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고아라의 포토에세이] 허구와 실제의 경계, 이스탄불 순수박물관…소설속 박물관 자리에 진짜 그 박물관이

입력 2020/11/09 04:03
수정 2020/11/09 09:16
터키 문호 오르한 파무크 소설 속
주인공 오브제를 작가가 직접 수집
83개 챕터에 맞춰 전시부스도 83개

'사랑과 집착' 강렬한 스토리에
주인공의 옷가지·칫솔·컵까지…
1990년대 터키 오묘한 '레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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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타 타워와 이스탄불 구시가지 전경.

나는 한 줄의 문장이 이끄는 운명을 믿는다. 터키를 대표하는 작가 오르한 파무크의 소설 '눈' 속 적막한 문장들은 나를 터키 동쪽 끝에 위치한 작은 도시로 이끌었고, 그 여정은 광대한 아나톨리아 평원을 가로질러 이스탄불까지 이어졌다. 동서를 잇는 문명의 교차로에서 3000년을 지나온 이 오랜 도시를 기억하는 방법은 무궁무진하다. 그러나 나에게 이스탄불에 대한 기억은 옛 시가지의 어느 골목에 서 있던 붉은색 집, '순수박물관'에서 시작한다.

'순수박물관'은 파무크가 노벨 문학상을 받은 이후 쓴 첫 작품이다. 소설의 이야기는 한 여자를 44일 동안 사랑하고, 사라진 그녀를 339일 동안 찾아 헤매고, 2864일간 그리워한 한 남자, 케말의 발자취를 따른다.


이스탄불 부르주아 집안에서 태어난 케말은 약혼녀 시벨과 명예와 사회적 지위를 고려한 결혼을 앞두고 있다.

그러나 어느 날 그는 먼 사촌인 퓌순과 우연히 마주치게 되고 둘은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케말은 본래 예정되어 있던 시벨과의 약혼을 강행한다. 그리고 이 둘의 약혼식이 열리던 날을 마지막으로 퓌순은 자취를 감춘다. 케말은 뒤늦게 퓌순에 대한 사랑을 깨닫고 사라져버린 그를 지독하게 찾아 헤맨다. 그리고 마침내 퓌순과 관련된 수집품들을 모아 놓은 박물관을 건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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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탄불 구시가지의 골목 풍경. 오르한 파무크가 노벨 문학상을 받은 이후 처음 쓴 `순수박물관` 이라는 작품 속 박물관이 실제 존재한다.

2012년 4월, 소설 속에만 존재하던 박물관은 현실이 되어 나타났다. 장소는 이스탄불 츠쿨추마의 비탈길, 소설 속 박물관이 있던 바로 그 자리다. 사실 파무크는 '순수박물관'을 쓰기로 마음먹은 순간부터 박물관을 건설할 계획을 세웠다. 그는 1990년 중반부터 소설에 쓸 이야기에 맞춰 오브제를 차곡차곡 모으기 시작했고, 때로는 물건 속에서 영감을 얻어 소설의 이야기를 써 내려가기도 했다. 소설을 본격적으로 집필하기 시작한 2002년 이후에도 그는 계속해서 박물관을 채울 물건들을 수집했다. 그러니까 소설 속에 존재하는 가상의 순수박물관과 이스탄불 베요울루 구역의 한 골목에 실재하는 순수박물관은 동일한 시간의 선상에서 무럭무럭 함께 성장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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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속 케말이 머물렀던 방. 주인공의 다양한 오브제는 작가 파무크가 직접 수집했다.

박물관은 총 3층으로 이루어져 있다.


본격적인 전시는 2층부터 시작된다. 어두운 조명이 깔린 전시관 사방은 전시 부스로 빼곡하게 채워져 있다.

각 부스에는 번호가 매겨져 있는데 이는 소설 속 챕터를 상징한다. 소설은 83장으로 이루어져 있으므로 전시 부스 개수도 총 83개다. 각각 부스 안에는 해당 챕터 내용과 관련된 모든 오브제가 충실하게 담겨 있다. 퓌순의 귀걸이, 그의 허상을 보았던 곳이 표시된 이스탄불 지도, 그가 입었던 옷가지와 신발, 그가 마셨던 컵이나 칫솔. 누군가에겐 순수한 사랑, 누군가에겐 섬뜩한 기행으로 느껴질 주인공의 모든 행동과 감정들이 한 편의 연극 무대처럼 진지하게 올려져 있다.

소설을 읽은 이들에게 순수박물관은 페이지 사이에 숨겨진 무한한 세계로 뛰어들 수 있는 특별한 경험을 선사한다. 소설을 읽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이곳은 여전히 흥미로운 공간이다. 한 여자를 향한 맹목적인 그리움에 이끌린 한 남자는 이스탄불 구석구석을 편집증 환자처럼 훑고 다녔다. 그 덕분에 한 공간에 모인 수많은 오브제들은 유기적으로 얽히고설켜 과거의 이스탄불을 고스란히 구현해 낸다.


예를 들면 한 시대를 풍미했던 음료수, 멜템 사이다 광고나 중절 수술을 한 여인들의 눈이 모자이크된 사진이 실린 신문, 유럽에서 막 건너오기 시작한 사치품 같은 것들이다. 소설의 표면적인 이야기는 광기에 가까운 한 남자의 사랑을 표방하고 있지만, 그 이면에는 현재와는 전혀 다른 과거 이스탄불의 생활상, 부르주아의 삶, 동서양이 교차하는 문명의 소용돌이, 계급 갈등, 뒤틀린 사회 통념, 여성들의 지위, 순결에 대한 인식과 같은 20세기의 터키가 그대로 담겨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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퓌순이 피웠던 담배꽁초 4213개를 전시해 둔 1층 벽면 모습.

소설 속 순수박물관의 세계는 허구다. 그러나 파무크는 허구의 세계를 실제로 옮겨놓으며 그 경계를 무너뜨렸다. 이 작은 건물 안에서 수시간을 보내고 마지막으로 퓌순이 피우고 남겨둔 담배꽁초 4213개를 전시해 둔 1층 벽면 앞에 선다. 사랑과 집착, 허구와 진실 그 모호한 경계 사이로 연민, 메스꺼움, 흥미, 인내와 같은 수많은 감정 조각들이 하나의 연기가 되어 피어오른다.

박물관을 나와 오래된 장밋빛 건물을 바라본다. 자그마한 대문의 초인종 앞에서는 사라진 연인을 찾으러 온 케말의 뒷모습을, 2층 창가에서는 자갈이 깔린 츠쿨추마의 비탈길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담배를 피우는 퓌순의 옆모습을 본다. 물론 그들이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지만, 순수박물관에서 그런 것들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는 것도 안다.

나는 머지않은 미래에 또다시 이스탄불을 찾을 것이다. 그리고 순수박물관은 그 여정의 아주 큰 이유가 될 것이다. 허상이 현실이 되고, 시간이 공간이 되는 그 마법 같은 순간을 위해. 갈매기 떼와 낚시꾼들이 늘어선 갈라타 다리, 보스포루스 해협의 신비로운 바람과 삐걱대는 어선, 아름다운 집들이 보석처럼 수놓인 언덕, 지난 여름날의 햇살이 깊게 스며든 좁다란 골목, 그리고 한 여자를 애타게 찾던 한 남자가 있던 그 이스탄불을 만나기 위해.

[글·사진 = 고아라 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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