 통해 군주의 통치권을 되찾는 것이었다. 그래서 조광조에게 힘을 주었고 그가 천거한 학자들을 관리로 등용했다. 하지만 조광조는 훈구파를 숙청하고 그 빈자리를 차지하면서 중종에게는 또 다른 기득권으로 다가왔다. 결국 중종은 훈구파나 사림파 그 어느 쪽도 왕권을 위협하는 세력이 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조광조는 중종의 신임을 바탕으로 도학 정치를 펴고 싶었다. 그는 세력과 붕당을 형성하고 훈구파처럼 지배층으로 권력과 부를 누리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조광조와 중종은, 개혁 정치를 통해 얻고자 하는 목적이 달랐다. 퇴계는 “뜻은 높으나 정세 파악 없이 무리하게 개혁을 추진한 점과 정치적 타협이 없었던 점이 아쉽다”라고 했고, 율곡은 “자질과 능력이 뛰어났지만 학문이 무르익지 않은 상태에서 정치 일선에 뛰어든 것이 아쉽다”라며 조광조를 아까워했다.

[글 박기종(커리어 코칭 칼럼니스트) 사진 포토파크]

[본 기사는 매일경제 Citylife 제740호 (20.08.04)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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