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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직장인 레시피] 경쟁의 후유증, ‘많이, 빨리’에서 벗어나라

입력 2021.02.08 20:40   수정 2021.02.08 2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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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치열한 경쟁을 뚫고 원하는 자리를 차지한 직장인이 있다. 그는 성취의 기쁨을 채 누리기도 전에 다시 경쟁 관계에 함몰된다. 그에게는 또 다른 성공을 위한 도약이 아니라 실패의 길일 수도 있다. 경쟁의 지속에서 벗어나야 한다. 즉 ‘더’라는 굴레에서 벗어나야 한다. 더 성과를 올리고, 더 일하고, 더 충성하고, 이런 압박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그는 눈앞의 경쟁에서는 승리자가 되지만 결국 경쟁의 수레바퀴에 치이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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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경쟁하는 자’라는 의미이다

위대한 철학자 괴테는 경쟁을 두고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인간이다. 그것은 ‘경쟁하는 자’라는 것을 의미한다.” 맞다. 인간은 이미 탄생부터 경쟁의 길에 들어설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그렇다면 경쟁은 무엇일까? 사전에서는 ‘같은 목적에 대해 이기려고 서로 겨루는 것’ 혹은 ‘욕망의 방향이 같을 때 일어나는 다른 이와의 다툼’이라고 정의한다. 직장인은 이미 수많은 경쟁의 경험자이다.


유치원 입학, 사립 초등학교 입학은 물론이고 특목고나 자사고 입학, 경쟁의 끝판왕 대학 입시에서 성공과 좌절을 겪는다. 공부의 결과가 수치로 나타나는 성적표는 대학 졸업 때까지 따라다닌다. 끝이 아니다. 갈수록 좁아지는 취업난은 물론이고 공무원 임용 고시 경쟁률 역시 ‘시작의 결심’을 무디게 한다. 치열한 경쟁을 뚫고 직장인이 되어서도 경쟁은 계속된다. 업무 성과표는 학생 시절의 경쟁은 ‘별것 아니었다’는 느낌마저 들 정도다. 대리, 과장, 차장 승진, 차별된 인센티브, 핵심 부서 근무 등 갈수록 직장인이 겪어야 할 경쟁은 치열하고, 그 결과는 냉혹하다.

혹자는 말한다. “경쟁의 세계에는 두 가지 어휘밖에 없다. 이기느냐 지느냐다.” 또 이렇게도 말한다. “선의의 경쟁은 승자와 패자 모두에게 시너지 효과를 준다”고. 이 아름다운 말에 공감할지 모르지만 이 말은 그럴듯한 수사일 뿐이다. 우리는 경험으로 알고 있다. 경쟁에서 패배한다는 것은 시간, 기회에서 느려지고, 밀려난다는 것을. 물론 경쟁 구도가 조직과 개인에 해악만 끼치는 것은 아니다.


조직과 개인에 긴장감을 부여하고, 또한 성취 욕망을 자극해 발전과 성장에도 기여하는 부분이 분명히 있다. 하지만 ‘패자 부활전’이 없는 경쟁 구도에서는 승자와 패자 모두 ‘치열함’이 빚어내는 상처를 입는다. 승자는 성공과 승리의 압박감에 포로가 되고, 패자는 졌다는 절망감에 사로잡힌다. 인간미라고는 1도 없는 경쟁 구도에서 벗어나고 싶지만 현실은 만만치 않다. 방법은 사표를 내고 경쟁의 무한궤도에서 이탈하는 것뿐이다. 수많은 직장인이 이 방법을 생각해 보지만 유일하게, 나만이 할 수 있는 것은 세상에 없다. 교회 십자가보다 더 많은 치킨집, 커피숍이 그것을 말한다. 방법은 경쟁을 받아들이는 내 마음의 자세를 바꾸는 것이다.

동료보다 늦어도 그저 마라톤 완주가 목적인 것처럼 길게 가는 방법도 있고, 회사 일 대신 주식 사이트만 들여다보거나 아니면 조상이 물려준 땅을 찾는 것, 아버지가 생각지도 않은 든든한 통장 하나 ‘힘내라고’ 주는 것도 방법이다. 이도 저도 아니라면 원치 않아도 치열한 세계에 뛰어들어 승자가 되는 길밖에 없다. 이 또한 직장인의 숙명이다.


