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이모티콘 없이도 절절하네" 조선 선비들의 그리움 표현법

입력 2021/03/16 16:56
수정 2021/03/17 13:19
인문학이 필요한 시간

"유배지로 갈 때에도 이렇게 흔들린 적 없습니다"
"눈물은 눈에 있는 것인가, 마음에 있는 것인가"
◆ MK 포커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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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암 강세황은 먼저 간 부인을 추모하는 글을 많이 남겼다. 강세황의 난(蘭).

조선 영·정조 시대를 대표하는 선비 표암 강세황(1713~1791)은 늦은 나이에 빛을 봤다. 고결한 인품에 학문적 깊이도 갖췄지만 관운이 따라주지 않았다. 그러던 그가 처음 관직을 얻은 나이가 61세. 그 이후 승승장구한 강세황은 한성부판윤과 호조참판까지 지낸다. 당대 최고의 시서화(詩書畵) 삼절(三節)이라는 별칭까지 얻는다. 하지만 그의 부인 진주 유씨는 강세황의 영달을 함께하지 못한다. 열다섯 살 나이에 시집와서 30년을 함께 산 유씨는 강세황이 가장 곤궁하게 지내던 1756년 세상을 떠난다. 강세황은 고생만 하다 떠난 부인에게 제문을 바친다. 가슴 찡한 사부곡(思婦曲)이다.


"그대의 가난도 나 때문이요 그대가 병든 것도 나 때문이며 그대가 죽은 것도 나 때문이니. 내가 무슨 마음으로 이 세상에서 사람이라 불릴 수 있으며 내가 무슨 면목으로 구천에서 당신을 볼 수 있겠소."

세월이 한참 지나서도 부인을 잊지 못한 강세황은 사별한 지 24년이 되는 1779년 또다시 사부곡을 쓴다. 그가 가선대부에 제수되고 아내 유씨에게는 정부인이란 칭호가 내려진 즈음이다.

"정부인에 추증하는 교지를 내린들 아! 무슨 소용 있으리오…. 이제야 비로소 하지 못하던 예(禮)를 거행하며 교지를 태워 올리고 한잔 술 부으나 당신이 구천에서 살아나긴 어렵겠지요. 황천이 지척이니 신령끼리 의지하겠지만 살아남은 사람은 어찌 감당하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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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조선시대를 남녀 차별이 극심했던 가부장 사회였다고 생각한다. 과연 그렇기만 했을까? 그런 불공평한 관습으로 한 사회를 수백 년 동안 무리 없이 유지하는 게 정말 가능했을까? 우리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부분이 있다. 조선시대 부부 간 덕목은 '부부유별(夫婦有別)'이었다. 이 말을 차별의 의미로 이해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여기에서 유별이란 본분과 역할이 따로 있으니 이를 헤아려 서로 침범하지 말고 잘 지켜야 한다는 말이다.

추사 김정희가 부인 예안 이씨의 죽음을 애도하면서 한글로 쓴 애서문(哀逝文)은 콧등이 시큰하다. 추사는 인생의 많은 시간을 유배지에서 보낸다. 예안 이씨의 부고를 접했을 때도 제주에 유배 중이었다. 추사는 한 달이나 지나서야 부인의 부고를 접하고 하늘로 편지를 써 보낸다.


"형구가 앞에 있거나 유배지로 갈 때 큰 바다가 뒤를 따를 적에도 일찍이 내 마음이 이렇게 흔들린 적이 없었습니다…. 아아, 무릇 사람이 다 죽어 갈 망정 유독 당신만은 죽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먼저 죽는 것이 무엇이 만족스러워 나로 하여금 두 눈만 빤히 뜨고 홀로 살게 한단 말입니까. 저 푸른 바다, 저 높은 하늘과 같이 나의 한은 다함이 없을 따름입니다."

추사의 한글 편지는 80여 통이 남아 있다. 그중 38통이 예안 이씨에게 보낸 것이다. 편지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존댓말'이다. 추사는 시종일관 두 살 연하인 아내에게 꼬박꼬박 '~습니다' '~하옵니다' '~하옵소서' 등 극존칭을 쓴다. 그리고 편지 말미에는 '부 상장'(夫 上狀 ·남편 올립니다)이라는 한자어를 꼭 넣었다.

예안 이씨에 대한 추사의 애정은 대단했다. 예안 이씨는 후사를 갖지 못했다. 당시로서는 부부 관계에 금이 갈 만한 중대한 사안이었지만 추사는 예안 이씨를 끝까지 사랑하고 지켜낸다. 물론 장손이었던 추사는 집안 요구로 대를 잇기 위해 소실을 들이기는 한다. 하지만 예안 이씨에 대한 신뢰와 존중은 그녀가 죽는 날까지 변함이 없었다.

조선 사대부가 부인에게 남긴 사부곡을 논할 때 뺄 수 없는 인물이 심노숭(1762~1837)이다. 정조 때 과거에 급제한 심노숭은 정치적 파란에 휘말려 높은 벼슬을 하지 못했지만 명문장가로 이름을 날렸다.

