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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직장인 레시피] 리더의 최고 덕목은 인재 발굴이다

입력 2020.09.17 16:19   수정 2020.09.19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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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서 인재 발굴에 명민하고 이에 투자해 최고 수익을 거둔 인물이 있다. 바로 중국 전국 시대 위나라의 ‘여불위呂不韋’다. 그는 뛰어난 상술을 발휘해 큰돈을 벌었다. 그는 평소 “곡물은 10배, 진귀한 보석은 100배의 수익을 올릴 수 있다. 하지만 사람에 대한 투자는 천만 배의 이익이 남는 장사다”라며 인재 발굴과 투자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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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은 여전히 인재에 목마르다

지난 8월, 기업들이 임직원에게 지급한 상반기 보수를 발표했다. 2020년 1월부터 6월까지의 6개월 치로, 공시 기준 사내 보수 상위 5명 안의 직원에 대한 것이었다. 대상은 기업 오너를 포함해 대개 임원급 이상이다. 이 발표에서 몇 가지 특이한 점을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오너보다 더 많은 보수를 받는 직원이 있다는 점이다. 일테면 삼성전자 이재용 부회장의 보수는 0원, 이는 4년째 동일하다.


물론 수백 조 가치를 지닌 삼성그룹 오너인 이재용 부회장의 연봉이 얼마인가는 큰 의미가 없다. 그렇다면 이재용 부회장을 제외한 그룹사 임원의 보수는 얼마일까.

삼성전자 권오현 고문은 퇴직금 92억 원이 포함된 113억 원을 받았고 전동수, 윤부근, 신종균 고문 역시 퇴직금이 포함된 60억 원대 후반의 보수를 받았다. 현직 CEO급으로는 김기남 반도체 부분 대표 이사가 9억9000만 원을 받았고, LG전자의 권봉석 사장은 10억6000만 원을 받았다. 금융사에서는 한양증권 박선영 상무가 21억5500만 원을 받았는데, 임재택 한양증권 대표는 상위 5명 안에 포함되지 않았다. NH투자증권 김연수 상무는 13억2700만 원, 김연추 미래에셋대우 상무보는 21억2600만 원, 한양투자증권 방창진 상무보는 16억1200만 원, 특히 방창진 상무보는 정일문 사장의 10억1000만 원보다 많았다. IT, 게임 업계에서는 네이버 한성숙 대표가 23억600만 원, 채선주 최고커뮤니케이션 책임자가 20억9200만 원을 받아 창업자인 이해진 글로벌 투자 책임자 11억5800만 원보다 많았다.


넷마블에서는 권영식 대표가 20억3600만 원으로 창업자 방준혁 의장의 6억9000만 원보다 많았다. 엔씨소프트에서는 김택진 대표가 총 132억9200만 원을 받아 연봉 킹을 기록했고, 리니지2M의 총괄 프로듀서 이성구 전무는 22억7000만 원을 받았다. 뷰티 업계에서는 차석용 LG생활건강 부회장이 30억1100만 원을 기록했다.

또 우리의 이목을 끈 것은 스타 PD들의 보수다. CJ 간판 나영석 PD는 급여 1억3900만 원과 상여 8억800만 원을 합쳐 10억1900만 원을, 이명한 상무는 총 12억1600만 원을 받았고, 이는 CJ 이재현 회장 8억3100만 원, 이미경 부회장 10억 원을 능가하는 보수다.

사실 이번 발표된 보수는 코로나19의 여파로 기업 실적과 전망이 예전 같지 않았던 탓에 작년에 비하면 대폭 줄어든 금액이다. 물론 연봉 10억 원대는 결코 적은 금액이 아니다. 보통의 직장인은 평생 만져 볼 수 없는 거금이다.