직장은 분명 사람보다 자리가 적고, 과정보다 결과를 중시한다. 경쟁은 입사부터 시작된다. 수백 명이 동기라는 이름으로 입사하지만 인사 카드에는 이미 순위가 매겨져 있다. 대리, 과장까지는 비교적 순탄한 경쟁을 한다. 그러다 차장, 부장부터 본격적인 경쟁이 시작된다. 우리는 이미 학창 시절의 경험이 있다. 고등학교 1학년 1학기 때 성적이 고3 졸업할 때까지 유지되는 것을. 직장 생활도 마찬가지다. 특출한 몇몇 직장인을 제외하면 입사 때의 유망주는 결국 승진과 업무 성적에서도 우선 순위를 유지한다. 이는 경쟁이라는 큰 틀 속에서 ‘관리’라는 세심한 터치가 있기에 가능하다. 입사 후 핵심 부서에 배치받는 순간, 경쟁에서 이미 유리한 구도를 점하게 된다.

핵심 부서는 당연히 업무 성과에서 타 부서를 압도한다. 게다가 회사의 엘리트들이 모여 있는 부서의 성격상 인맥 형성도 유리하다. 핵심 부서의 부장이 핵심 임원으로 승진하고 그의 눈에 든 부서원에게 기회는 더 주어진다. 이런 구도가 바로 경쟁에서의 특혜다.


물론 입지전적인 자기 관리와 열정으로 두각을 나타내는 직장인도 있다. 그는 보통의 직장인이 겪는 경쟁 전투를 몇 번은 더 치른 ‘검투사형 직장인’일 것이다. 그 과정에서 그 직장인은 성공과 승리에 대한 압박감을 분명 몇 배는 더 겪었을 것이다.

여기 치열한 경쟁을 뚫고 원하는 자리를 차지한 직장인이 있다. 그는 성취의 기쁨을 채 누리기도 전에 다시 경쟁 관계에 함몰되기 쉽다. 이 점이 그에게는 또 다른 성공을 위한 도약이 아니라 실패의 길일 수도 있다. 우선 경쟁의 지속에서 벗어나야 한다. 즉, ‘더’라는 굴레에서 벗어나야 한다. 더 성과를 올리고, 더 일하고, 더 충성하고, 이런 압박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그는 눈앞의 경쟁에서는 승리자가 되지만 결국 경쟁의 수레바퀴에 치이고 만다.

S기업 박 부장이 있다. 그는 치열한 경쟁을 뚫고 부장 승진에 성공했다. 그가 입사하기 전 경기가 불황이라 회사는 2년간 신입 사원을 뽑지 않았다. 대신 그가 입사한 해에 평소에 선발하던 신입 사원의 2배를 뽑았다.


그 기수를 회사에서는 ‘저주받은 기수’라 불렀다. 무엇이든 경쟁이 두 배였다. 집, 친구, 취미 모든 것을 버리고 박 부장은 일에 매진했다. 결국 쉽지 않았지만 박 부장은 부장이 되었다.

오랜 시간 경쟁과 실패를 거듭하며 목적을 이룬 박 부장은 승진하자 자신감에 사로잡혔다. 하지만 그 자신감 뒤에는 ‘다시는 경쟁에서 뒤떨어질 수 없다’는 무거운 압박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압박감을 ‘야망과 욕심’으로 위장했다. 박 부장은 부장 자리가 마치 도깨비방망이처럼 무엇이든 다 할 수 있고 이룰 수 있는 위치라 생각했다. 그리고 그는 부서가 진짜 해야 할 일보다 임원들에게 자신의 성과와 능력을 과시할 수 있는 일에 몰두했다. 즉, 전시성 일에 자신의 능력은 물론 부서 역량을 집중했다. 처음에 이 작전은 성공했다. 임원들은 포장이 잘 된, 그럴듯한 수치로 무장한 박 부장의 성과에 만족했다.