그가 남긴 산문에는 먼저 세상을 떠난 동갑내기 부인 전주 이씨를 추억하는 글이 많다. 가슴 시린 문장들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가부장이 서슬 퍼렇게 살아 있던 시대. 한 남자가 부인에게 바친 헌사는 '사랑한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지금보다 훨씬 더 아름답고 감동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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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 김정희는 유배지에서 부인 예안 이씨에게 38통의 애틋한 한글 편지를 보냈다. 사진은 그 편지 중 하나.

"지난해 고향 파주에 조그만 집을 지었다. 아내가 기뻐하며 말하기를 '이제 당신의 뜻을 이룬 건가요?'라고 하였다. 정원과 담장을 배열하고 창문 위치를 잡는 것을 아내와 상의하여 하였다. 공정이 끝나기를 기다려 꽃과 나무를 심으려고 했는데 일이 끝나기 전에 아내는 병이 들고 말았다. 아내가 내게 말하기를 '파주 집 곁에 저를 묻어주세요'라고 하니 서로 얼굴을 마주하고 눈물만 흘렸다. 파주로 이사 오던 날 아내는 관에 실린 채 왔다.


아내의 무덤 자리를 정하였는데 집에서 백 보도 되지 않는 곳이었다."

아내의 바람이었던 꽃과 나무를 끝내 보여주지 못했던 남편은 회한의 감정 때문인지 정원을 가꾸는 데 집착한다. 심노숭은 그렇게 가꾼 꽃과 나무를 보며 아내의 분신을 만나듯 눈물로 세월을 보낸다. 그의 눈물은 하나의 경지를 탄생시킨다.

"눈물은 눈에 있는 것인가, 아니면 마음(심장)에 있는 것인가. 눈에 있다고 하면 마치 물이 웅덩이에 고여 있는 듯할 것인가. 마음에 있다면 마치 피가 액을 타고 다니는 것과 같은 것인가. 눈물이 마음으로부터 눈으로 나온다면 모든 물은 아래로 흐르는데 왜 유독 눈물만은 그렇지 않은가. 마음은 가슴에 있고 눈은 위에 있는데 어찌 아래로부터 위로 가는 이치가 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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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시간으로 이모티콘을 날리는 시대를 사는 우리는 이만큼의 '사랑의 밀도'를 결코 알 수 없을지도 모른다.

18세기 실학자 순암 안정복(1712∼1791)이 남긴 제문도 애절하다. 1775년 안정복은 예순을 훌쩍 넘긴 나이에 죽은 아내 창녕 성씨의 영전에 이런 글을 바친다.

"당신이 죽은 지 석 달이 지났구려. 석 달이 지났으나 당신이 죽었는지 여전히 모르겠소. 밖에서 돌아오면 당신 음성이 들리는 듯하고, 배가 고프면 밥을 달라 말하고 싶으며, 몸이 아프면 돌봐 달라 말하고 싶구려. 집안일을 헤아릴 때면 당신과 상의하고 싶은 마음이 문득 일어났다가 곧 그치고는 하오. 47년 동안 동고동락하며 흡사 금슬을 타는 듯하였거늘 이제 끝났구려…. 병세가 더 이상 어찌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장례 준비를 하고자 하였는데, 당신이 손수 짠 명주가 있다는 말을 듣고 그것을 쓰려고 하였으나 당신이 극구 말렸소. 훗날 나를 위해 쓰게 하려는 것이었구려. 병중에서도 나를 향하는 뜻이 이처럼 지극하였구려. 비록 사소한 일이지만 나도 모르게 가슴이 아파온다오…." 순암 안정복은 아내와 자신의 관계를 '금슬을 연주하는 뜻(鼓瑟琴之義)'이라고 표현했다. 금슬은 거문고와 비파를 가리키는데 '시경(詩經)'에 나오는 말이다. 두 악기의 소리가 유독 잘 어우러져 부부 간 사랑을 비유할 때 많이 사용한다.

18세기 살았던 이만부가 부인의 죽음 앞에 바친 제문도 명문장이다.

"내 마음을 토로하여 당신과 영결하고 싶은데, 붓을 잡고 종이를 대하니 억장이 막혀 한 자 한 자 써 내려갈 때마다 눈물이 흘러 글이 제대로 안 되는구려. 당신은 분명 못다 한 내 말들을 알고 있을 거요. 부디 이 자리를 돌아보고 멀리 가지 마시기를."

반가의 법도와 격을 중시했던 조선의 선비가 썼다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감성적이고 애절하다. 조선 중기 명문장가이자 병조참판을 지낸 채팽윤이 남긴 제문도 남아 있다. "슬프고 슬프오. 인간사가 이럴 줄이야. 사립문 밖은 적막한데 세모에 바람 불고 눈 내려 보이는 것마다 스산하니, 눈물이 절로 떨어지는구려. 죽은 자는 멀리 떠나도 산 자에겐 슬픔이 남는구려. 막걸리와 몇 가지 찬으로 조촐한 제수를 마련하긴 했지만 어찌 내 마음을 다 전할 수 있겠소. 영혼이 있거든 이 마음을 헤아리구려."

선비들의 이별법은 수백 년이 지난 지금 읽어도 감동과 격조가 느껴진다. 내로라하는 사대부들이 먼저 간 부인에게 바친 존경과 애틋함은 입만 열면 남녀평등을 말하는 지금보다 그 밀도에서 앞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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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연 문화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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