하지만 1년 매출만 수십 조 원을 올리는 기업 입장에서는 회사에 기여한 임직원에 대한 보상과 격려로 당연히 지급할 수 있는 금액이기도 하다. 수백에서 수만 명에 이르는 직장인 모두의 노력과 정성이 있기에 이런 매출을 올리는 것이 가능하지만, 기업은 스타급 경영인, 천재급 임직원을 선호하고 그 같은 인재를 발굴하고 육성하기 위해 노력한다. 이들은 오너를 제외한 임직원들의 리더 역할을 담당한다. 기업이 나가야 할 거대 담론이 포함된 전략을 세우고, 각 파트 별 세부 전술을 마련해 이를 액션으로 옮기고, 또 예측 밖의 상황이 닥치면 위기를 타개하는 역할이 임원급 리더의 임무이다. 그 책임감과 성취에 대한 보상으로 거액의 보수를 지급하는 것이다. 어쩌면 기업들의 한 해 농사 역시 사람에 대한 투자와 인사가 포함된 용인술에 달린 셈이다.

물론 기업들의 이러한 투자와 결정이 항상 옳은 것은 아니다.


묵묵히 일하는 수십만 직장인의 노력과 그들의 기여보다 스타 플레이어 몇몇의 성과가 더 돋보이는 면도 있지만, 우리는 명품 브랜드를 기적적으로 회생시킨 스타급 디자이너의 존재를 알고 있다. 퇴색해 가는 구찌를 살린 톰 포드, 이미 전설이 된 샤넬의 칼 라거펠트, 루이비통에 생생함을 부여한 마크 제이콥스 등이다. 물론 이들의 창조적 재능과 기업을 이끄는 재능이 동일시되는 것은 아니지만 이 디자이너들의 역할에서 우리는 기업이 왜 ‘인재에 목말라’하는지 알 수 있다.

직장에서 리더의 역할 중 중요한 부분이 바로 ‘인재 발굴’이다. 모 기업에서는 이 역할만 전담하는 임원이 따로 있다. 그들은 대학교 졸업생부터 각 기업의 임직원, 연구소, 대학 교수는 물론이고 언론계, 법조계 등을 고루 살피면서 기업에 필요한 인재를 발굴한다. 마치 프로 스포츠 구단이 운영하는 스카우터팀과 같다. 인재의 발굴에는 기준이 분명하다. 우선 기업이 추구하는 가치와 같이할 수 있는지, 기업이 당면한 현안을 돌파할 능력을 갖추었는지, 또 기업의 미래 가치 투자에 꼭 필요한 인물인지 등이다. 정관계, 언론계를 전담하는 직원이 필요해 고위 관료, 공무원, 언론사 기자 등을 뽑기도 한다.


해서 각 기업들은 임원의 인사 고과에서 S급 인재 발굴과 등용 부문에 많은 비중을 둔다.

일테면 CJ ENM의 연봉을 보면 리더의 인재 발굴 중요성을 확연히 알 수 있다. 이명한 미디어콘텐츠본부장은 KBS ‘1박2일’을 제작한 PD다. 그는 2011년 CJ로 이적했고 이후 나영석, 신원호 PD 등을 영입해 ‘삼시세끼’ ‘꽃보다 할배’ ‘응답하라’ 시리즈를 성공시켜 이른바 ‘이명한 사단’의 성공 사례를 알렸다. 특히 CJ에서 나영석, 신원호 PD의 연봉 지급에 대해서는 ‘성과급 지급 기준에 따라 사업 부분의 매출, 영업 이익 지표 및 제작 콘텐츠의 시청률, 화제성, 콘텐츠 판매액 등 계량 측정 지표에 기준해 콘텐츠 제작 성과를 반영했다’고 발표했다. 또 이명한 상무는 ‘경영 성과와 사업 경쟁력 확보, 우수 인력 영입 및 유지 등 인사, 기업 가치 제고 등을 고려해 인센티브 지급률을 책정했다’고 밝혔다.


이 중에서 ‘우수 인력 영입 및 유지 등 인사’ 부문이 바로 기업 임원에게 부여된 ‘스타급 인재 발굴’의 중요성을 보여 주는 항목이다.