그렇게 1년이 지났다. 박 부장은 임원들에게 인정받는 자신의 입지를 확인하고 개인적인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자신의 권한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는 칼을 휘둘렀다. 잠재적 경쟁자인 동기들을 쳐내기 시작했고 차장 시절 다른 편에 줄을 선 부하 직원들에게 가혹한 잣대를 들이댔다. 또한 부서에서 자신의 결정에 반발하거나, 본연의 업무에 충실하자고 건의하는 부하 직원들에게는 인사 고과에서 낮은 점수를 주었다. 점차 부서는 박 부장의 승진과 전시성 성과를 내기 위한 부서가 되었다. 부서원들의 불만도 쌓이기 시작했다.

결국 2년이 지난 후, 박 부장은 좌천을 당했다. 회사에서도 실속보다는 겉보기에 치중한 이벤트성 성과를 알아챘고, 박 부장의 부서원에 대한 인사 평가가 공정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박 부장은 경쟁이 낳은 괴물이다. 그는 목을 조여 오는 패배의 두려움에 사로잡혀 오로지 경쟁의 승리만을 우선 순위로 두고 조직을 운영했다. 조직은 부장급의 승진 기준으로 리더십을 중요하게 여긴다.


리더의 덕목은 추진력, 전략적 사고, 판단력 등등 업무적인 요소도 있지만 조직을 잡음 없이, 부서원의 불만이 회사의 불만으로 발화되는 것을 방지할 수 있는 능력도 있다. 리더는 경영진이 선택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스스로 만드는 것이고 그 기본에는 부서원의 암묵적 동의가 필요하다. 싫은 사람, 미운 사람, 좋은 사람 등과 어깨동무를 할 수 있는 관용과 배려를 키워야 한다. 어쩌면 그도, 그 감정을 숨기고 있을지 모른다. 역지사지의 시각, 아무리 생각해도 리더가 갖추어야 할 덕목 중 으뜸이다.

역사에서도 치열한 경쟁을 뚫고 원하는 자리에 앉았지만 그 후유증에서 벗어나지 못한 불운아들이 있다.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조조의 아들 ‘조비’다. 조비는 나이 40세에 병사하고 말았다. 그는 한마디로 아버지의 위대함을 넘어서려 했던 불운한 후계자다. 그는 자신의 능력과 시대적 상황을 무시하고 오로지 아버지 시대를 함께한 이들에게 능력을 과시하려다 실패했다.

▶25:1의 경쟁을 뚫은 조조의 후계자

‘호랑이는 호랑이를 낳는다’고 한다. 하지만 이 말에는 ‘호랑이가 고양이를 낳을 수도 있다’는 함축적 의미도 포함된다.


이는 역사적으로 증명되었다. 그것은 창업보다 수성이 더 어렵다는 의미이며, 창업주의 위대함이 뛰어나 그 후계자가 아무리 발돋움을 해도 못 따라간다는 말이다. 유비의 아들 유선은 무능력 후계자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유비가 제갈공명에게 “승상께서 내 아들 대신 황제의 자리에 올라 달라”는 소리를 할 정도로 유선은 평균 이하였다. 당연히 유비와는 비교 불가인데, 아버지라는 이유로, 후계자란 이유로 유비와 비교했으니 유선에게는 불공정한 게임인 셈이다.

조조의 후계자 조비 역시 마찬가지다. 그는 유선에 비해 능력에서 한 수 위라고 평가 받았지만 조비 역시 아버지 조조의 위명이나 능력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조비는 삼국 중 가장 강력한 위나라를 조조에게 물려받았지만 그의 재위 시절부터 위나라는 패망의 길을 걷다가 4대를 잇지 못하고 사마 씨에게 천하를 뺏기고 말았다.


물론 ‘조비를 위한 변명’은 있다. 젊은 나이에 요절해 재위 기간이 불과 7년이라 실력을 평가받을 시간이 부족했다는 점과, 또 하나는 조비가 무려 25:1의 치열한 후계 경쟁을 뚫고 황제의 자리에 오르는 과정에서 고집스럽고, 내세우기 좋아하고, 사람을 믿지 못하는 성격으로 변했다는 점이다.

