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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장충단공원獎忠壇公圓-굵은 역사의 주름이 새겨진 제단

입력 2020.10.15 1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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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허파 같은 남산의 동북쪽 끝자락이 장충단공원이다. 지하철3호선 동대입구역에서 지척이고 남산둘레길과 연결된다. 예부터 이 지역은 재물 명당으로 손꼽혔다. 현재는 신라호텔, 동국대학교, 장충동 족발 골목과 제과점 태극당이 있다. 남산의 정기가 내려와 이곳에서 모인다고 해서 신라호텔과 그 맞은편 장충동에는 이름만 대면 알 만한 부자들이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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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충단 도보 탐방 코스 ‘호국의 길’ 안내도 (©중구문화관광 홈페이지) 장충단공원은 본래 사당이었다. 1905년 일제는 명성 황후를 시해했다. 이에 맞서 당시 궁내부대신 이경직, 시위연대장 홍계훈과 시위 병사들은 무기를 들었지만 모두 전사했다. 고종 황제는 이들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제단을 만들었다. 바로 장충단으로, 지금의 신라호텔 자리다.

그리고 명성 황후의 황태자 순종은 장충단의 글씨를 손수 썼다. 바로 어머니에게 바치는 ‘초혼단招魂壇’이다. 고종은 매년 봄가을에 이곳에서 제사를 지냈다.


1910년, 일제는 조선을 강제 병합하고 식민 통치를 시작했다. 일제는 장충단 자리에 이토 히로부미를 기리는 박문사라는 절을 세웠고 1909년 이토 히로부미가 안중근 의사에 죽임을 당하자 이곳에서 추도회를 열어 장충단을 능욕하기도 했다. 그리고 장충단 인근 지역을 모두 공원으로 만들었다. 벚나무 수천 그루를 심고, 연못을 파고, 산책로를 만들고, 정자를 세우고, 상하이 사변에서 전사한 일본군의 동상을 세웠다. 그렇게 일제는 장충단에 깃든 호국과 충절의 정신을 파내고 이름도 장충단공원으로 바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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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표교 (©위키피디아 Jtm71), 장충단비 (©위키피디아 Hangidan) 해방 후, 공원에는 여러 시설이 들어섰다. 대표적인 것이 1959년 청계천을 복개하면서 철거된 수표교다. 또 이준 열사의 동상과 만해 한용운 선생 시비, 임진왜란 때 승병을 이끈 사명 대사의 동상이 건립되었다. 이준 열사 동상 옆에는 ‘한국 유림 파리 장서비’가 서 있다. 3.1운동 당시 유림 대표들은 일제의 강제 병합, 국권 침탈을 규탄하고 식민 통치의 부당함과 폭력성을 지적하며, 대한 제국 독립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내용을 청원서에 담아 파리 강화 회의에 제출했다.


장충단공원을 흐르는 실개천으로 내려가면 ‘수표교水標橋’가 보인다. 길이 27m, 폭 7m의 돌로 된 이 다리는 세종이 1441년 놓았는데 청계천의 수위를 측정해 홍수를 대비하려는 용도였다. 육각형 화강암으로 된 기둥 위에 긴 횃대를 걸치고 위에는 고르게 다듬은 네모난 돌을, 아래는 거친 네모난 돌을 2단으로 포갠 매우 독특한 수법으로 지어졌다. 바닥은 돌난간을 세웠는데, 한쪽에 11개의 엄지기둥을, 그 사이에는 동자기둥을 1개씩 세웠다. 이후 영조 때 눈금을 새긴 돌기둥을 세웠는데 이 기둥은 10척, 즉 약 3m까지 물의 양과 높이를 측정할 수 있었다.

현대사에도 장충단공원은 몇 가지 사실로 기억된다. 1971년 제7대 대통령 선거 당시 박정희, 김대중 후보가 이곳에서 대규모 군중 연설을 열었고, 한국 가요사의 중심 배호의 노래도 이곳에 오면 생각난다. 1942년 생으로 중국 산동성에서 태어난 배호는 해방이 되자 독립운동을 했던 부모를 따라 서울로 왔다.


이후 1958년부터 음악 활동을 하며 ‘돌아가는 삼각지’, ‘안개 낀 장충단공원’으로 일약 스타덤에 올라 당대 국민 가수가 된다. 하지만 재주가 많아서일까. 1971년 복막염 합병증으로 불과 29세에 세상을 떠났다. 당시 온 나라가 슬픔에 잠겼고 소복을 입은 여인들이 장례식장을 찾아와 통곡하기도 했다.

[글 장진혁(프리랜서) 사진 위키피디아, 중구 문화관광 홈페이지]

[본 기사는 매일경제 Citylife 제750호 (20.10.20)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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