역사에서도 인재 발굴에 압권의 솜씨를 보이고 또 이에 투자해 최고 수익을 거둔 인물을 찾아볼 수 있다. 바로 중국의 전국 시대 위나라의 ‘여불위呂不韋’다. 그는 위나라 북양에 기반을 둔 상인 집안 출신이다. 뛰어난 상술을 발휘해 큰돈을 벌어 ‘부자’ 소리를 들었던 그는 평소 “곡물은 10배의 수익을, 귀한 보석은 100배의 수익을 올릴 수 있다. 하지만 사람에 대한 투자는 천만 배의 이익이 남는 장사다”라며 인재 발굴과 투자를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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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만 배 수익을 위한 장기 투자

여불위는 장사 수완이 좋아 1만 근을 투자하면 10만 근을 버는 재주가 있었다. 돈은 창고에 가득 쌓였고 명성은 드높았다. 당시 전국 시대 최강국은 진나라였지만, 조나라는 곡물이 풍성하고 무역도 활발해 돈이 많았다. 여불위는 조나라 수도 한단으로 갔다. 한단은 풍물이 넘쳐나고 서역의 무역상까지 드나드는 중원의 중심. 여불위는 새로운 사업을 구상했다. 하지만 기발한 아이템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고민하던 여불위는 한단을 떠나기로 결정했다.

당시 조나라는 진나라 소양왕과 전투를 하고 있었다. 이기고 지고를 반복하는 지루한 전쟁이었다.


진나라 소양왕은 조급한 마음에 조나라를 공격했다가 역습에 걸려 패했다. 두 나라는 강화 조약을 체결했다. 그 조건의 하나가 진나라 왕자가 조나라에 인질로 가는 것. 인질로 간 왕자는 소양왕 손자 이인이었다. 그는 소양왕의 둘째 아들 안국군 소생 20명 중 한 명으로, 진나라 입장에서는 오늘 죽어도 슬퍼할 인물은 아니었다. 왕위 계승 서열도 한참 뒤였고 이인의 어머니는 힘없는 뒷방 후궁이었다. 인질로 잡혀 온 이인의 고생은 막심했다. 진나라에서 오는 몇 푼 안 되는 돈도 아예 끊어졌다. 비록 인질이었지만 명색이 왕자인데 조나라는 천덕꾸러기 취급이었다. 이인은 왕자 체면에 구걸을 할 수도 없고 하루 세끼 먹기도 힘든 지경이었다.

여불위가 이인의 이야기를 들었다. 여불위는 생각했다. 그리고 진나라의 왕실 사정을 조사하고 결론을 내렸다. 장사꾼으로서 가장 큰 투자를 하기로. 성공 확률은 1%도 되지 않았지만 만약 성공한다면 그 이익은 상상 이상이었다. 여불위는 이인을 찾아갔다.


“나는 위나라 장사꾼 여불위라고 합니다. 내가 제안하는 것은 왕자께서 커짐과 동시에 내 가문이 일어서는 것입니다. 내가 왕자를 진나라 군주의 자리에 오르게 하겠습니다.”

이인은 깜짝 놀랐다. 여불위는 자신의 생각과 뜻을 전달하고 대신 성공 시 조건을 걸었다. 그것은 이인이 왕위에 오르기까지 필요한 돈과 계책은 여불위가 책임지고 대신 이인이 왕위에 오르면 여불위에게 합당한 대우를 해 달라는 것. 이인은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 여불위는 황금 500근을 이인에게 주었다. 그 돈으로 왕자 체면을 유지하며 조나라의 관리들, 대부들과 교제를 하라는 것. 즉, 인맥 관리와 평판 관리에 들어간 것이다.

여불위는 황금 500근을 들고 진나라 수도 함양, 이인의 아버지 안국군 처소로 향했다. 그의 목표는 화양 부인이었다. 화양 부인은 안국군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었지만 후사가 없었다. 여불위는 그 점을 파고들었다. 그는 화양 부인 친언니에게 재물을 바치고 화양 부인과 만날 수 있었다.


여불위는 화양 부인과 만나면서 왕자 이인 이야기를 꺼냈다. “이인이 조나라에 있으면서도 아침저녁으로 진나라를 향해 절을 하고 특히 화양 부인의 편안을 위해 기도합니다.”

화양 부인은 마음이 흔들렸다. 그때 친언니가 수시로 드나들며 이인을 양자 삼으라 권유했다. “동생의 미모가 출중해 안국군이 자네를 찾고 있지만 나이 들면 젊은 후궁에게 그 자리를 내주어야 하네. 이럴 때 아들이라도 있어야 할 것이 아닌가.”