조비는 조조의 셋째 아들이다. 장남은 조앙이다. 그는 조조가 장수와 전투에서 위급한 처지에 놓이자 아비를 대신해 전사했다. 차남 조삭은 병으로 죽었다. 셋째 조비가 장남이 되었다. 조비는 조조의 후궁 소생이지만 조앙, 조삭의 생모 유 황후가 세상을 떠나자 변 황후가 정비가 되면서 조비는 당당히 조조의 적장자가 되었다.

조비의 후계자 과정은 치열한 전쟁이었다. 조비는 동생 조식, 조창과 끝없는 충성, 효성 경쟁을 벌여야 했다. 조창은 타고난 무장이었다. 전선을 누비며 북방을 정복해 조조의 신임을 얻었다. 조식은 타고난 천재였다. 뛰어난 문재와 영특한 머리로 조조의 마음을 헤아려 조조는 조식을 사랑했다.


이처럼 뛰어난 동생들과 후계자 자리를 놓고 경쟁해야 하는 조비는 매일 살얼음판이었다. 절대 권력자 아버지의 기대를 충족시켜야 한다는 부담감, 하루아침에 동생이 세자가 되고 자신은 내쳐질 수 있다는 공포감이 조비를 괴롭혔다. 더구나 조식에게는 천재 양수가 붙어 개인 교습을 하고 있었다. 조비도 양수 못지않은 천재 가후와 사마의를 곁에 두고 후계 경쟁에 나섰다.

그렇게 십수 년, 조조는 조비를 세자로 임명하고 나라를 물려주었다. 220년 조조가 죽자 조비는 왕위에 오르고 곧바로 한나라 헌제에게 선양 형식으로 황제가 된다. 그가 바로 문제 조비다.

조비는 현군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그러지 못했다. 그는 황제가 된 뒤 ‘내가 황제가 되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무리하게 전쟁을 벌였다. 또 화려한 궁궐을 지었다. 그는 불세출의 영웅 아버지 조조도 이루지 못한 삼국 통일을 달성해 아버지에 뒤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세상에 보여 주려 했다. 그는 후계 경쟁 과정에서 라이벌이었던 두 동생은 물론 그의 편에 섰던 귀족, 대신, 장군들을 모조리 숙청했다.


통합의 정치가 아닌 보복의 정치를 편 것이다.

조비는 또한 오랜 경쟁 과정에서 생긴 압박감을 해소하기 위해 사냥과 여색에 집착했다. 결국 조비는 손권, 제갈공명과의 경쟁에서 승리자가 되지 못했다. 조비는 나이 40세에 병사하고 말았다. 역사는 말한다. 조비는 아버지의 위대함을 넘어서려 했던 불운의 후계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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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쟁의 후유증, 복수와 보복

조비는 조조의 측실인 변 황후 소생이다. “조비가 태어나는 날 하늘은 푸르고 뭉게구름이 피었으며 서광이 비쳤다”는 기록이 있지만 조비의 ‘자전적 이야기’일 것이다. 그럼에도 조비의 자질은 평균 이상이었다. 조조가 25명 아들 중에서 선택한 후계자이기 때문이다. 변 황후가 정실 황후가 되자 조비의 후계자 지위는 공고해졌지만 최종 결정은 미뤄졌다. 후계 구도는 조비, 조창, 조식, 세 명으로 압축되었다.

조비는 충동적이고 사치를 즐겼다. 또 음주와 사냥을 좋아해 사고를 치기도 했다. 조조는 후계자 선정에 들어갔다. 내심은 조식이었지만 조조의 뒤를 잇는다는 것은 가문의 승계가 아닌 천하를 넘겨주는 일. 쉽게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조조는 조비와 조식을 시험했다.


조조가 두 사람에게 궁으로 들어오라고 명령했다. 그리고 문지기에게 “나 이외에는 누가 와도 문을 열어주지 말라”고 명령했다. 조비가 도착했다. 문지기는 “승상의 명입니다. 아무에게도 문을 열어 주지 말라 하셨습니다”라며 요지부동이었다. 조비는 그냥 돌아갔다. 이어 조식이 도착했다. 조식은 문을 열어주지 않는 문지기를 베어 버렸다. 조조는 임기응변과 결단성 있는 조식을 칭찬했다. 조조는 두 사람에게 공통 질문을 했다. 그때마다 조식은 논리정연하게 의견을 개진했다. 조조는 조식을 칭찬했다. 이는 조식의 참모 양수가 미리 조조의 질문과 그 답을 적어 조식에게 준 결과였다. 이를 안 조비의 참모 가후가 양수와 같은 답안지를 만들어 조비에게 주었다. 조비는 이 책을 조조에게 주었다. 이를 본 조조는 조식에게 실망했다.

조조가 군대를 이끌고 원정을 떠날 때면 조식은 효심 가득한 시를 지었고, 조비는 조조의 말고삐를 잡고 그저 울기만 했다.


조조는 생각했다. ‘조식은 총명하지만 효심은 조비가 낫구나.’ 가후가 조비에게 “덕과 관용을 베풀고 선비처럼 생활하십시오. 눈을 떠 잠이 드는 순간까지 한시도 자식의 도리를 잊어서는 안 됩니다”라고 조언한 덕이기도 했다.

조식에게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조조는 세력화하는 조식을 경계했다. 그때 번성의 조인이 구원군을 요청했다. 조조는 조식의 군사 능력을 시험하기 위해 조식에게 구원군을 이끌게 했다. 그런데 조식은 술에 취해 일어나지도 못했다. 조조는 대노했다. 이에 비해 조비는 항상 의연한 모습을 보였다. 북방을 정벌하고 의기양양해진 동생 조창에게 “이번 원정의 공을 모두 장수들에게 돌려라”고 조언했다. 조조는 조비의 깊은 생각에 감탄했다. 조조의 마음도 서서히 조비를 향했다.

217년 조조는 위왕이 되었다. 조조는 조비를 왕세자로 임명했다. 후계 경쟁이 마무리된 것이다. 그러나 조조는 세자는 조비, 군권은 조창에게 주며 마지막 후계 경쟁의 불씨를 남겨 놓았다. 220년 조조가 죽었다. 조비는 위왕이 되었다. 조비는 가후를 태위, 화흠은 상국으로, 하후돈을 대장으로 임명했다. 그는 한나라 헌제를 겁박해 선양의 형식으로 황제가 되었다.


유방의 건국 이래 400년 만에 한나라가 멸망했다. 조비는 국호를 위로 정하고 자신은 세조 문황제, 조조는 태조 무황제로 추증했다.

조비는 수도를 낙양으로 옮겼다. 제도를 정비하고 과도한 세금과 징벌을 금지했다. 또 유학도 장려했다. 황제의 재산을 빈민을 위해 기부했다. 그러자 당시 귀족과 부호들도 앞다투어 기부했다. 이 정책은 위나라를 더욱 부강하게 만들었다. 본래 촉나라, 오나라를 합쳐도 위나라의 국력을 당할 수가 없었는데 조비의 현명한 통치로 위나라는 강력한 국가가 되었다. 하지만 딱 여기까지였다.

조비는 경쟁의 후유증을 앓았다. 그것은 자신을 끝까지 괴롭힌 조창과 특히 조식에 대한 미움이었다. 눈치 빠른 조창은 조비에게 모든 군대를 넘겼다. 조비는 조창을 용서하며 허창에 머물게 했다. 조식은 끝내 조비에게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조비는 조식을 죽이기로 결심했다. “내가 일곱 걸음을 걷겠다. 시를 지어라. 만약 이를 못하면 너를 죽이겠다. 주제는 형제인데 단, 시에 형제라는 말이 들어가면 안 된다.