화양 부인은 안국군에게 이인을 아들로 삼고 세자 자리를 달라고 졸랐고 안국군은 화양 부인의 청을 들어주었다. 여불위는 이인에게 이름부터 바꾸라 했다. 화양 부인이 초나라 사람이니 ‘초나라의 아들’이란 뜻으로 ‘자초子楚’라고 지었다. 여불위는 함양을 수시로 찾아 화양 부인에게 자초의 효심과 성품을 이야기하는 것도 빼놓지 않았다. 그렇게 몇 년이 흘렀다. 비록 자초가 안국군의 세자가 되었지만 안국군은 왕위에 오를 수 없었다. 첫째인 태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불위는 장사꾼으로서 최대의 투자를 해 둔 상태. 이제 그 씨앗이 여물기만을 기다렸다.

여불위와 자초에게 기적이 일어났다. 태자가 병에 걸려 죽은 것이다. 소양왕은 둘째 안국군을 태자로 임명했고, 자초는 왕위 계승권자의 세자가 되었다. 여불위의 소설 같았던 계획이 현실로 이루어졌다. 자초는 틈만 나면 여불위를 찾았다. 그때 기생에게 자초는 반해 버렸다. 그녀는 여불위의 애첩 조희였다. 여불위는 자초의 마음을 읽었다. 여불위는 그날로 조희를 자초의 후궁으로 들여보냈다. 이후 조희는 왕자를 낳았다. 자초는 아들의 이름을 ‘정’이라 지었다. 이가 바로 중국 최초의 통일 왕국을 건국한 진의 시황제다.

후세 역사가들은 이 부분을 두고 논란을 벌였다. 시황제가 진의 왕통이 아닌 여불위의 자식이라는 설과 이는 시황제를 모략하기 위한 일부의 음모론이라며 설왕설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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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익을 유지하기 위한 무리수는 패착

소양왕이 죽었다. 안국군이 왕위에 오르니 바로 효문왕이다. 자초는 진나라의 태자가 되었다. 여불위의 투자가 결실 을 맺기에 이른 것이다. 왕위에 오른 효문왕은 몸이 약했다.


선왕인 소양왕이 장수하면서 그는 너무 늙은 나이에 왕위에 오른 것이다. 그는 정사를 돌보지 못하고 투병 생활을 하다 재위 1년 만에 죽고 만다. 드디어 자초가 진나라 왕위에 오르니 이가 바로 장양왕이다. 이때가 기원전 250년이다. 여불위가 15년 전 1%의 확률을 갖고 투자한 주식이 그야말로 천만 배의 대박을 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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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세상은 여불위의 것이 되었다. 장양왕은 약속을 지켰다. 여불위에게 10만 호의 식읍을 내주었다. 그리고 진나라 승상으로 임명했다. 일개 장사꾼에서 전국 시대 최고 부자이자, 최고의 자리에 앉은 것이다. 장양왕은 여불위에게 문신후 작위도 주었다. 여불위는 돈과 명예를 한 손에 거머쥐었다.

여불위는 영리했다. 그는 돈을 학자와 식객 그리고 관리들에게 뿌렸다. 왕뿐만 아니라 진나라의 토착 세력을 후원하면서 그들을 든든한 지원군으로 만들었다. 학자와 관리들은 여불위에게 충성을 다했다. 결국 진나라를 움직이는 실질적인 왕은 여불위였다.

장양왕은 왕위에 오른 지 3년 만에 병으로 급사했다. 왕위는 장양왕의 아들 정이 이었다. 이때가 기원전 246년, 정의 나이 불과 13세였다.


여불위는 대리청정을 맡았다. 그는 승상보다 높은 상국의 자리에 올랐고 ‘왕의 아버지’란 뜻의 ‘중부仲父’ 호칭까지 얻었다. 여불위의 권세와 재물은 더욱 강해지고 늘어났다.

여불위는 식객을 모았다. 여불위는 왕이 부럽지 않은 위치였지만 그 역시 콤플렉스는 있었다. 바로 ‘공부’이다. 장사꾼으로 성공했지만 공부에 대한 회한이 있었다.