” 조비가 걸음을 옮기자 신하들이 긴장했다. 그 순간 조식의 입에서 시가 흘러나왔다. 그 유명한 ‘칠보작시七步作詩’다. ‘콩대를 태워 콩을 볶아 대니 콩이 가마솥 안에서 우는구나. 본래 같은 뿌리에서 태어났건만 어찌하여 서로 이리 들볶지 못해 안달인가.’ 조비도 조식은 죽일 수가 없었다. 어머니 변 태후의 간곡한 부탁도 있어 목숨만은 살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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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계자의 굴레에서 못 벗어난 불운아

조비는 후계 경쟁에서 승리했다는 자신감보다 조조의 선택이 옳았음을 보여 주려 했다. 그는 아버지도 해내지 못한 삼국 통일을 완수해 아버지보다 더 뛰어난 황제라는 것을 과시하고 싶었다.

조비는 세 번에 걸쳐 오나라를 공격했다. 조비의 첫 번째 원정군은 실패했다. 손권의 방어 전략이 견고했다. 2년 후 조비는 원정군을 이끌었지만 자신이 탄 배가 뒤집혀 죽을 뻔하면서 철수했다. 물론 조비에게 천재일우의 기회가 있었다. 유비는 관우를 잃자 70만 대군을 모아 오나라를 침공했다. 이때 손권은 조비에게 연합을 제안했지만 조비는 응하지 않았다. 전투는 촉나라 70만 대군이 전멸하고 유비는 백제성에서 죽고 말았다.


만약 조비가 촉 혹은 오나라를 공격했다면 조비의 숙원인 삼국 통일은 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이유인지 조비는 움직이지 않고 오히려 복수에 몰두했다. 그는 간언을 싫어했고 한 번 미운 사람을 두고 보지 않았으며 대신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한없이 잘해 주었다.

조비의 복수극은 집요했다. 우금이 걸려들었다. 우금은 조조를 보좌한 명장. 하지만 관우와 전투에서 패배해 방덕과 같이 잡혔다. 방덕은 칼을 받았지만 우금은 항복했다. 그가 위나라로 돌아왔다. 조비는 우금을 조조의 왕릉 관리로 보냈다. 모욕이었다. 우금은 조조의 능에 갔다가 벽화를 보고 충격을 받았다. 벽화에는 방덕이 당당히 죽음을 맞는 장면과 우금이 관우에게 무릎을 꿇고 울면서 비는 장면이 있었다. 우금은 이 그림을 보고 화병이 나서 죽고 말았다.

장수도 조조의 보복을 피하지 못했다. 장수는 가후의 전략대로 조조를 급습해 조조의 장남 조앙, 조카 조안민, 경호대장 전위를 죽인 적장이었다. 하지만 세가 불리하자 가후의 제안으로 조조에게 귀순했다.


조조는 장수와 가후를 진심으로 받아들이고 대접했다. 하지만 조비는 장수에게 “내 형을 죽여 놓고 무슨 낯짝으로 우리 가문에서 녹을 먹고 있는가?”라고 했다. 장수는 자살하고 말았다. 장수의 참모였던 가후는 조비가 중용했다. 조비의 용인술 기준은 ‘개인적인 호불호’였다.

조비의 당숙 조홍도 마찬가지다. 그는 종친이며 공신이었다. 왕자 시절, 조비는 그에게 돈을 꾸었다. 몇 번 반복되자 조홍은 돈을 빌려주지 않았다. 이에 앙심을 품은 조비는 황제가 되자 조홍을 제거했다. 조홍의 식객이 사소한 범죄를 저질렀는데 이에 연루시켜 사형을 명령한 것이다. 변 태후, 곽 황후가 만류해 조홍은 겨우 목숨만 부지할 수 있었다. 촉나라 장수 맹달이 귀순했다. 조조는 얼굴이 잘생겼다는 이유로 맹달에게 관직을 주고 우대했다. 관리를 등용하는 기준이 없었다.

정의는 학식과 인품이 뛰어난 관리였다. 조조는 그를 장녀 청하공주의 배필로 점찍었다. 조비가 반대했다. “정의는 애꾸눈이니 공주가 마음이 상할 것입니다.