여불위의 식객과 학자들의 숫자는 무려 3000여 명이었고, 하인도 1만 명이 넘었다고 한다. 여불위는 예술과 문학에 대한 투자도 아끼지 않았다. 『여씨춘추』는 춘추 시대의 역사, 만물을 기록한 책, 일종의 백과사전이다. 총 20여 만 자로 쓰인 이 책을 만들고 여불위가 얼마나 애착이 있었는지는 ‘일자천금一字千金’이란 고사에서 드러난다. 여불위는 책을 수도 함양에 진열하고 전국에 포고령을 내렸다. “이 책에서 하나라도 추가하거나 뺄 수 있는 글자를 찾는다면 천금을 주겠다.”

여불위에게 근심거리가 있었다. 진왕 정의 생모 태후와의 불륜이었다.


태후는 본래 여불위의 애첩 조희. 태후는 침전으로 여불위를 끌어들였다. 여불위는 진왕의 존재가 부담스러웠다. 장차 진왕 정이 친정을 해 태후와의 불륜이 발각된다면 죽더라도 변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여불위는 꾀를 내 노애라는 자를 태후의 침전에 들였다. 태후는 노애에게 흠뻑 빠졌다. 태후와 노애는 두 명의 남자아이를 낳았다. 태후는 함양궁을 떠나 외궁에서 아이를 낳고 노애와 살림을 차렸다. 노애는 여불위 흉내를 내었다. 식객 1000여 명을 들이고 벼슬 장사도 해 큰돈을 벌기 시작했다. 여불위는 태후와 노애의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자신도 떳떳하지 못해 참견을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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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심을 갖고 일을 하면 성공하지 못한다

진왕 정 재위 9년. 태후와 노애의 스캔들이 진왕의 귀에 들어갔다. 진왕은 비밀리에 조사했다. 진왕은 태후와 노애의 관계도 놀랍지만 여불위가 태후와 불륜 관계였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또한 노애와 태후가 ‘자신의 자손으로 왕위를 이어 나가면 좋겠다’는 말을 했다는 것에 분노했다. 노애는 반란을 시도하다 사로잡혔다. 진왕 정은 노애를 죽이고 아들 두 명도 처형했다. 그리고 노애의 식객은 물론 노애를 통해 관직에 오른 자들을 죽이고 귀양 보냈다.


어머니 태후마저 유배를 보냈다. 그리고 여불위를 처벌하기 위해 대신들을 불렀다.

대신들과 사관들은 진왕의 뜻에 반대했다. 그들은 이미 여불위의 후원을 받아 모두 여불위의 사람이 된 것. 대신들이 ‘여불위가 선왕 때부터 공이 많다’는 이유를 들어 반대하니 진왕도 여불위를 처벌할 수 없었다. 진왕은 기다렸다. 1년을 기다린 후 진왕은 여불위를 상국에서 해임하고 하남 땅 영지로 보냈다. 이때 대신들도 반대할 수 없었다. 스무 살이 넘은 진왕의 권위가 강해진 것이다. 여불위는 하남 땅 영지에 머물렀다. 상국이란 지위에서 해임되었다 해도 여불위의 힘과 돈은 여전했다. 수많은 사람이 여불위를 찾아 집에는 수천의 식객과 빈객이 머물고 제후들의 출입도 잦았다.

진왕은 여불위의 처신이, 아니 존재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혹시라도 반역을 꾀하지 않을까, 여불위는 그럴 뜻이 없더라도 주위에서 부추기지는 않을까, 더구나 자신이 진의 혈통이 아닌 여불위의 자식이라는 말까지 돌고 있으니 진왕의 심기는 불편했다.


진왕은 여불위를 처단하기로 결심했다. 편지 한 통을 여불위에게 보냈다. 물론 편지에는 ‘여불위는 죽어라’라는 말이 없었다.

“그대는 무슨 공이 많다고 상국에 중부로 불리며 호사를 누렸는가? 모든 재물과 명예를 내려놓고 촉땅으로 가 자숙하라.”