” 정의는 동생 정이와 함께 조식을 후원했다. 시간이 흘러 조비가 등극하자 정의는 조비의 절친인 하후상에게 자신들의 목숨을 보존해 달라고 졸랐다. 하후상이 조비에게 청했지만 조비는 정의, 정이는 물론 그 집안의 모든 남자를 죽이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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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식과 조창도 결국 조비의 복수극을 피해 가지 못했다. 조창은 조비와 바둑을 두다 간식으로 나온 대추를 먹은 후 죽었다. 대추에 독을 넣었다는 설이 있다. 조식은 “제 능력을 모두 바쳐 충성을 다하겠다”고 조비의 자비를 빌었지만 이리저리 영지를 옮겨야 했다. 그리고 아내가 죽고 딸도 죽자 절망에 빠져 술만 마시다 죽고 말았다. 이 두 사람을 제외한 조조의 아들들 대부분이 조비에게 숙청당했다. 유일한 예외는 조조의 막내아들 조간이었다. 조조가 죽기 전 조비에게 “막내 조간을 잘 보살펴라”고 한 당부도 있지만 나이가 어려 경쟁 상대가 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조비는 죽기 전까지 조간을 귀여워했다고 한다. 이처럼 조비는 개인적인 원한을 갚는 데 황제의 권력을 이용했다. 그 과정에서 위나라는 통합과 소통보다는 편협과 음모 그리고 조비의 감정으로 국사가 좌우되는 위기에 빠졌다.

조비는 7년간 재위했다.


그는 전사한 병졸의 유해도 잘 거두었다. 또 유해를 찾지 못하면 빈 관을 만들어 장례를 치러 주었다. 나름 현명한 군주였다. 하지만 낙양궁을 개축하고 특히 사냥과 여색에 빠져 살았다. 게다가 유비가 사망하고 손권도 큰 타격을 입자 조비는 마치 삼국 통일을 완성한 황제처럼 행세했다. 조비는 관리 등용 제도인 구품관인법을 제정했다. 이 제도는 지방 관리나 선비 중에서 유능한 자를 선발하는 ‘중정’이라는 관리를 두고 그의 추천으로 인재를 등용하는 제도. 기준은 학식과 인품이며, 가문과 귀천은 따지지 않았다. 의도는 좋았지만 이것이 망국의 제도가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누가 중정이 되는가가 관건이었다. 중정직을 권력층과 연결된 유력 가문이 독점했다. 이들은 권력 유지를 위해 파벌과 가문에 도움이 되는 사람을 관리로 채용했다. 이는 귀족 문벌의 등장을 가져왔다.

이때 강력한 문벌 귀족으로 사마 가문이 등장했다. 이 무렵 조비는 조식, 조창은 물론 나머지 형제들도 숙청해 조 씨 황실의 세를 약화시켰다.


오랜 후계 경쟁이 가져온 조비의 의심병 때문이었다. 이는 조비의 권력 강화에는 큰 도움이 되었지만 위나라 황실과 중앙 권력의 약화를 가져왔다. 조비와 조예 사후 나라를 결국 사마 씨에게 빼앗겼다. 226년, 주색에 빠져 있던 조비는 중병에 걸렸다. 그는 조진, 조휴, 사마의, 진군에게 후계 조예를 부탁하고 세상을 떠났다. 조비의 나이 불과 40세였다. 조조의 아들로 오랜 후계 경쟁에서 승리해 삼국을 통일하려는 야망을 불태웠던 조비는 결국 자신의 능력을 보여 주기 위해 애쓰다 죽었다.

역사가 진수는 조비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다. “조비는 문학적 소양이 풍부해 문장과 시를 잘 지었다. 또 다방면에 재능이 있었다. 이 같은 재능에 그가 조금만 더 도량을 크게 하고, 공평하며 관용을 갖추었다면 진짜 현군이 되었을 것이다.


” 치열한 경쟁에서 승리했지만 승리에 대한 압박감을 이기지 못한 전형적인 후계자가 바로 조비다.

[글 박기종(커리어 코칭 칼럼니스트) 사진 픽사베이]

[본 기사는 매일경제 Citylife 제766호 (21.02.16)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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