여불위는 생각했다. 촉땅은 귀양지로서도 가장 중죄인만 보내는 곳. 그것보다 여불위는 진왕이 자신이 죽었으면 한다는 생각을 읽었다. 그는 주판알을 튕겨 보았다. 아무리 따져 보아도 이 장사에서 이익을 남길 수 없다는 사실, 즉 시간 문제일 뿐 진왕이 언젠가는 자신을 죽일 거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는 독약을 마시고 자살했다. 기원전 235년, 여불위의 나이 56세였다. 다른 나라에 인질로 간 왕자에게 전 재산과 생애를 건 투자를 성공시켰던 천하제일 장사꾼 여불위도 왕과의 동거에는 실패한 것이다. 물론 그의 실수가 컸다. 자초를 장양왕으로 만들고 그의 아들 진왕 정의 대리청정이 끝나는 시기에 그는 그만두었어야 했다.


또한 태후와 불륜 관계를 유지한 것은 최대 패착이었다.

‘넘치는 것은 모자라는 것과 마찬가지다’라는 이치를 그가 몰랐을 리 없다. 다만 그가 생각한 은퇴 시기와 진왕이 생각하는 시기가 일치하지 않았던 것. 선왕을 자신이 왕위에 올렸다는 점, 진왕이 어려 자신이 권력을 쥐고 대리청정을 한다는 점 등 유리한 것만 보고 안일하게 정세를 판단해 위험 요소에 대한 세심한 검토가 미흡했다. 진왕 정의 공격적인 성품, 스무 살이 넘어 친정을 시작한 권력자의 야망, 태후와 노애의 관계를 남녀 불륜으로 판단한 정보 오류 등이 여불위에게 칼이 되어 돌아왔다. 아마도 여불위가 전 재산을 내놓고 영지로 가 조용히 책이나 읽고 소일했으면 그는 천수를 누렸을 것이다. 하지만 여불위는 여전히 돈의 위력을 과시했고 자신이 진왕과 그 선왕인 장양왕을 왕위에 올렸다는 자부심에 젖어 있었다.

물론 여불위는 단순한 장사꾼이 아니었다. 진나라를 다스렸고 그때 그가 보여 준 인재를 판단하는 기준은 지금도 많은 시사점을 남긴다.


여불위의 인재 채용 방식은 독특했다. 그는 학문과 성품 중에서 성품을 특히 중시했다. 즉, 학문의 기본적인 소양을 든든히 받치고 있는 인성을 보고 능력을 판단하는 면접을 했다. 이것은 백성의 생사고락을 매일 결정해야 하는 관리에게는 냉정한 판단 능력과 절제력이 우선이라는 것으로, 오늘날 요구되는 리더의 자질과도 일맥상통한다. 어쨌든 장사꾼으로서 여불위의 투자는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이익을 남겼다.

사람에 대한 투자에서 가장 조심할 점은 조급함이다. 때를 기다리지 못하고 결과를 재촉하거나 밥이 다 익었는지 수시로 솥뚜껑을 열어 보는 짓은 일을 망치는 지름길이다. 직장에서도 마찬가지다. 장기 투자와 단기로 이익을 보는 것은 엄연히 다르다. 사람에 대한 투자는 장기이다. 과장이나 차장과의 인연을 이어 나가는 지금의 관계도 소중하지만 과장과 차장이 부장과 이사로 승진하면서 자리를 잡아 나가는 것은 나에게도 분명 이익이 되는 장사다.


여불위의 투자 원칙 포인트는 세 가지다. 장기적이었고, 그 성공을 위해 노력과 수단을 아끼지 않았고, 또 투자자나 대상자 모두가 성공의 열매를 나눠 가질 수 있게 한 것. 물론 사람의 미래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 당신이 장기적인 투자 대상으로 점 찍은 직장 상사나 부하 직원의 가치가 순간 하락한다고 초조해할 이유도, 반대로 주가가 오른다고 기쁨을 내색할 필요도 없다. 가치 투자는 그야말로 투자 대상의 가치를 세상이 인정할 때 진정한 이익을 볼 수 있으며, 기다림이 그 전제 조건의 일순위라는 걸 기억해야 한다.

[글 박기종(커리어 코칭 칼럼니스트) 사진 언스플래시]

[본 기사는 매일경제 Citylife 제747호 (20.09.22)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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